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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37화 (137/231)

137화

뒤늦게 도착한 핀이 헐레벌떡 막사 안으로 들어서서 릴리를 보더니 넋이 나가 신음했다.

“세상에, 신이시여.”

카르낙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내에게 향하는 걸음은 결혼식 날보다 더 연약하고 무거웠으며, 더없이 심장이 떨렸다. 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였건만, 이제야 비로소 제 아내에게 다가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릴리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 가득 그가 담겨 있었다. 단 한 조각도 빠짐없이 모두. 그래서 카르낙은 무너졌다.

“…칼.”

릴리가 희미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뱉어 내자 카르낙은 와르르 그녀의 가슴으로 무너졌다. 무릎을 꿇고 둥둥, 가늘고 여리게 맥동하는 그녀의 심장 가까이 얼굴을 묻고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그녀의 상체에 퍼졌다.

바르르 어깨를 떨며 그는 간간이 울음소리를 뱉어 냈다, 구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릴리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여 주고 싶었다. 또한 대체 어디에 있었느냐 따져 묻고도 싶었다.

나는 내내 당신을 찾았노라고, 두려움에 질려 당신의 이름만 불러 댔다고. 겁에 질렸을 때 당신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노라고. 그러나 무리였다. 힘이 없어 소리를 내지도, 손을 올릴 수도 없었다. 그저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남편의 무게에 깊은 안도감을 느낄 뿐이었다.

그동안 리쿠스는 조용히 침실에서 물러났다. 다른 시녀와 보조들도 마찬가지였다. 핀만이 휘장을 내리고 카르낙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모습을 잠잠히 바라보고 있다가 아주 천천히 릴리에게 다가갔다. 그리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서서 그는 느리게 말했다.

“왕비 전하.”

릴리가 살며시 눈을 들었다. 붉은 머리의 건장한 청년이 희미하게 망막에 맺혔다. 그녀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핀.”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늘 배짱 좋던 이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묻는 것이 우스워 릴리는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듯 핀도 따라 웃으며 제 근처에 있는 과일 바구니를 그녀의 침상 가까이에 놓아 주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습니다.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전하.”

“…고마워요.”

“그럼 저는 리쿠스에게 가 보죠. 한 손이라도 더 필요할 테니까요. 필요한 게 있다면 폐하께 시키시면 될 겁니다.”

그러면서 핀은 주책맞게 울고 있는 카르낙의 등짝을 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쉬십시오.”

핀이 막사를 나가자 카르낙이 크게 호흡하며 몸을 들었다. 머리카락이며 얼굴이 죄 엉망이었다. 손을 들어 그것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

카르낙은 머리를 쓸고 얼굴을 닦으며 진정한 뒤 핀이 놓고 간 바구니에서 작은 열매 하나를 들어 그녀의 입술에 물려 주었다. 입가가 마를 때마다 입술을 축여 주고, 식도가 마르지 않게 물과 약을 먹였건만 여전히 입술이 거칠었다.

“씹을 수 있겠어?”

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혀를 굴려 천천히 과일의 식감에 골몰했다. 턱을 느리게 움직였다. 열매가 짓이겨지며 과즙이 새어 나왔다. 새콤한 맛 다음에는 달콤한 맛이 났다. 산딸기인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더 먹을래?”

카르낙이 열매 하나를 더 들며 물었다. 릴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물을 줄까?”

“칼.”

“응.”

“…얼마나….”

목소리가 자꾸 갈라졌다. 꿀꺽, 침을 삼키는데 식도가 버석했다.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예요?”

“열흘.”

열흘?

“열흘 정도 되었어.”

“…….”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오랫동안 그 허상의 공간에서 허우적거렸단 말인가. 릴리는 기억을 헤집어 언제 어떻게 정신을 잃은 것인지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손발이 묶인 채 카르낙의 품에 갇혀 잠이 들었다. 그때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그리고 찾아든 무의식 안에서 릴리는 끊임없이 카르낙을 찾았다. 살려 달라고, 도와 달라고 끊임없이 그를 찾으며 외쳤다. 더는 그와 함께할 방법이 없다고 분명 그렇게 답을 내렸는데도.

“우린… 아이를 잃었어.”

“…….”

“내 잘못이야.”

아이? 갑자기 무슨 아이?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말인가? 릴리의 눈동자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미안해, 릴리. 정말 미안해. 다시는, 다시는 널 이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

“네가 정신을 잃었어. 몸은 얼음장같이 차갑고 입술은 파랬어. 식은땀을 흘렸고 축 늘어져서… 꼭… 꼭 죽은 것 같았어. 네가 피를 너무나 많이 흘려서, 그래서 빨리 지혈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 했어.”

“…내가 아이를 배고 있었단 말인가요?”

“너를 지켰어야 했는데… 내가 오히려 너에게 고통을 주었어. 다 내 탓이야. 모두 다 내 탓이야. 나 때문에 아이를 잃었어.”

릴리가 힘겹게 손을 움직여 시트를 움켜쥔 그의 손등을 덮었다. 카르낙의 단단한 손이 곧 깨질 듯 위태롭게 떨고 있었다. 또다시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난 내가 아이를 품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

“나도 몰랐던 임신을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에 찾아온 아이였기에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상실감이 생기지 않았다. 느낄 새도 없이 왔다가 떠나간 아이다. 존재를 온전히 느껴 보지 못한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그 어떤 애틋함도 생기지 않았다.

“그 덕에 네가 죽을 뻔했잖아. 아이도 잃고, 너도 잃을 뻔했어.”

“깨어났잖아요. 결국 출혈도 멈추었고요. 그렇죠?”

“아주 위험했어, 릴리. 넌 정말로 죽을 뻔했다고. 네가 생사를 오가는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라는 걸 해 봤어. 처음으로 간절하게 무엇이라도 기꺼이 줄 테니 제발 널 살려 달라고….”

“꿈속에서 당신 목소리를 들었어요. 칼.”

바닥으로 뚝 떨어져 있던 그의 시선이 조심스레 들렸다. 죄책감과 후회에 짓눌린 고통스러운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구겨진 미간 사이 갈무리 되지 않은 비참함이 사그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것 같아요.”

“…….”

“정말 날 불렀어요?”

“…….”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혹시 널 불렀느냐고?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제발 나를 살려 달라고. 아니 날 죽여 달라고. 날 구원해 달라고. 나를 도와 달라고. 아니 제발 돌아오라고. 수없이 곁에서 네게 속삭이고 빌고 울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으려 했다. 로로도, 핀도, 에이가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를 등지고 널 따라가려 했다. 모두 네가 없어도,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가겠지만 나는 너 없이는 살지 못할 것 같아서.

“날 용서해 줘, 릴리. 내가 네게 주었던 모든 고통들. 내 아둔함을 용서해 줘. 미련한 내 영혼을 부디 용서해 줘. 네가 용서해 줘야만…. 내가,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것이 필요하다면….”

릴리는 잠시 말미를 두었다.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이제 용서했어요.”

그 짧은 순간은 뭘까. 고작 그 몇 초 동안 고민하다 덜컥 용서하겠다는 건가. 허무하여 헛웃음이 터졌다. 뭐가 이렇게 쉽고 가벼울까. 열흘 동안 죽도록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고통스러워하고 그토록 마음을 졸였건만. 아마도 용서했다는 그 말은 아직 제대로 용서받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분명 그러할 것이다.

***

“카르낙!”

리쿠스를 돕겠다며 나갔던 핀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아내의 뺨을 쓰다듬던 카르낙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숨을 헐떡이는 근위대장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오고 있어!”

“그들?”

“그래! 그놈들! 그놈들 말이야! 테르조 가문의 백청색 깃발이야!”

카르낙은 당장 제 아내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출혈이 멈추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데.

“얼마나?”

“몰라. 젠장! 새까매! 징글징글하게 많아!”

핀은 욕을 씹어 뱉으며 카르낙에게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던졌다.

“달아날 채비를 해. 서둘러. 놈들이 당도하면 끝이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듯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난 도망 안 가.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뒷모습을 보인 적 없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순간도 많았으나 언제나 승리를 쟁취하곤 했다. 이런 수적 열세쯤이야. 이제야말로 테이먼 테르조와 제대로 겨룰 때가 왔다고, 드디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생각이 드니 피가 확 끓어올랐다.

테르먼 테이조가 직접 왔을까. 그가 추격자를 붙여 결국 우리를 찾아낸 거다. 구스와 함께 달아난 고프리가 분명 우리의 위치를 짚어 주었을 것이다. 멀루아 땅을 벗어나 쉴 수 있는 곳이라고는 몇 되지 않을 테니.

핀이 툭, 그의 가슴에 활과 화살을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한 낯빛이었다.

“정신 차려! 지금은 상황이 달라! 지금은 전시가 아니고 우린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어! 네가 뒈지면 우리도 전부 다 뒈지는 거야!”

지금껏 그가 수적 열세에 처했을 때는 모두 반란군일 때였다.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고, 카르낙이 죽는다고 해도 용병단의 입장으로서는 크게 나쁠 것이 없었다. 그가 죽고,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자가 없다면 핀은 자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그의 생명 줄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네 왕비를 생각해.”

“…….”

핀의 말에 카르낙은 제 아내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혈색이 돌지 않는 파리한 안색이었다. 릴리를 이곳에 둘 순 없다. 이제야 간신히 깨어난 참이다. 테이먼 테르조가 파니릴리를 어떻게 하려 할까. 알기어스의 마지막 핏줄인 그녀를 설마 죽이려고 할까? 발투만 왕가와 섞이지 않았다면 분명 그녀를 고이 모셨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파니릴리 알기어스는 잠시나마 발투만 왕가의 씨를 뱄던 여자. 과연 이런 릴리를 그가 달가워할까.

“…그녀를 탈출시켜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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