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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29화 (129/231)

129화

“예, 전하.”

시녀는 곧바로 대답한 뒤 빠르게 앞장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왕명이 두려워 한사코 감옥을 가 보겠다는 그녀를 말렸다. 폐하께서 아신다면 제 목이 잘려 나갈 것이라 읍소하면 왕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청을 거두어들이고는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었다. 이제는 왕비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들의 안위를 진정으로 걱정해 줄 만한 사람은 파니릴리 단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그것은 아마 멀루아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리라.

두말하지 않고 따라나서 왕비를 호위하는 보초병들의 갑옷과 군화가 덜그럭덜그럭하고 어두운 복도를 소란하게 하였다.

지하 감옥은 낮이든 밤이든 어두워 때를 알 수 없었다. 늘 습하고 퀴퀴하여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몸이 끈적거리고 땀이 줄줄 흘렀다.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과 물을 마시지 못했다. 돌처럼 딱딱한 빵과 돼지죽보다 못한 수프가 전부였다.

이런 취급에 이골이 난 거윈과 다르게 고프리는 발작이 일어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그보다 한참 어린 구스조차 잘 견디고 있는데 그놈은 소리를 지르거나 창살을 쥐어뜯듯 발작을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손톱을 뜯으며 좁은 감방 안을 빙빙 돌아다니고는 했다. 정신 사납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시끄러워 죽겠네.”

바닥에 누워 지푸라기를 씹던 거윈이 참다못해 한마디했다. 한 평이 조금 넘을까 말까 한 공간 안에 몸을 구겨 넣느라 벽을 따라 긴 다리를 쭉 뻗은 채였다.

“어차피 뒈질 거 그냥 알아서 좀 뒈져 버리지 그래.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고프리는 사실상 따지고 보면 이곳에서 누구보다 대우를 잘 받는 죄수였다. 주기적으로 그를 찾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올 때 늘 신선한 과일 따위를 숨겨 와 몰래 고프리에게 건네고는 했다. 고프리는 그를 모렌베어라고 불렀다. 독특한 이름이라 쉽게 기억했다.

“닥쳐. 난 너 따위 하급 기사와는 근본적으로 달라. 난 늘 내 직무에 충실했어. 그런 대가가 이런 더러운 지하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라니. 난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이게 다 미친 왕 때문이야. 그 미친 왕 때문에….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거야.”

거윈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멀루아의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건 온 세상이 다 알아. 아둔하고 무식한 울퍼를 내세워 네놈이 하고 싶은 대로 했잖아. 직무에 충실하긴 얼어 죽을. 너 같은 놈이 발투만 폐하 곁에 있었다면 진즉 목이 잘렸을 거다. 그나마 그동안 목숨 부지하며 산 것에 대해 감사하라고. 덤으로 얻은 인생이었으니.”

고프리는 그 말에 반박하기 위해 철창에 바싹 붙어 입을 뗐다. 그러나 입구에 붉은빛이 비추자 곧 입을 다물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는 무장을 한 병사의 것이 분명하였다. 고프리는 겁에 질린 채 철창에서 물러나 반대편 벽에 바짝 붙어 섰다.

긴 그림자로만 어른거렸던 횃불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간수와 제법 복장을 잘 갖추어 입은 상급 시녀가 동시에 보였고 그 뒤로 파니릴리 발투만이 등장하였다. 무장한 보초병 둘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랐다.

“이쪽입니다, 전하.”

시녀는 구스의 독방 앞으로 릴리를 안내하였다. 바닥에 모로 누워 있던 구스가 환해진 불빛에 제 눈을 비비다가 몸을 일으켰다. 못 본 사이 아이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움직임이 굼뜬 것이 기력이 많이 쇠한 것 같았다.

“구스.”

“저… 전하…?”

아이가 말라 터진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높고도 나약한 소리.

“문을 열어.”

릴리가 명령했다. 간수는 곤란한 표정으로 릴리와 시녀의 눈치를 살폈다.

“예? 하…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

우물쭈물 변명하는 사내의 말을 끊고 시녀는 벼락이 내리는 듯 호통을 쳤다

“왕비 전하의 명령이다. 감히 어디다 말대꾸를 해! 어서 문을 열어!”

간수는 무장을 한 보초병들의 허리춤을 보았다. 심기를 거스르면 언제든 저 허리에 찬 칼을 빼 들겠지. 상대가 누구인가. 사람들 앞에서 울퍼의 뺨을 내려치던 여자다. 엘버그의 법대로라면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일임에도 그 일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하물며 왕조차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릴리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물의 지독한 악취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아이의 상체를 받쳐 안고 더럽고 야윈 아이의 얼굴을 제 치맛자락으로 닦아 냈다.

“구스, 괜찮니?”

“…….”

아이는 대답하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마실 것을 가져와.”

릴리의 명령에 간수가 재빨리 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컵 하나를 시녀에게 건넸다. 에일이 가득한 조잡한 나무 컵.

“폐하. 여기 있습니다.”

시녀가 곧장 릴리에게 그것을 건넸다. 릴리는 아이의 입 속에 그것을 흘려 넣기 위해 애썼다.

“마셔, 구스. 어서.”

몇 모금 입을 축이더니 벌벌 떨리는 작은 손이 간신히 컵을 잡았다. 정신을 차렸는지 맹렬히 액체를 들이켜는 모습에 릴리는 안도감을 느꼈다.

“다행이야. 잘 버텼구나.”

아이는 헐떡이며 입술을 닦아 내고 말했다.

“죄, 죄송해요, 전하.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곤란하진 않으셨나요? 전하께선… 저에게 친절만 베풀어 주셨는데…. 죄송해요….”

릴리는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구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미안한 건 나야. 내가 너를 방으로 부르지만 않았어도… 네가 이렇게 비좁고 무서운 곳에 갇혀 있지 않았을 텐데.”

“괜찮아요.”

구스는 헤헤 웃었다.

“정말 행복했어요. 계속 입 속에 설탕을 물고 있는 것 같았어요.”

부모조차 자신을 그렇게 아껴 준 적이 없었다. 애정 어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렇게 사랑이 담뿍 담긴 흐뭇한 눈길로 자신을 보며 웃어 준 적은 없었다. 아주 짧지만 그리하여 더욱 달콤했다. 처음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신이 났다. 자유가 아님에도 꼭 자유로운 것 같았다.

구스는 그것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아마네스 여신님이 저를 가엽게 여겨 보내 준 마지막 선물일 거라 생각했다. 죄를 짓기에는 너무나 짧은 생. 죽음 후의 세상은 이토록 행복하고 달콤하니 겁낼 것이 없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라 아이는 확신했다.

“그러니 저는 괜찮아요, 전하. 저를 아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이는 꼭 죽음을 앞둔 자처럼 말했다. 그 점이 뼈에 사무치도록 릴리를 아프게 했다. 릴리는 시녀에게 아이를 돌보게 한 뒤 바로 옆에 위치한 거윈의 방으로 향했다.

“거윈, 괜찮아요?”

거구의 장정은 마치 집 침대 위에 앉은 듯 편안한 얼굴로 씩 웃었다.

“아무렴요, 왕비 전하. 별 탈이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멀루아에 소각 명령을 내리셨어요.”

릴리는 언성을 낮추어 말했다.

“이틀의 말미를 주었지만 사실상… 알잖아요. 누구도 이 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요. 모두 병들고 쇠약한 자들뿐이에요. 차라리 불에 타 죽기 전에 알아서 숨을 끊으라는 명령과 다를 바 없어요.”

“폐하다우신 명령입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호쾌한 사내시지요.”

거윈은 껄껄 웃었다. 아무 근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 릴리는 의아할 뿐이었다.

“그 명령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해하고 있는 건가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하루 뒤면 통구이가 될 신세란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부당한 처사예요!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요!”

거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힘없이 출 늘어뜨린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이토록 나이가 많았던가? 갑자기 거구의 장정이 노쇠한 노병처럼 보였다.

“아주 오랜 세월… 아주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살았습니다. 핏물을 빗물처럼 느끼며 살았지요. 흙구덩이에 고인 비릿한 피비린내가 일상이었지요. 태어난 곳도 전쟁터요, 살아간 곳도 전쟁터였어요. 그리고 이제 저는 지쳤습니다, 전하.”

그러고는 저 혼자 웃었다. 허탈하게 껄껄껄.

“진심으로요. 정말이지… 정말이지 너무 오랫동안 피 냄새를 맡으며 살았어요. 그것에 인이 박여 때때로 그 냄새가 다시 맡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랍니다. 저는 도살자예요, 전하.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래 버티지 못하는 살인마입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제 그런 자신에게 넌덜머리가 납니다.”

살인마라니. 단 한 번도 이 덩치 큰 중년의 사내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가 칼과 방패를 들었을 때도, 날붙이를 매만질 때도. 전사들은 모두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살인마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당신은 군인이잖아요. 거윈, 군인은 왕국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거윈이 그녀의 뒷말을 대신 이어 말했다.

“사람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지요.”

‘무기를 들고 싸우잖아요.’ 그렇게 이야기를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었건만. 릴리는 두 손을 꼭 말아 쥐었다.

“당신이… 당신이 이곳에서 죽게 놔둘 수 없어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그 어떤 잘못도 없는 이들을 이런 식으로… 절대로….”

이들뿐만 아니다. 멀루아의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 모두 그렇다. 자신이 가진 힘이 없었다. 왕족이면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원죄가 있으면서. 무엇하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왕비 전하.”

그녀를 부르는 거윈의 음성은 깊은 울림이 있었다.

“전하께서 자라신 곳은 정말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었나 봅니다. 저 역시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제가 태어난 곳은 이곳 엘버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거친 대륙, 살기 위해 누구나 죄를 지어야 하는 곳이랍니다. 이것이 저의 현실이지요.”

“…….”

“용병으로, 그리고 엘버그의 근위병으로 살아오며 베어 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중에 무고한 사람은 또 얼마나 될지…. 전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 본 적도 없지요. 또 그런 완전무결한 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람을 죽여 받은 돈으로 배나 불리고 술이나 처먹으며 사는 것이 사는 낙인 사냥꾼이랍니다.”

그는 여전히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이곳에서 무결한 무엇을 찾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갖고 계신 그 고결한 이상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악에서 연민을 찾으려 하지도 마시고 무언가를 당신의 잣대로 판단하지도 마십시오. 인간도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삶입니다. 태어나서 그냥 죽을 때까지 사는 것뿐이니까요. 하루라도 더 즐기고 또 즐길 수 있길 바라면서요.”

더는 죽음을 앞둔 노병의 소회 같은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 녹아 있는 아주 근본적이고 불편한 진실도 마찬가지였다.

“…거윈, 난 당신이 구스를 데리고 멀루아를 벗어나 주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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