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35화 (135/231)

135화

함께 하던 모든 순간들, 너를 안달하던 순간들, 고통을 참지 못해 너를 탓하던 그 모든 순간들… 내가 잘못하였다. 전부 다 내가 잘못했어.

“폐하.”

리쿠스의 목소리에 그는 간신히 정신 줄을 챙기고 표정을 갈무리하였다. 제 아내를 품에서 조심스럽게 떼어 폭신하고 따듯한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몇 겹의 이불을 덮어 준 뒤 하얗게 질린 이마를 매만지며 물었다.

“내 아내는 살 수 있나?”

“우선 출혈을 멈춰야 합니다.”

“그럼 아내는 살 수 있어?”

“출혈이 멈춘 후에….”

“내 아내가.”

카르낙의 목소리에 낮은 힘이 실렸다. 릴리의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리쿠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식도가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살 수 있냐고 물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이상 출혈이 계속되면 죽을 것이다. 혹 피가 멎더라도 다른 질병에 노출되거나 덧나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신께서 파니릴리 발투만의 생을 이쯤에서 거두어 가겠노라 한다면 그것을 누가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리쿠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파니릴리가 좀 더 오래 이 땅 위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오래오래 여기 엘버그 땅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 누구보다 사랑이 넘치고 어진 엘버그의 왕비 곁에 가능한 한 오래 있고 싶었다.

“폐하, 만약 신께서 왕비 전하 대신 제 목숨을 내놓으라 하시면 저는 기꺼이 그것을 내놓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왕비 전하를 치료하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부디 제가 전하를 안정 속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카르낙은 파리한 릴리의 입술을 짚어 보았다.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 있던 입술이 바짝 말라 갈라져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지?”

“먼저 왕비 전하의 출혈을 멈추고 기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니 최소 열흘간의 말미를 주십시오. 좋은 먹을거리와 약초를 찾고, 약을 지을 인력 또한 보충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리오를 향한 이동은 당분간 멈춰 주셔야 합니다.”

파니릴리는 사지가 묶인 채 좁고 딱딱한 마차 안에 갇혀 있었다. 멀루아성을 떠나기 전부터 그녀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계속해 주장하던 바였다. 왕비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진즉 그랬어야 했다.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 이 사달이 났으니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었다.

“좋아. 왕비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이곳에 머문다. 그게 며칠이 되건.”

리쿠스는 왕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는 아내의 뺨에 힘껏 입을 맞추었다. 저의 생명력을 불어넣듯 깊고 간절한 키스였다.

“아내를 부탁해.”

카르낙은 망토를 두르고 머리 위에 모자를 뒤집어썼다. 검은 그림자가 그의 콧대를 뺀 모든 것을 감추었다. 천막 입구에 서서 일련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핀이 걸음을 재촉하는 왕을 따라 막사를 나섰다.

“어쩔 셈이야?”

“병사들을 모아서 리쿠스를 돕게 해. 그의 막사를 당장 다시 지어 주고, 곁에서 도울 시종들도 배치해.”

“카르낙.”

“리오에도 전령을 보내. 각종 귀한 것들, 먹을 것, 입을 것, 덮을 것 뭐라도 좋으니 파니릴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가져오게 해.”

“카르낙!”

핀이 앞을 가로막고 그의 가슴팍을 밀어 저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말 따윈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 같았다.

“잊었어? 고프리가 어린 코르넬리오와 같이 달아났어. 만일 멀루아 일을 빌미로 테이먼 테르조가 나선다면 우린 꼬리 밟힌 짐승 신세가 된다고.”

“아직 몰라. 고프리가 과연 그 어린놈을 데리고 무사히 테르조 진영에 합류했는지. 어쩌면 가다 뒈졌을지도 모르잖아.”

어처구니없다는 듯 핀은 양손으로 제 머리를 긁어 댔다.

“농담해? 네 아내가 놈들에게 멀루아 병사 몇까지 같이 도주시켰잖아. 게다가 그들은 어디에라도 숨기 쉬운 인원이지만 우린 어딜 가든 눈에 띈다고.”

“여기서 움직일 수 없어.”

“카르낙. 우린 이동해야 해. 까딱하다 다 뒈져. 너도. 나도. 근위병도. 네가 죽으면 발투만 왕족은 없어져. 테이먼 테르조의 가슴팍에 왕관을 떠밀어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니까?”

“핀.”

카르낙이 한숨 쉬듯 그를 부르고는 몇 차례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했다.

“릴리는 아이를 잃었어.”

“…그 일에 대해선 나도 몹시 마음이 아파.”

핀의 표정이 더없이 침울하고 복잡해졌다. 아이를 잃은 파니릴리도, 자식도 모자라 혹여 파니릴리도 잃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카르낙도 가엽다 생각한다.

그러나 핀은 냉정해져야만 했다. 아이는 다시 가지면 된다. 카르낙이라면 충분히 다시 여인의 배를 부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니릴리가 아니라면 다른 여인이라도. 그러나 카르낙은 대체할 수가 없다. 이대로 아이도 잃고 파니릴리도 잃고 거기에 왕까지 잃는다면 그야말로 전멸, 발투만 왕조는 그렇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넌 곧 엘버그 그 자체야, 카르낙 발투만.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는 없어. 그것도 뻔히 보이는 위험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면서 말이야.”

“의미 없어.”

왕은 고개를 저었다.

“릴리가 없다면 이 땅도, 내 지위도, 그 무엇도 의미 없어.”

“넌 투로의 왕이잖아.“

분노에 타오르던 소년, 그가 가졌던 그 뜨겁고 찬란한 불꽃이 사그라들까 핀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파니릴리라는 사람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릴리라는 얼음이 그를 완전히 꺼뜨려 버릴까 늘 두려웠다. 카르낙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길수록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조마조마하였다.

“지금은 아니야, 핀.”

투로는 여전히 그의 사랑하는 형제들이고, 그 나머지의 것들, 엘버그의 신과 그 가호 아래 살아가는 모든 것을 여전히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중요한 것이 생겼다.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이.

“지금의 내겐 내 아내가 전부야.”

아내. 자연의 법칙대로라면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반쪽의 것, 엘버그의 사내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으나 투로에겐 감히 꿈꿀 수 없는 것. 그렇기에 자신에게는 더욱 소중한 것. 릴리가 아니라면 누구도 나를 그토록 사람답게, 사내답게, 남편답게 대해 주지 않겠지. 아무도 그녀가 내게 주는 만큼의 것들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난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겠어. 릴리가 괜찮아질 때까지.”

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덜떨어진 철부지 새끼.

“원한다면 떠나, 핀.”

카르낙이 덧붙인 한마디가 기어코 그의 입에서 욕이 나오게 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미친 새끼야?”

왕이고 나발이고 이걸 죽일까 어쩔까, 까득까득 이를 갈고 있는데 그 면전에 대고 카르낙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뭐라 해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저 오만한 행동이 정말 짜증이 난다. 진짜 이 새끼만 눈앞에서 치워 버리면 남은 인생이 편안할 것 같다.

보질 말아야지. 안 봐야 화가 안 나지. 아예 이놈을 만나질 말았어야 했다. 모르면 내버려 두기라도 하지. 눈에 걸리적거리고, 치우자니 불안하고…. 이건 뭐 어린애도 아니고 제 자식새끼도 아닌데 왜 맨날 이렇게 조마조마하게 살아야 하나.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카르낙 발투만이 저보다 먼저 뒈져 버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 순간까지 두 다리로 멀쩡히 서서 칼을 휘두르는 전사 카르낙 발투만의 불꽃을 바라보며 죽고 싶었다. 이 새끼는 나 없어도 승리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품고 뒈지면 영면인지 뭔지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르낙은 말안장 위에 앉아 고삐를 잡았다. 그러고는 제법 오만한 낯으로 핀을 내려다보았다.

“멧돼지를 좀 잡아 올까 하는데.”

잡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개새끼야. 가다가 콱 멧돼지한테 당해서 허리나 두 동강 나 버려라. 구시렁대면서도 핀은 뒤이어 병사가 가지고 나온 자신의 말 위에 앉았다.

“활과 창을 가져와!”

“네! 대장님!”

핀은 병사가 건넨 무기를 안장 위에 얹고 카르낙을 따라 말의 옆구리를 힘껏 찼다. 내가 죽어야 이 꼴을 안 보지. 어휴.

***

정오가 다 되어 갈 무렵 사냥을 나갔던 카르낙과 핀이 멧돼지와 어린 수사슴을 잡아 왔다. 멧돼지는 곧바로 주방용 막사로 들어갔으나 어린 수사슴은 리쿠스의 손을 거쳤다. 그는 절각된 사슴의 뿔을 태워 털을 제거한 뒤 보조를 시켜 그것을 얇게 썰도록 하였다. 때에 맞추어 반드시 깨끗한 광천수를 길어 오라 심부름시켰던 시종들도 막사로 돌아왔다.

커다란 솥에 깨끗한 물을 붓고, 수사슴의 뿔과 그와 잘 맞는 몇 가지의 약재를 더 더한 뒤 불을 지폈다. 반드시 잘 지켜보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보조에게 당부해 두고, 리쿠스는 다시 향도 좋고 몸에도 좋은 과실과 약재를 짓이겨 만든 물약을 깨끗이 소독한 유리병에 넣어 왕의 막사로 들어갔다.

어느새 몸을 정제한 카르낙이 릴리의 하얗고 마른 손을 붙잡고 있었다. 리쿠스는 그를 목도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

“쉬.”

카르낙이 릴리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집게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아직 정신을 되찾지 못한 아내가 오랜만의 긴 휴식을 방해받을까 조심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리쿠스는 숨을 죽였다. 잠시 후 카르낙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제야 비로소 리쿠스는 릴리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왕비 전하께 드릴 약재를 조금 가지고 왔습니다.”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쿠스는 천천히 유리병을 열고 깨끗하게 소독한 티스푼으로 붉은 액체를 떴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레 릴리의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다.

리쿠스가 질 좋은 리넨 천 뭉치로 그녀의 입가를 톡톡 닦아 내자 카르낙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릴리가 이렇게 오래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본 적이 없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