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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25화 (125/231)

125화

“…….”

다시 또 얼이 빠졌다. 집 나간 영혼이 돌아오기도 전에 다시 가출해 버린 것이다. 그러다 카르낙이 제 몸 위에 올라타 허리끈을 풀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옷을 벗기고 있지요, 부인.”

“…싫어!”

릴리는 사색이 되어 바둥거렸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끈을 모두 풀어낸 카르낙이 이번엔 그녀의 블리오 자락을 끌어 올렸다.

“그만해요, 칼! 그만!”

발버둥을 치며 거부해도 남편의 손길은 완강했다. 발버둥 칠수록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릴리는 매섭게 카르낙의 뺨을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났고 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퍼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저지르고도 당황하여 얼굴이 뜨거워지는데 카르낙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 쇳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입가에 피를 묻히고서도 그는 곧은 시선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 어떤 놀람도 동요도, 심지어 감정도 없는 것처럼.

그 상태에서 카르낙은 보란 듯 그녀의 블리오 자락을 찢었다. 양옆으로 가볍게 힘주어 당기자 뻣뻣한 천 쪼가리는 여지없이 찢어져 그녀의 몸 위에서 떨어져 나갔다. 저항할 의지도 그의 손에 같이 찢겨 버렸는지 릴리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모든 것을 단념하기라도 한 듯이.

“어떤 상황에도….”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닦아 내고 말을 이었다.

“난 내 아내를 아껴. 그것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카르낙은 릴리의 신발과 양말까지 벗기고 얇고 촉감이 좋은 비단 이불을 덮어 주었다. 릴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카르낙은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워 제 아내를 꽉 껴안았다. 죄이는 힘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애정 어린 포옹이라기보다는 도망갈까 염려하는 포박에 더 가까웠다.

릴리가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릴리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카르낙에게 안길 것을 생각했었다. 애정과 교감에 서툰 그가 단지 자기 위해 옷을 벗기려 한 것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 남편이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그래 봐야 달라지는 것이 뭔가 싶은 허탈감이 동시에 들었다. 갑갑함에 릴리가 허리를 비틀자 카르낙은 더 강하게 릴리의 몸을 옥죄었다. 흡사 먹이를 감아 질식시키려는 뱀 같았다.

어떻게 해도 풀려날 수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카르낙의 품 안에 송장처럼 누워 남편이 깊이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제 어깨와 허리를 죄는 힘이 느슨하게 풀어질 때쯤 그녀는 살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다시 풀썩, 베개 위에 낙하했다. 카르낙의 팔이 갈고리처럼 그녀의 어깨를 감은 채였다.

“어딜 가.”

“…….”

자는 거 아니었어? 놀란 마음에 돌연 몸이 굳어 버렸다.

“자는 줄 알았어요.”

“그랬어. 네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었나. 과하게 술을 마신 밤에는 코까지 골며 잘도 자던데. 역시 술에 떡이 되도록 만들었어야 했나.

“너무 갑갑해요.”

“아니면 달아났을 거잖아.”

릴리는 변명할 수 없어 그를 탓했다.

“매우 이기적인 처사에요.”

“관심 없어.”

“이런 식으로 날 강제할 순 없어요.”

“난 언제나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해. 때론 강압적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카르낙은 아내를 좀 더 당겨 안고 눈을 감았다.

“이제 자. 달아날 생각은 말고. 어차피 못 벗어날 테니까.”

“…구스를 풀어 줘요.”

“…….”

“거윈이란 사내도요.”

“릴리, 그만하지 않으면 입을 틀어막을 거야. 그 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책임 못 지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아, 진짜 짜증 나네. 그가 내뱉는 음절 하나하나가 못마땅하면서도 무서워서 릴리는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구스는 이 순간에도 어둡고 축축한 지하에 갇혀 오들오들 떨고 있을 텐데 어떻게 속 편하게 잠을 잔단 말인가. 릴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제 황소고집 남편이 지난밤에 잘 잤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밤새 그녀를 옥죈 악력은 풀리지 않았더랬다. 릴리는 동이 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의 호랑이를 피해 방 밖으로 나가 버린 것이다. 카르낙은 머리를 긁으며 쾅! 문을 닫고 나가는 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어쩐다? 나도 곧 나갈 건데. 그는 의욕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장하고 단단한 근육 위로 아침 햇살이 드리워 눈부셨다. 여종들이 그것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카르낙은 창가에 서서 씩씩거리며 뜰을 가로지르는 아내의 머리통을 좆았다.

“좋아. 어디 해 보자고.”

어쩐지 이상한 곳에 전력투구하는 것 같지만 그는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

“…그런 연유로 모웨나 코르넬리오 가문의 장자는 혼자 살아남아 하급 기사의 종자가 되었다 합니다.”

측근인 모렌베어가 조용히 읊조렸다. 은밀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고프리는 씨익, 간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악하기 그지없는 폭군이 그런 자비를 베풀었단 말이지.”

카르낙 발투만이 정적의 자식을 살려 두었다니. 그답지 않은 일이다. 고프리는 카르낙이 종자 놈과의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에 비친 당혹감과 분노가 너무도 선연하여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 순간 필시 카르낙 발투만은 후회하고 있었다. 놈을 협박하는 어투는 매섭고도 다급했다. 틀림없어. 그놈이 약점이야. 그놈이 곧 잘릴 카르낙의 발목이 되리라.

“좀 더 캐 봐. 발투만이 당시 모웨나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더 구체적으로. 필시 저렇게 날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분명히.”

모렌베어는 한때 코르넬리오 가문을 섬겼다. 유능한 집사였던 그가 모웨나에서 쫓겨난 것은 순전히 코르넬리오 부인 때문이다. 죽 끓듯 한 그녀의 변덕은 꽤 자주 아랫것들을 과녁으로 삼았다. 까닭도 없이 날아와 사정없이 꽂혔다.

모렌베어도 그 화살받이 중 하나였다. 그는 무슨 이유로 코르넬리오 가문에서 내쳐졌는지 영문도 모른 채 멀루아에 들어와 성의 시종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종인 고프리의 시종이 되었다.

이제 모렌베어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이유나 명분 따윈 필요 없다.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그의 직분이었다. 그러므로 모렌베어는 행복했다. 자신의 뼈아픈 기억과 인맥이 주인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충직한 시종다웠다.

“예. 고프리 님. 맡겨만 주십시오.”

카르낙은 곧 있을 울퍼와의 아침 식사를 위해 채비를 했다. 견갑과 검을 몸에 두르고 정강이를 판금으로 감싼 단단하고 흠집 없는 군화까지 착용한 뒤 길고 질긴 제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동여매니 수려한 콧날과 강인한 턱선이 훤하게 드러났다.

“과연, 엘버그의 국왕다운 자태이십니다.”

카르낙이 착복하는 것을 곁에서 돕던 시녀가 그 자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덥수룩하게 늘어뜨리고 있을 때보다 단단히 틀어 묶어 턱과 목의 선이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훨씬 더 남자답고 냉정해 보였다.

“…….”

카르낙은 시종들의 감탄에 무심한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한 태도였다.

한참 동안 딴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그는 제 옷소매를 정리하며 툭, 던지듯 말했다.

“비가 산책에서 돌아오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신선한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둬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몹시 허기질 거다.”

시종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카르낙은 대답을 들은 뒤 방을 빠져나왔다. 근위대가 곧장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멀루아에 온 이후로 왕은 늘 근위대와 함께했다. 대개는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고 아주 가끔, 독대를 해야만 할 때는 언제나 눈이 닿는 지근거리에 있었다. 언제든, 조금이라도 안 좋은 기미가 보이면 바로 칼을 쑤셔 넣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 항상 혼자 이동하는 것을 선호하던 카르낙을 아는 이라면 제법 낮설게 느껴질 만했다.

그는 아주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보폭이 넓은지라 그 속도는 매우 빨라 그를 따라잡기 위해 시종들은 종종걸음을 걸어야 했고 마침내 작은 홀에 도착했을 땐 숨을 헐떡거렸다.

왕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고프리와 울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폐하. 지난밤 편안히 주무셨는지요?”

공손히 아침 인사를 건네는 고프리와 달리 울퍼는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을 휘둘렀다. 시종들에게 이제 어서 빨리 음식을 내오라는 독촉인 것 같았다. 배가 고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카르낙은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사실 그가 지난밤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라는 건 고프리도 알고 있던 바였다. 그럼에도 그가 간사하게 눈을 빛내며 왕에게 묻는 것은 혼자만의 만족을 위한 거였다. 비밀스럽게 도발해 놓고 그는 저 혼자 흡족해했다.

다소 썰렁한 홀 안으로 시종들은 기다렸다는 듯 음식을 날랐다. 바지런히 날라 어느새 커다란 테이블 위로 산해진미가 차례대로 차려지자 울퍼는 기다렸다는 듯 고기를 찾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르낙은 확신했다. 저놈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성욕, 식욕, 물욕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카르낙은 몇 번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동안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고프리도 왕을 따라 몇 덩이의 거위 고기를 찢어 제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왕의 심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불편해 보여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사람을 찢어 죽이는 것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인간이 제 마누라와 말다툼 조금 했다고 저렇게 티를 내다니.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입맛이 없는지 한 점을 입에 넣고 왕은 고기를 손으로 쭉쭉 찢기만 했다. 홀 안에는 울퍼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대는 소리만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신경에 거슬리는지 고프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울퍼.”

카르낙이 멀루아의 영주를 불렀다. 시선은 여전히 고기를 찢는 손에 둔 채 그는 말을 이었다.

“네놈은 네 영지에 병이 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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