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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48화 (148/231)

148화

카르낙은 포드 부인에게 물어 릴리가 쓸 빗과 오일 챙기고 포드 부인이 부탁한 세탁물까지 한바구니 가득 이고 길을 나섰다. 가는 내내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릴리에겐 제법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긴 엘버그의 얼마 남지 않은 숲 중 하나겠죠?”

릴리가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오다가 불현듯 물었다. 카르낙은 빨래 바구니를 어깨에 진 채 주위를 한번 눈으로 빙 둘러보았다.

“아마도 그렇겠지. 가뭄이 여기서 더 심해지지만 않는다면.”

“아름다운 곳이에요. 이런 곳에 살면 그 누구라도 따듯하고 상냥해질 것이 뻔해요.”

“모두가 그렇진 않을 거야.”

아무리 아름다운 집에 살아도, 아무리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아이가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타락해 가는 사내들을 많이 보았다. 남편의 사랑, 부와 명예, 넘치는 보석과 화려한 드레스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일그러진 허영심을 채우려는 여인도 수 없이 보았다.

환경이 그의 됨됨이를 좌우할까? 카르낙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됨됨이는 본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신은 애초에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냈다. 사악하고 추한 것으로.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심성이 아니라, 더러운 오물에 떨어뜨리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자신의 핏줄로 인정하는 비정한 짐승과도 같은 모성이었다.

“포드 가족이 아니었다면 우린 죽었을 거예요.”

“…맞아. 보기 드물게 인정 많은 사람들이지.”

카르낙은 조금 망설이다 인정했다.

“그리고 또 좀 특이한 가족이고.”

“당신과 같은 투로에, 당신과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포드 씨를 이야기 하는 건가요?”

“그와 짝을 이루고 살고 있는 포드 부인도.”

그리고 부부를 닮아 투로에 대해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이상한 나라의 매짐도 포함해야겠다.

“길란 포드 씨는 불을 매우 잘 다루더군요. 스코크 못지 않아요. 어쩌면… 조금 더 잘 다룰 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요.”

릴리는 망설이듯 뒷말을 덧붙였지만 카르낙 역시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스코크보다 이 깡촌의 대장장이가 더 불과 철을 잘 다룰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의 피부는 불에 녹기는커녕 재생되질 않나. 마치 새로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기에 길란은 불에 대한 무서움이 없다. 그것은 자타공인 엘버그의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인 스코크조차 갖지 못한 능력이었다.

그 이후로 카르낙은 불을 볼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고 나면 문뜩 제 손도 불길에 밀어넣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치 그 시뻘건 불덩어리에 매혹당하기라도 하는 듯. 매번 그 충동을 견디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까 봐. 투로가 신의 미움을 받은 악의 족속임을 인정하게 될까 봐.

“정말 단란한 가정이에요. 포드 가족은요. 부부사이도 정말 화목하고요.”

“…….”

릴리가 꿈꾸던 모습이었을까.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어 조금은 고생스럽게, 조금은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일상이. 그러나 카르낙은 상상할 수 없었다. 억척스럽게 땅을 일구고 풀을 뜯고, 흙먼지를 묻히며 사는 릴리의 모습을 말이다.

너는 그것보다 더 고귀하게 살 자격이 있다. 아름답고 단정한 옷을 입고 산새소리를 듣고 나비의 날갯짓을 쫒으면서 말이다.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의 행복을 위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갈 자격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린 거기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다 왔어. 여기야.”

매짐이 말한 곳이었다. 식수로도 사용할 수 있는 맑고 깨끗한 냇가와 그 옆으로는 사람이 씻을 수 있게 깊게 고인 물웅덩이가 있었다. 비가 온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제법 물이 차 있었고 수초와 돌멩이들 덕분에 수질도 깨끗했다.

매짐이 말하길 이 곳은 포드 가족만 아는 비밀의 웅덩이로, 물이 고이는 자리에 아버지인 길란이 바닥을 파고 돌을 쌓고 수초를 심어 만들었다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따로 빗물을 저장하거나 광장에 우물을 파 식수와 씻을 물을 해결하지만 포드 가족에게 그 곳은 너무나 멀고, 또 자주 혼탁해져 잘 쓰지 않는다며 이 정도의 양이면 작지만 세 식구가 쓰기엔 충분한 양이라고 덧붙였다.

혹시 이 웅덩이가 마른 적이 있느냐는 카르낙의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긴 가뭄이 오면 물 양이 줄어 겨우 세 식구가 먹고 마실 수 있는 정도만이 고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가물게 되었을까. 정말 여신이 저주라도 내린 것일까. 투로가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엘버그 대륙은 이제 어찌할 수도 없이 썩어 버려서 모두 죽거나 떠나야 하는 것일까. 마치 멀루아처럼.

그래, 그럴 수 있다. 종국엔 이 엘버그 대륙 전체가 멀루아처럼 가난과 질병에 썩어 들어갈 수 있다. 모두 그렇게 죽겠지. 그럼 그때는 어떻게 할까. 멀루아에서 그랬듯 불을 지를까. 미련 없이 모조리 학살하고 난 후, 나 역시 그 불길에 죽겠지. 그렇게 영원히 멸망하고 나면 그럼 모든 것이 끝이 나리라, 분명하고도 허무하게.

물웅덩이를 발견하자마자 릴리는 주저앉아 신발과 덧신부터 벗어던졌다. 유산을 했으니 무조건 따듯해야 한다는 포드 부인의 명령에 못 이겨 덧신과 속바지를 겹겹이 입고 있느라 얼마나 갑갑했을까. 제발 결혼식에서 샌들을 신게 해 달라고 애걸하던 때가 마치 어제 같은데 시간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나 버리고 말았다.

“물이 제법 차가워. 그대로 몸을 담그면….”

그러나 카르낙이 만류를 마치기도 전에 릴리는 입고 있던 것들을 모두 훌훌 벗어 버리고 웅덩이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물결이 일고, 물보라가 그의 얼굴까지 몇 방울 튀어 올랐다. 카르낙은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 내며 못한 말을 마저 이었다.

“…위험할지도 몰라.”

어차피 듣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물에 담갔다가 ‘푸하!’ 소리를 내뿜으며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어찌나 자유로워 보이는지 꼭 그곳이 그녀의 집인 것 같았다.

“물웅덩이라고하기에 이렇게 넓고 깊을 거라 생각 못 했어요. 장정 몇이 들어와도 무리 없겠네요.”

“매짐의 말로, 그 웅덩이는 물이 마르지 않는다더군.”

카르낙은 릴리의 옷가지를 주워 탁탁 털며 주위의 아무 바위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뭄이 들어도 마른 적은 없대.”

“숲이 있어서 그래요.”

릴리는 단언했다. 카르낙은 매짐에게도 들은 적이 없는 해답을 마치 아주 잘 알고 있는 듯이.

“말했잖아요. 비가 올 땐 숲의 향기가 짙어진다고요. 왜냐하면 숲은 물을 머금거든요. 그것을 머금고 있다가 딱 생명이 필요한 만큼만 베풀어 줘요. 그래서 숲은 만물의 근원이고, 생명이고 또한 어머니죠.”

“아마네스 여신이 들으면 곡을 할 노릇이로군, 릴리. 제 자식이 다른 것을 어머니라 부르다니.”

릴리는 씩 웃었다. 물결에 반사된 빛이 그 미소에 눈부시게 맺혔다.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라면 분명, 이 숲에도 그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요?”

“그녀는 얼음에서만 산대. 그리고 하얀 사슴, 하얀 늑대… 그 외 하얀 것들에 살고.”

“신이라고 하기엔 편협한 선택이네요.”

릴리는 신을 도발하듯 이야기했다. 카르낙은 물살을 가르는 그녀를 보며 엘버그에서 저토록 신을 욕되게 부르짖는 이는 아마 파니릴리 발투만 저 여자 그리고 자신뿐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 땅을 떠나 그라타로 가면 그녀의 언동 따위 무슨 상관이랴.

카르낙은 헐벗은 파니릴리의 나체에서 시선을 옮겨 숲을 한번 빙 둘러보았다. 사방이 빼곡했다. 마치 풀잎 색의 장막이라도 친 듯 안락하고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설핏 들기도 했다.

그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땅 위에 싹이 트기 위해선 물이 필요하다고 들었어.”

“네. 땅과 햇빛도요.”

“땅도 있고 볕도 과할 정도로 있는데 물이 없는 것이 문제네. 물이 없으면 풀이 자랄 수 없고 풀이 자랄 수 없다면 물을 머금을 수도 없으니 다시 같은 문제가 반복되겠지. 그리고 비는 오로지 신만이 관장하는 것이고.”

“이유가 있을 거예요.”

릴리는 제 머리카락을 물 안에 비비며 답했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에 따른다고 했어요. 무언가 과하거나 부족해도 생명은 망가지죠.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예요. 무언가 과하거나, 혹은 덜한 것이요.”

과하거나, 덜한 것. 대체 그게 무얼까.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짚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의 존재. 투로라는 존재. 엘버그의 역사에 갑작스레 등장하여 수백 년을 함께 살아온 이민족의 존재.

정말 자신과 같은 투로들이 이 땅을 갉아 먹는 것일까. 불 속에 재생하는 포드처럼 투로들은 모두 그러한 능력을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 전쟁 중 불에 타죽은 투로들을 많이 보았다. 재생은커녕 새까만 잿더미가 되어 뼈조차 회수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길란 포드란 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자의 정체에 모든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어쩌면 그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아닐까, 신이 미리 정해 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카르낙은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칼을 털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말도 안 돼. 그것을 예비하기 위해 이 진창을 만들어 모두를 고통 속에 밀어 넣는 신 따위… 존재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칼.”

릴리의 부름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어?”

몇 번이나 저를 부른 듯,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못 들었어.”

“천 한 장만 달라고 했어요.”

“아. 응.”

카르낙은 벌떡 일어나 제 발치에 둔 천을 한 장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주는 이의 크고 메마른 손과 받는 이의 작고 촉촉한 손끝이 닿았다. 보드랍고 뽀얀 팔에서 쪼르르 소리를 내며 물이 떨어졌다. 참 새하얀 팔뚝이었다. 그리듯 이어진 어깨선 아래 반듯한 쇄골, 그리고 그 아래….

카르낙은 시선을 바닥에 떨구며 서둘러 그녀와 맞닿은 손을 갈무리했다. 릴리도 어색한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 제 어깨를 반복적으로 문질렀다.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만 한동안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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