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카르낙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당신이 유일할 수도 있습니다.”
길란은 작게 숨을 토했다. 노인은 퍽이나 덤덤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유일한 자라면 운명은 내가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게 두지 않았겠지. 이렇게 하얗게 머리가 세기 전에, 아내와 자식을 얻어 지금처럼 늙고 쇠약한 노인이 되기 전에 마땅히 세상을 호령하지 않았겠나? 마치 발투만 왕처럼 말이야.”
“…….”
“그러한 이유로 나는 이런 이가 나 하나뿐이라 생각하지 않네. 분명 나와 같으나 좀 더 위대한 운명을 타고난 자가 있을 거라 확신해. 엘버그의 사람들이 너무도 두려워 차라리 증오하길 택했던 이유를 몸소 세상에 보여 줄 이가 말이야.”
“…….”
“혹, 카르낙 발투만이란 자도 자네와 나같이 보라색 눈동자를 지니지는 않았다던가?”
“…….”
“덩치는 어떠한가? 자네보다 큰가?”
“…….”
“아니면 자네처럼 모든 투로들은 그토록 강하고 견고한 기골을 가지고 있나?”
카르낙은 계속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매짐은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그의 낯빛을 살피다가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자. 고단한 분을 너무 오랫동안 잡아 두었어요, 아버지. 먼 길을 몸이 성치 않은 아내분과 함께 도망쳐 왔으니 이만 이스바 경을 쉬게 해 드리죠.”
그러자 길란이 정신을 차린 듯 아, 하는 신음을 내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그러게나 말이다, 매짐. 네가 아니었다면 피곤한 사람을 붙잡고 밤을 새울 뻔했구나. 이해를 구하네, 이스바. 늙으면 이렇게 눈치가 없어진다오.”
카르낙 본인조차 자신의 피로를 잊고 있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들 끝에 이어진 길란의 질문들은 모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것들뿐이어서 그야말로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매짐이 아니었다면 무엇 하나 답하지 못한 채 어물거려 오히려 오해를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카르낙은 깊이 안도하며 예의를 갖춰 길란의 사과에 답하였다.
“괜찮습니다.”
“자네의 부인에게 내 침실을 내어 줬으니 나는 매짐의 방에서 함께 자겠네. 당분간 침실은 금남의 구역이 될 거야. 자네가 원한다면 창고나 마구간에 자리를 만들어 주지. 우리 집엔 따로 손님을 위해 마련된 방은 없으니 말이야.”
“가능한 한, 제 아내의 곁에 머물고 싶은데요.”
카르낙의 답에 길란은 안 될 게 뭐가 있냐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매짐에게 모포를 가져오라고 하지. 아무 곳에나 자리를 펴고 눕게. 단, 포드 부인의 발에 밟히지만 않도록 하게나. 갈비뼈가 부러질 테니까. 내가 장담하지.”
포드 부인은 풍채가 좋은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작고 아담해 두 손으로 거뜬하게 안아 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짓궂은 농담이라도 그 안에 담긴 것은 아내에 대한 애정뿐이었다.
매짐은 주방용 숯불에 흙을 부어 끄고 카르낙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카르낙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눈치껏 자리까지 깔아 주었다. 카르낙은 매짐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가 있었다. 그 나이 또래의 청년이라면 으레 가질 수 있는 힘과 명예에 대한 야망. 매짐은 저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사다리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기야 못 해 줄 것도 없다. 무사히 리오에 도착해 핀과 만날 수 있다면 매짐을 위한 자리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었다. 원하는 사람을 원하는 곳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국왕이 가진 가장 큰 권력이 아니던가.
매짐이 밤 인사를 건네고 제 방으로 사라지자 카르낙은 그가 마련한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길란이 보여 준 광경에 대해 생각했다. 그동안 그는 저도 모르게 계속 손을 매만졌다. 아니, 아니야, 쓸데없고 위험한 생각이야, 머리를 몇 번이나 저어 떨쳐 버리려는데도 마그마 같던 그 숯의 시뻘건 불씨가 끊임없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악마에게 홀린 듯이.
***
다음 날 정오 무렵, 릴리는 정신을 차렸다. 땅이 절절 끓는 뜨거운 날씨에도 추위가 느껴졌다. 몸을 말고 덜덜 떠는 그녀의 몸 위에 몇 겹의 이불을 더 덮어 준 것은 포드 부인. 릴리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이였다. 모로 누워 눈을 깜빡거리니 그녀가 말을 건넸다.
“정신이 좀 들어요? 피를 많이 흘려서 좀 추울 거야. 아물었던 아기집에 다시 상처가 난 탓이지. 다행히 하혈은 멈췄으니 걱정 말아요. 나도 이제 한시름 놨어.”
포드 부인은 이마를 손등으로 짚으며 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릴리의 곁을 지키느라 밤을 새운 탓에 늙은 노부인의 주름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카, 칼….”
“칼?”
노부인은 숯이 들어간 놋그릇을 침대 이불보 아래에 파묻으며 되물었다. 신속하고도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그게 그치의 애칭인가 보지? 댁의 남편 말이야. 이야길 듣자 하니 멀루아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릴리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남편의 이름을 먼저 부른 것부터가 큰 실수인 듯했다. 칼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남편을… 제 남편을 보고 싶어요.”
“아마 지금쯤 말을 보살피고 있을 거야. 기다려요. 곧 돌아올 테니.”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여기가 어딘지도요.”
“멀루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이에요. 워낙 깊은 숲속에 묻혀 있는 덕에 외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일은 드물지. 왕위 찬탈에 대한 소식도 1년이나 지나 전해졌으니까. 엘버그 전역이 전쟁으로 고통받았다는데, 우리는 겪어 본 적이 없으니 영 딴 세상의 이야기지. 이 마을이 그래. 동떨어져서 안전하고 편안한 대신 아주 지루하고 느려.”
“…그럼 이곳에 온 건….”
“이스바.”
이스바?
“댁의 남편이 당신을 말에 태워 한밤중에 데려왔어. 멀루아에서 탈출했다며? 불길이 얼마나 크고 억센지 여기서도 그 모습이 보일 지경이었어. 꼬박 사흘 동안 불길이 타오르더라고.”
그렇게 이야기가 된 거다. 카르낙은 이스바의 이름을 빌려 제 신분을 숨기고, 멀루아에서 도망친 영지민으로 위장했다는. 그렇다면… 나는? 릴리는 재빨리 제 머리를 더듬었다. 까슬거리는 천이 제 머리를 칭칭 두르고 있었다. 카르낙이 해 두었을 거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과 눈썹도 만져 보았다. 눈썹이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진흙을 발라 두었음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다행이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당장 몸을 씻지는 못하겠지만 세수라도 좀 하겠어요? 어제 대충 마른 천으로 지저분한 것을 좀 닦아 내긴 했는데.”
“감사합니다….”
노부인의 이름을 몰라 뒷말을 흐렸다. 그러자 부인이 제 이름을 알려 주었다.
“자미에 포드.”
“감사합니다, 포드 부인. 하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더 회복한 후에 하고 싶어요.”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생김새였다. 혹여 포드 부인이 제 말간 얼굴을 보고 정체를 눈치챈다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 그러니 조금 더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
방문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포드 부인은 말했다.
“마침 돌아온 모양이네.”
아니나 다를까, 방 앞에 멈추어 선 그림자는 곧 방문을 ‘똑, 똑’ 두드렸다. 포드 부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들어와요.”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본 카르낙은 눈을 뜬 릴리와 시선을 맞췄다. 맥이 턱 풀린 듯 그의 어깨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큰 한숨을 쉬며 그녀를 향해 나아가는데 발치에서 지켜보던 포드 부인이 경고했다.
“씻지 않았다면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아직 댁의 아내는 병에 취약한 상태니까.”
그러자 카르낙이 자리에 뚝 멈춰 섰다. 방금 오코의 갈기를 쓸고, 말굽을 닦아 주고 오는 길이었다. 흙과 땀과 놈의 털 따위가 잔뜩 묻어 있을 터였다. 갑자기 눈앞에 유리 장벽이라도 쳐진 듯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괜스레 손만 바르작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입술이 새파란데요.”
“하혈을 많이 해서 그래. 원래 피를 쏟고 나면 추운 법이지.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이젠 괜찮아질 거니까.”
카르낙은 릴리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추위에 질린 얼굴이라도 눈동자만은 투명하고 고요하였다. 다행이다. 적어도 영혼이 곧 달아날 듯 위태로워 보이진 않으니.
“일단 나가서 먼지라도 털고 오지 그래. 아니면 아예 몸을 좀 씻고 오든가. 이제 나도 밀린 일을 좀 해야 하니 지금부터는 당신이 아내를 돌봐. 난 할 만큼 했다고. 근처에 물웅덩이가 있어. 매짐에게 부탁하면 안내해 줄 거야.”
집 안에 들어오기 전에 대충 먼지는 털어 냈다고 항변하려 했으나 그만두었다. 그녀의 말대로 포드 부인은 릴리를 돌보느라 꼬박 하루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식사가 부실했다.
아침과 점심은 어제 남은 음식들로 대충 때웠다지만, 대장간에서 고생하고 있을 가족을 위해 중간중간 요기할 간식과 제대로 된 저녁 식사는 해 줘야 한다. 그러려면 해가 지기 전에 숲에 가 열매를 따고, 뿌리채소도 캐 와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네. 그러죠, 부인.”
카르낙은 릴리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갈무리하고 냉큼 발길을 돌렸다. 어서 씻고 와 제대로 그녀와 마주 보고 싶다는 욕망에 마음이 급했다. 카르낙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포드 부인은 킥킥대며 말했다.
“애처가인 게 틀림없어, 그렇지? 어제도 방문 앞에 앉아 밤을 새우더군. 내가 자기 부인을 잡아먹을 줄 알았나 보지?”
카르낙이? 어쩐지 그에게는 그런 낯간지러운 단어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릴리가 답을 하기 어려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포드 부인이 접시에 담긴 물에 자신의 손을 닦으며 다시 말했다.
“물론 무뚝뚝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는 건 분명해. 투로들은 아내를 제대로 아끼고 사랑할 줄 알지. 내 경험상으론 말이야. 이제 침대 시트와 패드를 좀 갈아 줄게. 남편에게 부탁하기엔 껄끄러운 일이잖아?”
“가… 감사합니다.”
릴리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포드 부인이 조심스럽고 능숙한 손길로 침대 시트와 엉덩이 아래에 받쳐 놓은 패드를 가는 동안, 카르낙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지 못하겠노라 뒤로 물러서는 그림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라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제 부인의 침대에 새로운 시트를 깔고, 깨끗한 리넨 패드를 깔아 주었으리라. 그 모든 것이 마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이 릴리가 그의 곁에 머무르려는 이유였다. 엘버그인들은 불결하고, 비도덕적이라 여기는 것들을 아주 익숙하고 간단하게 뒤바꾸어 버리는 그를 릴리는 고결하다 여겨 왔다. 그의 태생과 성격에서 느껴지는 카르낙 발투만만의 품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