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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36화 (136/231)

136화

파니릴리는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밤새 사랑을 나누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도 어느새 다시 돌아와 보면 침대에서 일어나 무언가에 잔뜩 골몰하고 있었다. 산책을 나가거나 정원을 돌보는 걸 즐겼고, 온갖 종류의 풀을 가져와 리쿠스와 담소를 나누거나 그도 아니면 양피지 가득 무언가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때에는 왕인 자신보다 더 할 일이 많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카르낙은 그녀의 행방을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의를 할 때도 창가를 서성이며 아내의 그림자를 쫓거나 지나가는 시종을 불러 그녀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이 일과였다. 정해진 때가 아니고서야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기도 힘들어 때론 그녀의 체력을 방전시켜 종일 침대에 누워 있게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언제나 그곳에 파니릴리가 있었으면, 그 따듯하고 향기로운 몸을 아주 잠시만이라도 가득 안고 그 내음을 들이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깊은 평화와 안도감을 필요할 때마다 충족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상한 일이지, 리쿠스. 늘 바라 왔건만 이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그녀가 그리워.”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이젠 햇볕을 머금은 그녀의 싱그러운 눈동자가 그립다. 볕 아래 반짝이는 은발과 투명하고 생기 가득한 눈동자가 간절했다.

“왕비 전하께서는 싱그러운 청춘을 지닌 강건한 육체를 타고나셨습니다. 그러니 잘 버텨 주실 겁니다.”

“…왕비를 보내 줄까 한다.”

“어디로 보내려 하십니까?”

카르낙은 하염없이 그녀의 잔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라타.”

“…왕비 전하가 이전에 계셨던 곳으로 말입니까?”

“그래. 바로 거기, 그라타.”

언제나 릴리가 내뱉던 그 억양과 발음으로 그는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그라타.

많은 생각을 했어, 릴리. 네 눈이 빛을 잃고, 네 미소가 시들어 가고, 네 머리카락이 푸석해질 때마다 네가 내 곁에서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노력할 때마다 네가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네가 너무 갖고 싶어 무시했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릴리. 절대로, 절대로, 네가 죽길 바란 것은 아니야. 네가 내 곁에서 죽길 원한 것이 아니야. 내가… 내가 네 곁에서 죽고 싶었을 뿐.

“왕비가 건강을 회복하면 돌려보낼 거야.”

“…….”

리쿠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왕비를 그라타로 보내면, 그럼 카르낙 발투만은? 카르낙이 얼마나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지 모르는 이가 없다. 심지어 파니릴리 왕비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광증과 같은 것이라도 그것이 카르낙이 가진 전부라는 것을.

“어찌 살아가시려고요.”

리쿠스의 말에 카르낙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통과 슬픔이 섞인 비소였다. 유산했다는 사실을 알고 유약하게 떨며 흐느끼던 이 같지 않았다. 상처투성이 위에 철로 만든 투구를 쓴 것만큼 무감한 표정이었다. 지금껏 그랬듯 이 투로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을 것이다. 파니릴리가 사라지고 나면 평생 저 얼굴로 살아갈 남자였다.

“내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릴리를 불행하게 만들 순 없어. 그녀를 갖는 것보다 그녀가 살아 숨 쉬는 게 내겐 더 중요해. 이젠… 이젠 그걸 알아. 알게 됐어.”

파니릴리를, 사랑해 마지않는 아내를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뜨린 대가로 그는 또 다른 사랑의 모양을 알게 되었다. 그걸 알기 위해 아내의 목숨을 담보로 걸었다. 그러니 이젠 되었어. 이제 다신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겠어. 그러니 그녀를 보낼 거다. 더는 그녀를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아주 멀리. 네가 내게 알려 준 사랑이야, 릴리. 나는 마침내 네 품에서 남자가 되었구나.

***

몽롱한 가운데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그녀를 적시며 내리고 또 내려 발목까지 고였다. 하늘은 맑았고, 빗물은 따듯하다 못해 뜨겁다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의 온도보다 훨씬 더 뜨거워 잠시 릴리는 그것이 눈물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였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새파란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물에 반사되는 반짝이는 빛, 그 안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평온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했다. 언뜻 그라타의 풍경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생경하게 느껴졌다.

“칼!”

릴리는 자신의 남편을 찾았다.

“칼!!”

다시 불러 보았으나 공연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릴리는 걸음을 떼 보았다. 물이 찰박거렸다. 치맛단이 흥건히 젖어 무게를 더했다. 지금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방향도 알 수가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똑같은 풍경, 남편은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아니 그 무엇의 실루엣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문득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조금씩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릴리는 불안함에 사방을 돌아보며 제 어깨를 꽉 감싸 안았다.

몸이 덜덜덜 떨렸다.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몸이 차갑게 식었다. 번쩍, 번개가 바닥을 때렸다. 잠시 후 쾅! 하는 천둥소리가 났다. 릴리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생 천둥과 번개를 무서워한 적이 없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얕게 찰박거리던 물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돼.”

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물은 차오르고 있는데 달아날 만한 곳이 없었다. 높은 곳으로 가야 하는데, 여기보다 더 높은 곳으로…. 릴리는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기 위해 제가 입은 옷가지들을 모두 벗었다. 그러고는 달렸다. 계속해서 달음박질했다.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목적지가 나올 때까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새 허벅지가 물에 잠겼다.

“칼!!”

두려움에 떨며 남편의 이름을 다시 외쳤다.

“어딨어요! 칼!”

물이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겁에 질려 히익히익, 하고 그녀는 연신 쇳소리를 냈다.

“카….”

어느새 목까지 차올랐다.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그녀는 턱까지 들어 올렸다. 발끝이 더는 바닥에 닫지 않았다. 연거푸 물을 먹었다. 꼬르륵꼬르륵 자꾸만 물 안으로 잠겼다.

“칼!”

단말마의 비명 소리를 내며 릴리는 그대로 물에 잠겼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물을 들이켜지 않기 위해 입을 꽉 닫고 볼을 부풀렸다.

“릴리.”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남편의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사방이 어둠이라 아무것도 식별되지 않았다.

“릴리.”

다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가 없다. 릴리는 어떻게든 헤엄쳐 수면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발을 구르고, 팔을 휘저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을 거야.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칼. 나 여기 있어요. 여기에. 여기. 살려 줘.

살려 줘요…. 칼!!!

그녀가 숨을 뱉어 냈다, 벌어진 입과 코 안으로 끊임없이 액체가 밀려들어 왔다. 절명이었다. 안 돼. 안 돼! 칼!

***

히이이이익!

소리를 내며 릴리는 눈을 떴다. 무언가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뱉어 내야 해. 뱉어 내야 한다.

“쿨럭! 쿨럭!”

왈칵 붉은 액체를 토해 내자 누군가가 다가와 제 뺨을 두드렸다. 작약을 개어 넣은 물약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전하! 전하!”

리쿠스… 분명 리쿠스의 목소리다. 그는 황급히 릴리가 뱉어 낸 것을 닦아 냈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

눈앞이 흐릿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릴리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렸다. 서둘러 시야를 확보하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의 모든 부위가 그랬다. 움직이려 해 봤지만 온몸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만 같았다.

“…칼.”

릴리가 간신히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칼….”

마른 입술 새로 쩍쩍 갈라진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리쿠스는 마음이 급해져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곧 오실 겁니다, 전하! 바로 오실 겁니다!”

카르낙은 제 흑마 오코의 콧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하루에 한 번 오코를 살피는 것은 일과에서 빼놓지 않았다. 핀이 그의 옆에 서서 중얼거렸다.

“벌써 열흘째야.”

“…….”

감히 이제 포기하라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간신히 피는 멎었어. 머지않아 깨어날 거야.”

“…리쿠스는 장담하지 못하던데.”

“…….”

카르낙은 규칙적으로 말의 갈퀴를 더듬었다. 할 말을 찾고 있는 듯 보였다.

“폐하! 폐하!”

멀리서 시녀 하나가 치맛자락을 붙들고 쏜살같이 뛰어왔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다급한지 보는 이 역시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카르낙은 어떠한 기대감이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좌절되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끈질긴 기대감.

왕비 전하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다급한 소식이 몇 번, 그 고비를 넘긴 것도 몇 번, 그럼에도 매번 그녀의 상태가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신의 보살핌을 받아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갑자기 눈뜨진 않을까, 자꾸만 희망을 품었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

시종은 헐떡이는 제 가슴께에 손을 얹고 간신히 뒷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폐하를 찾으십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카르낙은 시종의 전언이 끝나기도 전에 막사를 향해 뛰었다. 핀이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시종이 저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사실이 아니라면 어쩌나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확신할 길이 없다.

막사를 지키는 보초병이 그를 보자 곧바로 휘장을 걷었다. 몇 번이고 그렇게 질긴 천들이 눈앞에서 걷히자 카르낙은 비로소 제 아내가 누운 침상을 볼 수 있었다.

릴리는 리쿠스의 도움으로 몇 겹의 쿠션을 받치고 상체를 조금 일으킨 상태였다. 늘 감겨 있던 눈꺼풀이 힘겹지만 분명, 분명 들려 있었다.

리쿠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희열과 감격에 부푼 치료사의 얼굴이 붉었다. 모든 것이 깜빡거리는 릴리의 눈처럼 느리고도 잠잠하였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맺힌 형상이 없이 공허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저를 주시했다. 몇 번이고 더 느리게 깜빡거리더니 그곳에 이채가 맺혔다. 따듯한 불길이 어른거리는 눈동자는 분명, 분명 릴리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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