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다만, 나를 이곳에 데려온 여인은 새하얀 피부에 금발 머리를 지녔다더군. 그분이 내 모친인가 가끔 생각하기도 하지. 어쨌든 검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아이는 모친에게는 치부였을 테니 버리지 않았겠어?”
아마도 그렇겠지. 인간이란 다 똑같은 것이 아니던가, 자신의 이득 앞에선 모정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나. 예전엔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 왔다. 그러나 릴리가 자신의 아이를 유산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카르낙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비록 그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미약한 생명일지라도 죽어 없어졌다 생각하니 슬펐다. 온기는커녕 형체조차 불분명했던 아이일지라도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릴리의 아이여서인지, 아니면 저의 핏줄이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할지라도.
자신이 나약한 탓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아니면 엘버그인이 태초에 사랑 없이 태어났다거나. 유산 사실을 알고도 침착했던 릴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실감을 제대로 느껴 볼 겨를도 없이 또 험한 길을 떠나 여전히 사선에서 헤매고 있는 그녀다. 그 생각에 마음이 무너졌다. 더는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자네는 어쩌다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가?”
“전….”
매짐이 보리 맥주 한 잔을 들고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으며 끼어들었다.
“멀루아에서 도망쳐 나오셨대요.”
정확히는 모두 매짐의 주장일 뿐 카르낙 저는 그런 이야길 입에 올린 적도 없었으나 일단은 침묵했다. 길란은 ‘아’ 하고 아는 체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부인과 별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어. 투로왕이 멀루아 영지를 모조리 불태웠다고.”
카르낙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제 잔의 주둥이만 매만졌다. 길란이 말을 이어 갔다.
“아내는 그를 증오해. 발투만이 왕이 된 이후 오히려 투로에 대한 인식이 더 나빠졌다고 말이야. 우리같이 이런 숲속에 처박혀 사는 무지렁이들이 뭘 알겠어. 아내는 투로에 대해서 잘 몰라. 그녀가 겪어 본 투로라고는 나 하나뿐이거든. 나 역시 나 이외의 투로를 만나 본 적은 한두 번뿐이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투로는 자네가 처음이지.”
“전 부모님과는 반대예요, 이스바 경. 저는 왕이 아주 사내답다고 생각하거든요. 대장부가 뜻을 품으면 그 정도의 냉정함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매짐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며 왕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왕 덕에 투로들을 더 두려워하기 시작했잖아요. 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사내는 자고로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줘야죠.”
길란은 아들의 말이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패기가 넘치다 못해 과한 매짐이 저러다 사고라도 치면 어쩌나 아내가 걱정하는 지점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더 투로들에게 박하게 구는 것이다,
“멀루아 영주야 죽어 마땅하지. 그자의 악행은 정말이지 지겹도록 들었지만 죄도 없이 고통만 받던 영지민들까지 모조리 태워 죽인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야.”
내내 가만히 듣기만 하던 카르낙이 천천히 입을 뗐다.
“멀루아에는 풍토병이 돌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영지를 불태운 건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고요”
“치료하기 위한 노력은 했던가?”
치료를 하려면 비옥한 땅과 깨끗한 물과 따듯한 볕과 건강한 식재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설사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었었더라도 개중 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도.
방화는 그 모든 것들을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멀루아 영지민들을 치료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없다. 카르낙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없었습니다.”
“왕은 엘버그인들을 증오한다더군. 증오하기 때문에 모조리 죽어 버리길 원했을 테고 그것을 원하니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을 거야.”
반박할 수 없다. 그들의 목숨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길란의 말대로 차라리 죽어 버리길 바랐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어르신께서 저와 같이 투로의 사막에 자라셨다면 아마 그처럼 엘버그인을 증오했을 겁니다. 그들이 무고하게 죽인 투로의 수만 해도 이 숲속의 나뭇잎보다 많을 테니까요.”
“내겐 엘버그에서 나고 자란 처가 있어. 또 앨버그 인의 피를 나누어받은 원수 같은 자식새끼가 있지.”
노인은 매짐에게 흘깃 눈길을 주며 옅게 웃었다. 그다지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기색은 아니었다.
“또 투로가 받았을 고통과 시련도 겪어 본 적이 없으셨겠죠. 투로에겐 허락된 적이 없는 처와 자식을 얻어 가족을 이루었고 시련 없이 엘버그인들과 동화되어 사셨지 않습니까.”
길란은 또 옅게 웃었다. 맥주잔을 매만지는 손길이 느릿하고 투박하였다.
“자네 불에 데어 본 적이 있는가?”
그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카르낙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불? 엘버그 왕국에서 가장 터부시하고 두려워하고 증오해 마지않는 그것 말인가.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글자글 끓으며 살아온 삶이었다. 그 뜨거움을 피하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 마당에 그것을 누가 가까이 하고 싶어 할까. 그 작열하는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숨 막히게 하는지 뼈저리게 아는 마당에.
“숯을 하나 가져오너라.”
길란이 명령했다. 매짐은 익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스튜를 데우기 위해 불을 피운 장작더미 중 벌겋게 불이 붙은 숯 하나를 집게로 집어 아버지의 앞에 내밀었다. 열기로 숯의 주변이 일그러져 보였다. 길란은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오른팔을 걷어붙였다.
“잘 보게.”
그러며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감과 확신으로 가득 찬 뜻 모를 미소였다. 그는 카르낙이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지 확인하며 숯불로 손을 옮겼다. 설마 저것을 움켜쥘 생각은 아니겠지 하는 순간 그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카르낙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잔뜩 굳은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입까지 벌렸다. 그는 눈앞의 늙은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정신이라면 작열하는 숯을 잡을 까닭이 없었다.
치이이이익, 하며 꺼뭇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살이 타는 냄새가 훅 퍼졌다.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불을 쥔 노인도, 그것을 스스럼없이 제 아비의 앞에 내어 준 자식도 전부 미친 거다.
한참 만에 노인은 숯을 놓았다. 이미 타들어 갈 만큼 타들어 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길란의 손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났다. 또한 살 타는 냄새 또한 여전히 지독했다. 피부가 녹으며 스며든 숯으로 손바닥이 온통 새까맸다. 그중에는 여전히 불씨가 살아 있는 숯가루도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대체 뭘 보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제 손이 다 녹아 타들어 갔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길란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제 아비를 닮아 실성한 매짐도 신나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황에 진력이 날 때쯤에 길란은 반대쪽 손으로 새까만 자신의 손을 탁탁 털어 보였다. 순간 카르낙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기괴하다 못해 무서운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말이지 소름 끼치게도 숯가루를 털어 낸 손바닥은 앙상한 뼈마디가 드러나는 대신 말간 살갗이 보였다. 분홍빛의, 건강하고 생기 있어 보이는 색은 분명 피부였다. 방금까지 자리를 박차려 했던 의지를 잃은 채 카르낙은 넋을 놓았다.
“나는 늘 궁금했다네, 이스바. 모든 투로들이 나와 같은지.”
카르낙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길란의 손을 잡아당겼다. 확인해야만 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말이다. 카르낙은 길란의 손바닥에 남은 숯가루를 털어 내고 그의 피부를 만져 보았다. 숯불이 닿았던 곳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오랜 망치질로 두껍고 거칠어진 기존의 피부와는 완전히 달랐다. 재생. 그것도 완전히 새것으로 재생한 것이다.
아니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 사막에서 말라 죽은 투로가 대체 몇인가. 볕 아래에서도 타 죽는데 하물며 불길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남는단 말인가.
서쪽의 사막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고 했다. 투로는 그 불 아래에서 태어난 저주받은 종족이고 그래서 언제나 아마네스 여신의 형벌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고. 카르낙은 내내 그 말이 그저 투로를 혐오하기 위한 미신일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엔 신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도, 그로 인해 저주받은 종족 따위도 없다고. 모든 것은 엘버그인들의 악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부 그들이 지어낸 것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불에 의해 재생하는 길란의 피부를 보고 나니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불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고. 그러나 그렇다면 말라 죽어 간, 사막의 열기와 볕을 이기지 못해 타들어 간 형제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왜 그들은 죽어야만 했나.
“…당신 누구야.”
묻는 말투에 살기가 어렸다. 적의를 가득 품은 냉정한 눈동자로 카르낙은 길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그에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물었다.
“그것은 내가 물을 말이네, 젊은이. 나와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투로여. 자네는 대체 누군가?”
카르낙은 침을 삼키며 길란이 쥐었다 놓아 버린 숯을 바라보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안구가 타들어 갈 듯 고통이 이는데 어떻게 저것을 쥘 수 있단 말인가.
찰나의 호기심을 그는 고개를 저으며 털어 냈다. 멍청한 짓이다. 십중팔구 피부가 녹고 뼈가 드러날 것이다. 릴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검을 들어야 한다. 검을 쥐어야 할 손을 순간의 아둔함으로 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길란은 아들에게 건네받은 천 뭉치로 더러워진 손을 깨끗이 닦으며 카르낙을 대신해 답을 했다.
“난 이것이 엘버그인으로 하여금 투로를 증오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왔어. 만일 투로 중 나와 같은 자가 있다면, 만에 하나라도 그러한 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투로들을 오랫동안 두려워했겠지. 마땅히 두렵고 거북했을 거야. 언젠가 말이야, 언젠가 내게 세상을 등질 용기가 생긴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나는 죽기 전 내 발로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갈 생각이라네. 과연 그것이 내 심장까지 녹여 나를 소멸시킬지, 아니면 내게 새로운 피부를 주는 것처럼 완전히 나를 재생시킬지 자네도 궁금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