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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30화 (130/231)

130화

구스의 눈가에 잘게 주름이 졌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헛소리라 여기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 못 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여길 떠나요. 어디라도 좋아요. 여비라면 내가 마련해 줄 수 있어요. 왕의 광기에 당신들마저 희생시킬 순 없어요.”

“난 카르낙 발투만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왕비 전하, 그분이 죽으라면 저는 죽을 겁니다. 그분의 뜻이라면요.”

“이렇게는 아니에요. 거윈! 이런 식으로는 아니라고요!”

거윈은 고개를 저으며 어둠속 더 깊이 몸을 묻었다.

“그럼 구스는요!? 당신이 책임지기로 한 저 어린아이는요? 아무 잘못도 없는 저 아이는 어떻게 하란 거죠?”

아주 미약한 흔들림, 그 후 거윈은 같은 얼굴로 돌아갔다. 주인을 닮아 질긴 고집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닳는 법이 없었다.

“이건 내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에요. 하지만 다만 누구라도, 다만 단 한 사람이라도 구하고 싶어서 그래요.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코르넬리오 부인이 살아 있습니다.”

이야기 중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절박하여 버벅거리고 떨리는 소리였다. 릴리는 음성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고프리의 방이었다. 사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철창에 딱 붙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왕비 전하, 제 오랜, 오랜 친구 모렌베어가 오랫동안, 오랫동안 코르넬리오 가문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에게, 그에게 아직 끈이 있어요. 제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저 간사한 놈의 세 치 혀를 믿지 마십시오.”

거윈이 첨언하였다. 그가 누구인가. 멀루아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영주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눈도 가리고 귀도 가리고 코도 가려서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한 채 제 맘대로 이 땅을 주물러 온 뱀보다도 간교한 자다. 누구보다 죄가 많은 이니 이 땅에서 누군가 죽어 나자빠져야 한다면 바로 저자가 영순위였다.

“당신이 한 말 다 들었습니다! 거윈 경! 당신이 그랬지요! 살기 위해 누구나 죄를 지어야 한다고!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살기 위해 죄를 지었을 뿐이오!”

거윈은 푸,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군인에겐 딱 두 가지 규칙만 있다오. 그는 믿을 수 있는 자인가, 없는 자인가, 당신은 절대로 믿지 못하는 자에 속하지, 얼간이 양반.”

고프리는 조금 더 철창에 가까이 붙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좋아.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보여 주지.

“이봐. 거윈 경. 내가 간악할지언정 난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난 이미 다 알고 있지. 카르낙 발투만에 의해 군인들에게 윤간당한 코르넬리오 부인이 어떻게 됐는지 말이야! 그녀는 살아 있어! 심지어 제 아들의 손에 배가 뚫렸는데도 살아남았다고! 그래! 거윈 경! 당신이 구스의 손에 칼을 쥐여 주었지! 그게 당신이 한 짓이잖아!”

“…….”

릴리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개 바랬다.

“뭐…”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확인하는 그녀의 입술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

“전쟁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거윈이 차분한 목소리로 얼렀지만 곧바로 고프리의 히스테릭한 음성에 먹혔다.

“카르낙 발투만, 그자가 전장에서 남편을 잃고 협상을 하러 온 코르넬리오 부인을 군인들에게 창녀로 던져 주었지! 그 후 전라의 여자를 말에 매단 채 모웨나 영지에 입성했어! 모든 영지민이 제 영주의 잘린 목과 군인들의 오물을 뒤집어쓴 그 부인을 볼 수 있게 말이야!”

‘으… 으… 으.’ 하고 구스가 괴로운 신음을 하였다. 발작적으로 떠는 아이를 시종이 꼭 껴안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어린 장자에게 제 아버지의 머리 위에 오줌을 누고 제 어미의 배에 구멍을 내라 하였지! 그래야만 목숨을 살려 준다면서!”

“…….”

릴리는 절실한 구원의 뜻을 담아 거윈을 보았다. 분명 되는대로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리라. 카르낙이 도살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잔인하고 비정한 폭군이라는 것도. 자비가 없는 자라는 것도. 사람들이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벌벌 떤다는 사실도. 하지만 거윈. 고프리의 입에서 나오는 저 사내는 누구인가요. 나는 알지 못하는 자예요. 나는….

카르낙 발투만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가족을 죽였다며 투로를 데려온 귀족을 가차 없이 두 동강 내었던 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로의 목숨을 빼앗으려던 투로의 결투에 눈을 빛내며 흥분했던 때. 하게너 영지 근처 숲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산적들의 머리를 가져왔던 때.

모르겠어. 카르낙 발투만은 누구지? 함께 살을 섞고 함께 웃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하다 쓰다듬어 주던 남자는 누구지? 기쁘게 해 주려 노력했다가 수가 틀리면 광인으로 변하던 남자. 늘 벽에 부딪혀 그 너머를 볼 수 없던 남자.

이게 당신이었을까, 칼. 그 벽 너머에 숨긴 당신의 본모습은. 자꾸만 뒷걸음질 쳐 도망가고 날 가두고 부수고 죄려 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제 아들의 손에 배를 뚫리고도 그 여자는 기어이 살아남아 아비에게 돌아갔다더군. 바로 테이먼 테르조의 곁으로 말이야! 왕비 전하!”

고프리가 저를 부르자 릴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테이먼 테르조는 왕비 전하와 피가 이어진 사촌지간입니다. 부디 미친 왕 카르낙 발투만의 곁을 떠나 그분의 곁으로 가십시오! 제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모렌베어가 그곳을 압니다. 그는 저의 충직한 심복으로 전하와 구스, 아니 바시리 님을 모실 빠르고 튼튼한 말 두 필을 준비해 줄 겁니다. 필요한 돈과 음식도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부디 함께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미친 왕 카르낙 발투만. 미친 왕 알기어스. 미친 왕.

미친 왕.

“…….”

거윈은 마치 생명력을 잃어 그대로 규화목이라도 된 듯한 릴리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카르낙은 제 아내를 끔찍이 여긴다. 그것은 지근거리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할까. 더불어 그녀가 자신에게서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카르낙은. 그 어리석고 멍청한 사내는.

“당신이 떠나면 카르낙 발투만은 멸망할 겁니다.”

“…….”

“발투만 왕가도, 엘버그 왕국도, 그와 당신의 편에 섰던 모든 사람들도.”

에이가. 온화한 로로. 리쿠스. 스코크. 허물없이 대해주던 스텐, 언제나 그리운 세일린

마침내 릴리가 간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왕비의 명령을 기다렸다.

“저자를 풀어 주세요.”

“예, 전하.”

간수가 민첩한 동작으로 고프리가 갇힌 철창의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릴리는 서둘러 뒤로 돌아 구스를 껴안은 시종에게로 갔다. 제 손에 낀 반지와 목걸이, 허리에 차고 있었던 돈주머니를 건네며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 말 잘 들어요. 지금부터 고프리를 따라 이 성에서 나가요. 당신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보초병을 올려다보며 똑같이 말했다.

“함께 달아나요. 목적지가 나올 때까지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할 거예요. 아이를 잘 지켜 주세요. 엄마를 만날 때까지.”

“구스.”

릴리는 덜덜 떨며 우는 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이의 안색이 파리했다. 아이는 흐느끼며 릴리의 손을 잡았다.

“어… 어… 어머니를… 제가 어머니를….”

“괜찮아. 어머니는 너를 두 손 벌려 맞이해 주실 거야. 너를 품에 안고 잘 돌아왔다고 기뻐해 주실 거야. 세상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사랑은 엄마가 아이에게 주는 것뿐이란다.”

구스는 모웨나의 영주다. 설령 그 어미가 자식을 사랑으로 맞이해 주지 않는다 하여도 대를 잇는 적통과 지위 때문에 그를 지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아. 구스. 그들은 널 돌볼 거야.

“구스, 약속해 줘. 언젠가 네가 지금보다 큰 사람이 되면… 그때 꼭 나를 기억해 줘. 나, 파니릴리 발투만을 꼭 기억해 줘. 알겠지?”

그래서… 그래서 꼭 카르낙 발투만을 용서해 줘. 그가 너에게 저질렀던 짓들을, 전쟁으로 야기된 추악한 죄들을 부디, 부디 용서해 줘. 언젠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줘. 그에게 기회를 줘.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줘. 그것이 기약 없이 먼 날이 될지라도. 구스, 꼭이야. 꼭 약속해 줘.

“이제 어쩌실 겁니까.”

텅 빈 지하 감옥 안에서 거원이 물었다. 뚝뚝, 돌벽에 맺힌 습기들이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소리 말고는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것을 고요라 해야 할지 아니면 숨이 멎을 듯한 적막이라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다고. 이제 남은 것은 오롯이 감당해야 할 자신의 몫이라고, 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크게 한숨을 한 번 쉬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목걸이도, 반지도, 브로치도, 그 어떤 장식도 없는 검붉은 장밋빛 드레스를 입은 왕비는 어둠 속에서도 달처럼 빛이 났다.

“글쎄요. 모르겠네요. 당신은 어떤가요?”

“글쎄요.”

그는 어두운 사위를 눈으로 스윽 훑었다.

“해가 뜨길 기다려야겠지요.”

“이럴 줄 알았다면 당신을 위한 선물로 질 좋은 술을 한 병 들고 올 것을 그랬어요. 왕에 대한 당신의 충성심에 경의를 표하는 바예요, 거윈 경.”

“국왕의 뜻을 거스르는 당신의 통 큰 배짱에도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왕비 전하.”

“거윈.”

“예.”

“당신은 당신을 이런 처지로 만든 발투만 왕을 용서할 수 있나요?”

거윈은 잠시 흐릿하게 눈꺼풀을 내린 채 생각에 잠겼다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제가 선택한 운명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용서할 일도, 용서받을 일도 없지요.”

카르낙에게는 과분한 이다. 핀도, 로로도, 에이가도 모두. 그 남자에겐 과분한 사람들이다. 그런 과분한 이들의 마음을 빼앗아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었으니 이 역시 그의 능력이던가.

“아마네스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거윈 경.”

“…신의 가호가 있기를. 파니릴리 발투만 왕비 전하.”

거윈과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릴리는 지하 계단을 올랐다. 간수가 걸어 둔 단 하나의 횃불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머리 위, 달팽이 집같이 꼬여 있는 원형의 계단들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들었다.

이젠 혼자였다. 달빛과 석벽 그리고 자신만이 존재했다. 발을 묶던 족쇄들이 모두 풀려난 것 같았다.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거기에 기대어 눈을 감고 깊게 호흡하였다. 괜찮아. 이젠 혼자야. 책임져야 할 것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야.

우르르르르르,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맑은 하늘 위로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는가 하여 릴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곧 그것이 군인들의 발소리임을 알아차렸다. 그 선두에 일렁이는 검은 머리는 다시 보지 않고도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쏜살같이 내려오는 카르낙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릴리는 치분하고 무감한 얼굴로 남편을 맞이했다. 이미 고프리와 구스는 멀루아성을 떠났다. 지금쯤은 성벽을 빠져나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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