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카르낙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제 처를 향해 답했다.
“왕비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끔 입조심을 하라고 분명 경고했는데 다들 주둥이 대신 비둘기 똥구멍을 단 게 틀림없네. 아무 생각 없이 싸지르는 것을 보니 말이야.”
지금 그 말이 나와? 캘던에서 온 왕의 사람들을 뺀 모두가 화형당하게 생겼는데? 심지어 이 성 안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주인을 잃었다. 밉든 곱든 모실 주군이 없으면 그들 모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막막한 상황에 처해지는 것이다. 하물며 어찌해 볼 시간도 주지 않고 영지를 모두 불태우겠다니. 목숨이 경각인데 왕의 경고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들에게 기댈 곳은 발투만 왕비, 저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다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겠어요! 그들은 그저 성을 장식하는 사물이나 장신구가 아니에요! 하다못해 짐승들도 죽음 앞에서는 두렵고 무서워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법이에요.”
“이들을 받아 줄 영지는 어디에도 없어. 명예도, 긍지도, 도덕도, 자존심도 없는 그의 종들을 받아 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고.”
주인인 울퍼의 탓이었다. 그 명예도 명성도 명망도 없는 잡놈이 귀한 사람들을 모두 근본 없이 천한 것들로 만들어 놓았다. 누가, 울퍼의 취향대로 헐벗고 사는 그의 창녀들을 시녀로 받겠는가, 누가 울퍼의 뜻대로 움직이던 그의 장기 말들을 종으로 들여 안살림을 맡기겠는가. 한 번도 군인으로서 이렇다 할 명예조차 보여 주지 못한 그의 졸개들을 어느 군부가 품어 주겠는가. 멀루아의 땅에 쓸모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예전에 그것을 확인한 바였다.
“그런 울퍼를 영주 자리에 앉힌 건 폐하시잖아요.”
“그래서 내가 죄책감이라도 가지란 거야?”
릴리가 쏘아 낸 비난의 화살을 그는 태연하게 쳐 냈다.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모두에게 짐이 무능한 탓이라고 이야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
카르낙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아직도 카르낙 발투만을 모르는가. 그에게 그런 것이 있다면, 그에게 도덕이라 혹은 군주의 도리라 일컬어지는 그런 나약함이 있다면 그는 결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자에게 대체 무엇을 바라는가. 사내로 보이는 달콤함에 눈이 멀어 그가 모두에게 달콤한 사람이라 착각이라도 한 것인가. 릴리는 자기모순에 빠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어. 파니릴리. 어떻게.
“원래 수습이란 이렇게 하는 게 아니던가? 내가 보고 경험하고 배운 대로 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탓하려면 하게너를 탓해. 그게 아니라면 알기어스를 탓하든가.”
“…폐하께선 저를… 아끼시는 게 아니었나요?”
릴리가 비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카르낙은 주좌의 손잡이를 불안스레 툭툭툭 두드리다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난 언제나 내 아내를 아낄 뿐 아니라 사랑한다오, 왕비.”
“그렇다면 어째서 저에게 이토록 잔인하신가요?”
그는 가늘게 눈을 떴다
“내가 정말 당신에게 잔인해? 매번 당신에게 상처 주는 일을 골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아 스스로 상처받는 것이 아니고? 단지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야? 내가 하는 것은 말이야, 릴리. 너에 대한 내 사랑과 왕으로서의 내 일을 분리하고 있는 것뿐이야. 너야말로 왕과 남편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가?”
“…….”
“릴리. 사내로서, 왕으로서 내가 내 아내에게 왕비에게 바라는 것은 나에 대한 헌신도, 모략도, 암투도 아니야. 오로지 당신의 애정과 믿음뿐이야.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하지.”
“…….”
“하지만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것은 너무도 많고 너무도 복잡해. 그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을 채울 수 있겠어.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인데.”
릴리는 그저 멍하게 카르낙을 바라보았다. 슬프고 차갑게 침잠해 있는 그의 면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모든 것이 비워진 채 기둥처럼 멀쩡히 서 있었다. 생각은커녕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천치처럼 말이다. 그가 내뱉은 말 하나하나,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그녀의 가슴팍에 꽂혔다. 그는 그렇게도 무심히 쳐 내던 화살들이 릴리에게는 빗겨 가는 것 하나 없이 모두 살갗을 찢으며 박혔다.
애초에 원하던 것은 제 역할을 다 하고 그라타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세월이 지나 엘버그에서의 추억이 많아질수록 덧없는 것들을 덧입히고 말았다. 나약한 것들을 꿈꾸었다. 자신의 신변이나 목적에는 무용한 사람들을 향한 죄책감, 책임감, 혈육으로서의 도리, 그라타에서나 통했을 도덕이나 신념. 그저 특이한 외형을 갖고 태어난 변변치 않은 계집 주제에. 욕심이 과하여 엘버그 대륙을 바꾸려 하였다. 자신이 꿈꾸는 모습대로.
그리고 그것 역시 맹신이라는 광기. 제 아비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이 릴리의 심신을 괴롭혔다. 실어증이라도 걸린 듯 알현소를 나온 후 그녀는 실수로라도 입을 떼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입 안으로 무엇을 집어넣기도 뱉어 내기도 거부한 채 릴리는 오로지 자신의 안으로 함몰되어 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자책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절망하다 다시 또 답을 찾기 위해 헤매기를 반복하다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이미 깊은 밤이었다. 카르낙은 돌처럼 굳어 창밖만을 바라보는 아내를 몇 번 얼러 본 후 입 열기를 단념하였다. 다만 낯빛이 좋지 않은 아내를 걱정해 그녀에게 따듯한 모포를 둘러 준 후 그녀의 공간에서 사라졌다. 그는 아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존중하노라 하였다. 너의 바람을 거부하였다 하여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라며. 공허한 메아리였다. 무엇도 자신의 마음을 증명할 수 없음에도 카르낙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 네가 소중하다 말했다,
그 후에 카르낙은 알현소로 향한다고 했다. 울퍼의 침실에는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시종들은 그곳에 왕이 머물 만한 침대와 테이블을 마련하느라 해 질 녘 내내 분주했으리라.
“전하. 밤이 너무 깊었습니다. 몸이 더 상하실까 걱정됩니다.”
왕명에 따라 릴리의 곁을 지키던 리쿠스가 따듯한 차를 내오며 조용히 말했다. 릴리는 설핏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리쿠스.”
그 말에 용기를 얹어 리쿠스는 의자 하나를 끌고 와 그녀의 곁에 앉았다.
“아시잖습니까. 멀루아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있어요. 잘 먹고, 청결한 곳에서 잘 쉬면 전부… 전부 다 나을 수 있는 병이에요.”
“이미 영지민의 절반 이상이 풍토병에 걸렸습니다. 땅은 모조리 다 썩어 들어가고 있지요. 그런 곳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엘버그 왕국에는 이들에게 나누어 줄 곡물도, 돈도, 빌려줄 변변한 땅도 없습니다. 누구도 이 가여운 이들을 도울 여유 같은 건 없어요. 폐하께서는 그렇기에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지키려 하시는 겁니다.”
“…….”
“이미 울퍼의 곳간은 전하께서 전부 개방하여 영지민에게 나누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만하면 전하께서도 충분히 하실 만큼 하신 겁니다.”
“폐하께서는 그저… 그저 복수를 하시는 거예요.”
릴리는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그는 여전히 투로들의 왕이지요. 그 외의 것들은 전부 엘버그 땅을 더럽히는 버러지들일 뿐이에요.”
그 얼마나 분명하고도 명쾌한 정의인가. 카르낙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단하면 어느 것 하나 모호한 것이 없다. 세상을 채우는 이 다채로운 색과 향도 모두 그에겐 흑과 백으로 나누어질 터였다. 그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것들을 지키려 제 안을 꼭꼭 닫아걸고 철을 두르고 사슬로 묶어 잠갔으리라.
“왕국은 여전히 불안정합니다. 거기에 재해까지 겹쳐 이러다 왕국이 멸망하는 것은 아닐까 모두 불안해하며 살아가지요. 이 혼란한 시대를 통치한 지 이제 겨우 3년, 폐하께서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실 겁니다.”
릴리는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르낙이 둘러 주었던 모포를 둘둘 말아 그 위에 올려 두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당신은 참으로 충직한 신하로군요, 리쿠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발투만 폐하께선 참으로 운이 좋으세요.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분명….”
‘분명 그도 자신을 행운아라 여길 겁니다. 늘 감사하고 계실 거예요.’라는 뒷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그래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리쿠스도 버릴 테지. 자신의 기사였던 거윈을 버리듯이. 제 손으로 살려 주었던 구스를 다시 죽이듯이.
언젠가. 언젠가 자신의 가치가 다하면, 그때 카르낙은 파니릴리 저도 죽이리라. 남녀 간의 사랑이란 얼마나 허무하고도 무용한가. 사랑으로 야기되는 희생, 헌신, 친절, 상냥함. 그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릴리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위에 많은 것을 쌓아야만 했다. 같은 이상, 같은 지성, 같은 꿈. 사랑보다 더 끈끈한 신뢰와 믿음이 생겨야 비로소, 비로소 그에게 의미 있는 인간이 될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인내하였다. 카르낙 발투만,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진심으로 의미 있는 동지가 되고 싶어서.
그러나 그에게 자신은 언제나 육욕이 바탕이 된 헛된 욕망의 대상.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씨 앞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허울일 뿐인 왕비, 액세서리 같은 아내.
욕망의 배출구, 그 이상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돌아올 리 없는 메아리를 목이 찢어져라 부른 셈이었다. 그동안 그에게 주고자 했던, 보여 주고자 했던 모든 것들은 공허하고 무용한 것이었다.
“어딜 가시려는지요?”
문 쪽으로 향하는 릴리를 보며 리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밤이 깊고도 한참이나 더 지난 시간,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둡고도 어두운 때였다.
“산책을 하려고요.”
“이 시각에 말씀입니까?”
“네.”
“몸도 성치 않으신데….”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으니 갑갑해서요. 잠시라도 몸을 움직이고 싶어요.”
“…하면 제가 함께…”
리쿠스가 왕비의 뒤를 따르기 위해 걸음을 떼자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성 안을 잘 아는 시녀와 함께 가겠어요. 보초병과도 동행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폐하께서 전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 하시었는데….”
“아주 잠시요. 다녀올 동안 한숨 돌리세요. 내어 준 차가 다 식기 전에 돌아올게요.”
리쿠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듯한 찻잔을 바라보았다. 왕명이라 하여도 파니릴리가 거부하는데 한사코 따라나서겠다 할 수는 없었다. 카르낙에게는 신하가 된 도리로 충성한다면 릴리에겐…. 그녀에겐 그저 사람으로서 잘해 주고 싶었다. 시녀와 보초병들도 함께한다니. 위험하진 않겠지. 또 금방 돌아오신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릴리는 그에게 말한 대로 전담 시녀 한 명과 보초병 둘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지하 감옥으로 안내하세요.”
방문을 닫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릴리가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