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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31화 (131/231)

131화

카르낙은 제 아내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 곧장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릴리의 상태를 살펴보러 침실에 들어섰을 때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리쿠스는 왕비가 시종과 보초병 몇을 데리고 밤 산책을 다녀오겠노라 하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라 하였다.

영악하기 그지없는 여자. 불쏘시개를 들고서 이제나저제나 저를 찌를 궁리만 하는 여자. 카르낙은 칼을 꺼내 들고 방을 뛰쳐나왔다. 불을 밝히라는 명에 근위병들 모두 횃불을 들고 그를 따라나섰다. 왕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왕비를 찾으라 명령한 후에 그가 곧장 향한 곳은 바로 이 지하 감옥이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설마.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두려움이 그를 어두운 밑바닥으로 이끌었고 끝내는 보아야만 했다.

무방비하게 열린 철문들. 달아난 죄수들. 그뿐만 아니라 그를 따랐을 간수와 릴리의 담당 시녀들까지. 분노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떨렸다.

거윈은 곡예단의 마지막 남은 짐승처럼 철창에 갇혀 자신의 왕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짓씹고서 분노를 참지 못해 몸을 덜덜 떠는 잔인하고도 처연한 왕을.

“…거윈.”

횃불에 잘 벼린 칼끝이 발광하였다. 불빛이 일렁일 때마다 왕이 분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예, 폐하.”

“네 죽음을 선택해. 불에 타 죽을지 아니면 지금, 내 칼끝에 죽을지.”

왕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거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답은 그것으로 충분한 듯 보였다. 근위병에 의해 철문이 열리고 왕은 좁고 냄새나는 감옥에 들어섰다.

둘에겐 익숙한 곳이었다. 지독한 악취와 어둠이 때론 그립기도 했다. 또 지금처럼 반가울 때도 있었다. 카르낙 발투만. 내 젊음과 열정과 패기를 모두 너에게 주었지. 그 덕에 너무나 높은 곳까지 와 버렸다.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넘어서서 감당하지 못할 것들에 오히려 더 울적해지던 때도 종종 있었다.

화마 같던 남자. 은빛 여신의 땅에 떨어진 불덩어리 같은 사막의 투로. 어쩌면 우리는 본디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 빛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임을 잊고 너무 멀리까지 와 버린 건 아닐까 두려움에 질식되어 버릴 듯한 밤이 몇 번인지. 네 덕에, 어쩌면 네 탓에. 난 너무도 빨리 늙고 지쳐 버렸어.

푹, 하고 카르낙의 검이 거윈의 평평한 가죽 갑옷을 뚫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것이 살을 찢고 파고드는 선득한 느낌에 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웁, 하며 볼을 부풀리더니 거윈은 곧 입 안에서 피를 게워 냈다. 그는 피에 젖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아 드디어. 네가 보인다. 이 작고 어리석은 꼬마 놈아. 비웃듯, 혹은 농을 하듯 그는 왕을 올려다보며 입을 뻥긋거렸다.

“이 빌어먹을 투로 자식.”

카르낙이 그의 복부를 관통한 칼을 빼내자 영혼이 사그라진 거윈의 몸뚱어리가 왕의 품으로 쓰러졌다. 어깨에 턱, 거윈의 거뭇한 하관이 부딪히더니 주르륵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뜨끈한 핏물이 바닥으로 번지며 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카르낙은 거윈의 무게와 온기가 완전히 저에게서 떨어져 나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씨근거렸다. 벽으로 고정된 시선은 장님의 것과 같았다. 보고 있으나 무엇도 담지 않은 듯한 눈동자가 한참 동안 허공에서 흔들렸다. 면부에 균열이 가기 전, 그는 제 어금니를 씹으며 비좁은 철창 안에서 빠져나왔다.

“놈들을 쫒아. 아직 멀리 달아나진 못했을 거다.”

“예.”

카르낙이 다시 계단 위로 올랐을 때 릴리는 그의 칼에 흐르는 핏물을 먼저 발견하였다. 비린내와 함께 열기가 피어오르고 아직 식지 않은 피가 뚝뚝,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기어이. 기어이 거윈을 죽였다. 기어이. 그토록 충성스러운 자신의 심복을. 남편을 향해 눈을 부라리기도 전에 카르낙이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어 댔다.

“왜 그랬어! 왜! 왜!”

내지르는 고함은 목젖을 쥐어짜는 듯 괴로운 소리였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은 붉기보다 연한 보랏빛을 띠었다. 살기 어린 보라색 눈동자에 언뜻 처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 거윈을 죽여서? 제 손으로 그를 죽여 묻어나는 슬픔일까. 아니면 자신이 그를 배신하여 이런 눈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이 나 눈물이라도 나는 것일까.

“내가 미쳐 날뛰는 걸 보고 싶었어!? 기어이 네 아비처럼 모두 다 베어 내길 원했어!? 내 손에 기어이 네 피를 묻히는 걸 보고 싶었어!?!?”

어깨를 흔드는 악력이 너무 세어 어깨뼈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카르낙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아내의 가느다란 목을 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상아색 새틴 신발을 신은 발끝이 조금씩 들렸다.

카르낙은 어금니를 사리물고 말을 이었다. 이성을 잃은 그의 이마와 관자놀이에는 핏대가 불거져 있었다.

“좋아. 그럼 누구부터 죽여 줄까? 너를 위해 봉사하던 멀루아의 시종 계집들부터 시작할까? 아니면 리쿠스? 그놈부터 사지를 갈라 줄까? 그게 아니면 누가 좋겠어!? 네가 사랑해 마지않던 에이가? 캘던성에 남아 있는 세일린과 그 계집의 친구까지 모두 다 죽여 성벽에 걸어 줄까? 울퍼처럼?”

예상하지 못한 바가 아니다. 거윈을 뺀 모든 이를 고프리의 편에 보낸 이유도, 리쿠스를 기어이 방에 두고 온 이유도 전부 같았다. 카르낙은 이 일에 관련된 모두를 그 자리에서 도륙할 것이 뻔했다. 눈에 보이는 모두를 죽일 것이 자명했다. 감옥 안에 남은 것이 거윈 하나가 아니었다면 그의 칼에는 더 많은 피가 묻어 있었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그다음 날.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 어차피 모두가 죽어야 한다면 살아 있는 한 한 명이라도 더 살려 보낼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날 죽여요, 칼.”

“입 닥쳐.”

손아귀에 더욱 힘이 실렸다.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이 점점 더 붉게 변했다. 아아. 아름다운 릴리. 나의 작은 새. 조금이라도 더 힘을 주면 이 가늘고 아름다운 목을 꺾어 버릴 수 있겠지. 그럼 나는 온전히 너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나는 영영 너를 잃게 될까.

“날 죽이면 모든 것이… 깨끗해져요.”

“입 닥쳐!”

하지만 넌 알지, 릴리. 넌 알아. 내가 널 결코 죽일 수 없다는 걸. 내가 어떻게 널 죽이겠어. 네 살아 숨 쉬는 숨결이, 반짝이는 네 눈동자가, 달콤한 숨을 내뱉는 그 장밋빛 입술이 내가 가진 전부인데. 네 생명이, 네 미소가, 네 웃음이, 네 눈물이, 너의 고통이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데.

나를 향한 너의 분노도 내겐 사랑이고, 너를 향한 나의 분노도 결국엔 내게 사랑인 것을.

그러니 릴리 이 순간에도. 이토록 너를 죽이고 싶은 이 순간에도 나는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그렇게 간단히 널 죽일 순 없어. 이렇게 간단하게 너를 내게서 해방시켜 줄 순 없지.”

“…칼.”

릴리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구슬픈 목소리. 바르르, 카르낙의 손끝이 그것에 경련하였다. 단 한마디의 음절에도 이토록 쉽게. 그는 오기로 제 입술을 사리물고 목덜미를 더 세게 그러쥐었다.

“입 닥쳐, 릴리.”

“…….”

“단 한마디도 하지 마. 단 한마디도. 그 입술을 틀어막아 버리기 전에.”

“…….”

“핀.”

카르낙이 그의 근위대장을 불렀다. 위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느새 그곳에 와 있었던 건지 이미 무장도 마친 상태였다. 어쩌면 한 번도 풀지 않고 있었던 걸까.

“왕비를 포박해 마차에 실어라.”

칼이 손을 풀자 릴리가 스르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녀의 목덜미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였다. 내일이면 그것은 시퍼런 피멍으로 변하리라.

카르낙은 한 발짝 물러서 피 묻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영지에 불을 질러. 단 한 곳도 빠짐없이 전부. 우린 곧바로 리오로 향한다.”

“네.”

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

까만 밤에도 그곳은 대낮처럼 밝았다. 석양이 지는 것처럼 멀루아는 붉게 빛을 내고 있었다. 아침을 맞이할 때쯤이면 그곳은 잿더미가 되어 있을까. 사방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던 영지민들은 모두 그을음이 되어 바람에 날고 있을까.

구스를 풀어 주는 것이, 예정에는 없었지만 고프리 또한 풀어 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릴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왕에 대한 반역이었다. 죽음으로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하여 그 자식의 자식까지 씨를 말린다는 중죄.

남편의 무자비함 역시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한 일이었다. 설령 목숨을 부지한다 하더라도 사지가 멀쩡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 몰골은 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예견한 바였다. 고작 제 몸을 포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으로 죄에 대한 값을 다 치렀노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릴리는 마차에 꼼짝없이 앉아 서서히 멀어지는 멀루아의 붉은빛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영지민의 비명이 칼날처럼 고막을 찔렀다. 고통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악몽이라면 좋겠다 생각하였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때로 되돌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염없이 그것만을 바랐다.

그렇게 새까만 밤 멀루아를 떠나 동이 트고 다시 그것이 질 때까지 카르낙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 계속되던 긴장감과 그것을 풀 여력도 없이 지속되는 이동에 행렬이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보다 못해 핀은 말 허리를 차 선두에 선 왕을 따라잡았다.

“국왕 폐하. 사람들이 조금씩 지쳐 가고 있습니다.”

“놈들이 살 만해졌군그래. 벌써 지치다니.”

핀이 조금 더 말 머리를 그쪽으로 붙였다.

“파니릴리 왕비 전하를 위해 꾸려 온 짐과 식솔을 그새 잊으셨습니까? 그들은 한 번도 이토록 길고 험한 여행을 해 본 적이 없는 성의 시종들입니다.”

“…….”

“게다가 왕비 전하께서는 마차 안에 갇혀 이틀째 물도 먹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대로 갇혀 죽일 심산이 아니거든 이만 야영지를 차리시지요. 마침 은신하기 좋은 산세에 들어선 듯 하니 이쯤에서 잠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못 하시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젠장. 카르낙은 저 혼자 욕설을 짓씹었다.

“아내를 말려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멈추시지 그래요.”

“좋아. 그러지.”

마지못해 카르낙이 고삐를 당겼다. 말이 머리를 돌리며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핀은 왕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쐐기를 박으려는지 곧장 소리쳤다.

“오늘! 이곳에서 밤을 보낸 후, 내일 동이 틀 무렵 다시 출발한다! 밤을 보낼 준비를 하라!”

기다렸다는 듯 근위병들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쳤다. ‘말뚝을 박아!’, ‘음식 재료부터 내려라!’, ‘불을 피워!’, ‘천막을 가져와라!’. 멀루아 땅을 떠나 내내 고요하던 이들이 처음으로 생기가 넘쳤다. 파니릴리가 타고 있는 마차의 주변만 빼고 말이다.

카르낙이 마차를 주시하다 말에서 내리자 핀이 무심하게 무언가를 그의 앞에 휙 내밀었다. 핀이 건넨 비단 주머니는 매우 가벼웠으며 그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핀은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지난밤, 캘던성에서 왕비 전하께 온 물건이야. 별다른 서신은 없었어. 건네드리면 알 것이라고만 전했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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