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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40화 (140/231)

140화

그제야 길란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아내의 명령을 재빠르게 복기하는 것 같더니 외투를 챙겨 입고 쫓겨나듯 문밖을 나섰다.

“내가 유산을 네 번이나 했다우.”

포드 부인이 깨끗한 리넨 천으로 릴리의 얼굴에 묻은 흙을 살살 닦아 내며 말했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카르낙뿐이었으므로 아마도 그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는데 그것이 잘 안 되었어. 아마네스 여신님께선 우리 부부에게 자식은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딱 한 아이만 허락하셨어. 그래도 그것이 아들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그 후로 아이를 갖는 것은 단념했다우. 이미 몸도 많이 망가져 있었고. 더 가지려 했어도 아마 힘들었을 거야.”

포드 부인은 말을 하면서도 바지런히 손을 놀려 릴리의 몸에 둘러져 있던 모포를 벗겨 내고,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살폈다.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아내분이 아직 하혈 중이요?”

카르낙은 재빨리 도리질을 했다.

“아니요. 멈췄습니다. 멈추어야 했고, 다행히 멈췄어요. 아내가 하루만 더 하혈을 했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을 거라고….”

“얼마나 말을 타고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유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무리를 했으니 다시 피가 비치는 건 당연하지. 이 정도로 그친 걸 다행으로 아시게. 이스바. 만일 피가 멈추지 않았다면 당신 아내는 당신이 죽인 거나 다름없었을 테니.”

“…….”

포드 부인의 거침없는 말에 카르낙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릴리는 죽는 건가. 그것도 전부 나 때문에.

쿵, 하고 누군가 침대 발치에 양동이를 내려놓았다. 매짐이었다. 그가 어머니의 핀잔에 끼어들었다.

“얼마 전 왕이 멀루아 땅을 모조리 태웠다고 들었어요. 거기서 탈출해 온 것 맞죠?”

카르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어머니는 상황도 모르면서 무슨 그런 박한 말씀을 하세요? 하물며 아내분을 죽이려고 이스바 경이 이 산골 무지렁이 마을에 오셨겠어요?”

아들의 역성에 포드 부인은 양동이를 옮기며 뚱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 영지 이야긴 들었어. 거기 사는 영지민들만 불쌍하지. 평생 영주의 폭정에 시달린 것도 모자라, 왕이란 놈은 구해 주진 못할망정 죄도 없는 사람들을 전부 다 태워 죽이다니. 천하의 몹쓸 놈이야. 그런 놈은 똑같이 태워 죽여야 해. 이래서 근본도 없는 천것들은 제 주제를 알아야 하는 거야. 어디 버러지만도 못한 투로 놈이.”

“…….”

카르낙은 아주 천천히 눈을 돌려 욕을 뱉어 대는 포드 부인을 주시했다. 이마에 솟은 핏대가 곧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곧 눈이 뒤집힐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제 눈앞에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 말씀 자꾸 하시면 아버지가 섭섭해해요.”

“네 아버지는 달라! 어디 그런 천한 것이랑 비교를 해!”

“아버지도 투로면서….”

“네 아버지는 왕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훌륭한 사람이야! 아버지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해를 끼친 적도 없다! 항상 성실하고 배려심이 깊은 분이야!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거두어 주셨지. 엄마도 네 아버지의 그런 점이 좋아서 결혼했고. 한데 어째서 너 같은 후레자식을 낳았는지….”

“…언제는 귀하디귀한 삼대독자라면서….”

“할아버지가 아들을 못 낳았으니 어쩌겠니! 자식이라고는 여식 하나뿐이고, 믿을 만한 사내놈은 종살이하던 투로 놈 하나뿐이니 하는 수 없이 성까지 주며 결혼을 시켰는데 허구한 날 유산에, 기적적으로 가진 것은 네놈 하나뿐이잖아. 그러니 마음에 안 드는 후레자식이라도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 수밖에!”

아이고 귀 따가워. 매짐은 새끼손가락으로 제 귀를 후볐다.

“엄마는 네 아버지랑 결혼한 거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네 아버지 아니었으면 넌 태어나지도 못했고, 엄마는 지금껏 살아 있지도 못했다. 다 네 아버지 덕이니 늘 감사하게 생각해. 알겠니?”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들에게 한차례 퍼부은 후, 포드 부인은 매짐이 떠 온 물을 화롯가로 옮기며 카르낙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아내는 걱정 말아. 이래 봬도 유산에 대해서는 웬만한 산파보다 더 지식이 많으니까. 자네를 이곳으로 이끈 것도 다 아마네스 여신님의 뜻이야. 유산만 네 번 한 여자를 이 깊은 숲에서 찾은 것 말이야. 그러니 자네 부인은 살 거야. 그게 여신님의 뜻일 테니 감사히 여겨.”

카르낙은 조금 말미를 두고 답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이것도 인연인 모양인지 마침 저녁거리가 좀 남아 있다우. 매짐, 손님에게 스튜와 빵을 내드려라.”

포드 부인은 미지근하게 데워진 물에 천을 적시며 아들에게 말했다. 매짐은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고 카르낙을 부엌으로 안내했다.

“따라오세요, 이스바 경.”

카르낙은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곁에 있고 싶었지만 현재 느껴지는 포드 부인의 성격을 생각하자면 나가라고 할 때 조용히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매짐은 좁은 부엌, 소박하기 그지없는 나무 탁자 위에 딱딱한 빵과 보리 맥주부터 내려놓았다.

“스튜는 조금 데워야 하니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매짐은 바지런히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나무 주걱으로 솥을 저었다. 카르낙은 보리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비로소 눈을 들어 집안의 곳곳을 살펴보았다. 낡은 부엌살림들이 부엌의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렇다 할 장식품은 없었지만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골동품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그가 겪어 온 바에 따르면 포드의 집은 서민들 중에선 제법 부유한 편에 속했다. 작은 마을에 고작해야 농기구나 만질 만한 대장장이라고 하기엔 조금 의아한 감이 있었다.

“부인 걱정은 마세요, 이스바 경. 마을의 여자들은 종종 이 문제로 어머님을 찾고는 하거든요. 물론 마을에 산파는 있지만… 순산하지 못한 경우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뭐랄까, 아이를 받는 산파라기보단… 산모를 보살피는… 일종의 대모 같은 거랄까?”

포드 부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필 이 이름 모를 산골 마을을 발견한 것은 정말 아마네스 여신의 가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참이라면 파니릴리는 필시 좋아질 것이다. 헛되다 하여도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포드 부인은 얼마를 받으십니까? 산모를 돌봐 준 대가로.”

매짐은 우묵한 쇠 그릇에 스튜를 가득 담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받지 않으세요.”

“단 한 푼도?”

“네. 단 한 푼도요. 어머니는 돈보다 명예가 더 값진 것이래요. 당신이 마을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포드가를 기꺼이 제 식구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시더군요. 전 거기에 동의하지 않지만 아버지께서는 투로인 자신이 이만큼 살게 된 것은 다 어머니 덕이래요. 늘 감사해야 한다고요.”

가장이 된 투로라. 이미 장성한 자식까지 있다는 것은 카르낙이 엘버그를 정복하기 훨씬 이전에 자신의 직업과 가정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카르낙,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을 하여 대장장이가 된 것인지도 몰랐다.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벌레보다 더 죽이기 쉬운 것이 투로이지 않았던가.

때마침 길란이 아내의 부탁으로 숯과 잘게 조갠 나무 장작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카르낙은 집요한 시선으로 그의 외형을 살폈다.

희끗희끗한 머리. 검은 머리보다 하얗게 센 머리가 더 많아 그것으로는 식별이 잘 가지 않았다. 거뭇한 피부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쇠를 다루는 모든 이들은 그처럼 그을은 피부를 지니게 된다.

길란은 바지런한 걸음걸이로 침실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빈손으로 나왔다. 자투리 천을 덧대어 만든 리넨 모자를 벗고, 얕은 대접에 물을 받아 손을 씻는 그의 얼굴이 아궁이 불에 훨씬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셨네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투로들 중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이는 드물다. 적어도 카르낙이 겪어 온 바에 의하면 단 한 명도 없었다. 로로조차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이는 카르낙 발투만이 처음이라 하였다. 그는 그 눈동자를 네가 특별하다는 증거라고 말하고는 했다.

“…….”

길란은 고개를 돌려 카르낙을 주시했다. 등이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센 전형적인 노인의 외형이었지만 길란은 키가 크고 뼈대가 굵었다. 모든 투로들이 그러하듯 넓고 단단한 어깨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질긴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쇠붙이를 만지며 살아온 탓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굵고 단단한 팔뚝은 또 어떠한가. 살피고 나니 그는 영락없는 투로였다. 투로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고루 갖춘.

그는 카르낙을 보며 말했다.

“요새 부유한 귀족들 사이에서 투로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 유행한다더군. 발투만 왕의 흉내라도 내는 모양이지. 참으로 음침한 사람들이야.”

이곳에 오기 전 잘라 버린 카르낙의 짧은 머리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꽤 비싼 값을 받는다 들었네. 제 머리카락을 잘라 내어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여전히 세상은 투로에게 박한가? 이 깊은 숲에도 투로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은 진작에 전해졌는데 말이야.”

“어르신께서는 진작 가정을 꾸리셨네요. 투로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라 여겼습니다만.”

“자네는 혼인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아직 1년이 되지 못했습니다.”

“난 올해로 20년째야.”

“어디서 나셨습니까? 서쪽의 사막에서 오셨습니까?”

길란은 보리 맥주를 한 잔 담아 카르낙의 맞은편에 앉았다.

“난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잘 몰라…. 다만 젖먹이 시절 어떤 여인에 의해 이 외진 마을에 버려진 것만 알지.”

검은 머리의 아이는, 특히 사내아이는 사막에 가져다 버리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지 이런 외진 곳에 버려두지 않는다. 아이를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면.

“다만, 나를 이곳에 데려온 여인은 새하얀 피부에 금발 머리를 지녔다더군. 그분이 내 모친이었나, 가끔 생각하기도 하지. 어쨌든 검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아이는 모친에게는 치부였을 테니 버리지 않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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