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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24화 (124/231)

124화

릴리는 창가를 서성이며 제 손톱을 뜯었다. 우중충한 날씨에 습하기까지 해 사방에서 고약한 악취가 흘러들어 왔다. 시종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여기저기 향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하.”

불안한 마음으로 창밖만 살피다가 릴리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구스를 보고 오라는 제 심부름을 막 다녀온 것이다.

“어때요?”

릴리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혹 카르낙이 제 성질에 못 이겨 말로만 내뱉었을지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여종의 대답은 그녀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종자와 기사 모두 지하에 갇혀 있습니다.”

“…함께요?”

여종은 굳은 낮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둘 다 좁은 독방에 있습니다.”

“…….”

릴리는 여종에게서 몸을 휙 돌려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제 입 속에서 짓씹히는 상스러운 노여움이 고스란히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미쳤어, 카르낙. 이제 겨우 아홉 살짜리 꼬마아이와 아무 잘못도 없는 근위대 기사를.

만일 이 자리에 로로가 함께했어도 카르낙이 그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에이가가 함께 있었다면? 그랬어도 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을까?

대체 어떻게 하면 그에게 알려 줄 수 있을까. 다른 이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배려나 이해 혹은, 동정심 같은 것을. 때론 무력보다 자비가 더 큰 힘을 발휘한 다는 것을. 유연하면 나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 더해진다는 것을.

이제 아홉인 아이가 좁고 어둡고 더러운 독방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나았다.

카르낙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침실로 돌아왔다. 그가 밖에 있는 내내 릴리는 방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다지 침실을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가 시위라도 하듯이 단 한 걸음도 나오질 않은 것이다.

카르낙은 구태여 그것에 관해 묻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또 서로 언성을 높일 빌미를 마련해 주는 것도 싫었고 릴리의 입에 발린 잔소리를 또 듣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꾹 다문 채 인형처럼 감정 없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것이 더 견디기 쉬우냐 물으면 그렇지도 않았다. 보고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히는데도 지고 싶지 않아 태연한 척, 제 옷가지를 벗기는 시종들의 수발을 받았다.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한참 만에 릴리가 입을 뗐다. 더없이 반가운 기척에 카르낙이 기꺼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데?”

“전장에 가신 폐하를 기다리는 동안 에이가가 많은 서적을 가져다주었거든요. 그중 왕실 기록물에서 보았던 이야기예요.”

카르낙은 진지하게 아내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귀히 들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비로운 알기어스 왕이라 불리던 열세 번째 왕에 대한 기록이에요.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내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많은 반란과 모략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은 자유 도시가 된 리오 영주의 반역이었대요. 전란으로 치닫지는 않았으나 그 죄가 매우 엄중하여 사람들은 모두 영주에게 영지를 반납하게 한 뒤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카르낙은 상아로 만든 잔에 포도주를 채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야기가 궁금하기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아내의 저의가 불분명하였으므로.

“하지만 왕은 리오의 영주를 죽이지도 영지를 빼앗지도 않았대요. 대신 그의 장자를 캘던으로 데려왔죠.”

“인질이로군. 자비로운 알기어스 왕께서 아들을 볼모로 충성을 강요한 모양이야.”

카르낙이 잔을 들고 릴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이는 알기어스 왕의 보살핌 속에서 사랑으로 길러졌어요. 왕은 리오의 장자에게 당신의 아이들과 같은 교육과 대접을 받게 했어요. 아이는 비록 부모와 떨어져 자랐어도 그 결핍을 모를 정도로 애정이 충만한 환경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랐대요.”

무슨 이야기든 들을 각오가 되어 있었지. 이런 이야기만 빼고!

“아이는 커서 알기어스 왕의 막내딸과 혼인을 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작고하고 난 뒤 영주의 자리를 물려받아 리오는 엘버그에서 가장 든든하고 충직한 알기어스 왕의 수호자가 되었대요.”

카르낙은 콧방귀를 뀌었다. 허탈하고 노여웠다. 그는 이야기가 끝마치기도 전에 흥미를 잃었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릴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물론 비아냥거림도 잊지 않았다.

“정말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네, 릴리. 듣고 있는데 눈물이 찔끔 나는 줄 알았어.”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탕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전 폐하께 도움이 되고자 한 이야기예요.”

“천만에. 내가 아니라 그 장자 놈을 위해 한 이야기겠지.”

“폐하께서 코르넬리오 가문에 보여 주신 자비가 퇴색되지 않길 바라는 거예요.”

“릴리.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해. 그거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거야.”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충언이에요.”

“사심이 섞인 사탕발림이야.”

카르낙은 망설임 없이 단정 지었다. 유하고 착하고 상냥하고 자비롭고 언제나 마음씨 고운 릴리. 때와 장소와 처지를 가리지 않는 무용하기 그지없는 선함. 언제까지 동화 속에서만 살 텐가. 사막에서 풀이 나길 기다리는 처지와 다를 것이 없다.

“제 진심을 몰라주시는군요.”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릴리의 말에 카르낙은 침상의 이불을 걷어 내며 눈을 굴렸다.

“당신의 진심은 너무나 잘 알지. 오히려 본인이 본인의 진심을 모르고 있고. 충언?”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럴듯한 포장이야. 그놈을 끔찍이 아끼는 건 알겠어. 과연 감옥에 갇힌 게 나라도 이럴까 궁금할 정도로.”

“과한 처사예요. 잘못도 없는 이들을 그 비좁고 더러운 독방에 가둔 채 이곳에 버려두고 가겠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신경 안 써. 난 왕이니까 내 맘대로 하는 것뿐이야. 알기어스들이 모두 그랬듯.”

“그래서 멸망했잖아요. 전부 당신 손에 죽었잖아요. 인과응보예요. 잘못한 일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고 난 당신이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부디… 그 처지에 합당한 명령을 하세요. 부디, 폐하. 사람들이 당신의 결정과 처신에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부디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지 마시고 기꺼이 당신의 뒤에 설 수 있도록 신의와 규율로 그들을 다스리세요.”

“잔소리가 나날이 늘어 가네.”

“구스를 풀어 줘요. 그의 주인도요. 제발요, 폐하. 자비를 베푸세요.”

카르낙은 갈무리하던 새틴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이제 그 이야긴 그만해. 장담하는데, 릴리. 네가 그놈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거야.”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조곤조곤 어르고 달래 보아도 화를 내고 협박을 해 보아도 도통 먹혀들지 않으니 진이 빠지고 제 속만 시끄러워 릴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문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카르낙이 물었다.

“어딜 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나서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야 머리도 마음도 진정될 것 같았다.

아내의 대답이 늦어지자 카르낙이 뚜벅뚜벅 걸어와 어깨로 문을 막아섰다. 살짝 열렸던 문이 그의 팔꿈치에 밀려 다시 닫혔다. 문을 짚은 손은 문의 두께만큼이나 단단해 보였다.

“산책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인데.”

“이보다 더 늦은 시간에도 잘만 했어요. 페하께서도 잊지 않으셨겠죠.”

“…그땐 특수한 상황이었어. 그리고 우리가 같은 침실을 쓰기 전이었고.”

“비켜 주세요.”

나가려는 릴리처럼 막아선 카르낙도 요지부동이었다. 틈이 보이지 않는 서로의 태도에 숨이 턱턱 막히기도 매한가지였다.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비켜 주세요.”

“나 역시 엉뚱한 곳에 정력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조용히 잠자리로 올라가지 그래.”

“폐하와 함께 있기 불편해요.”

제법 가시가 선 말투였다. 더 물러날 수가 없게 되었다.

“저런, 불편해서 어쩌지? 그래도 난 같이 있어야겠는데?”

“…….”

릴리가 미간을 확 구겼다.

“함께 있고 싶지 않다니까요.”

“네 기분 따위 알고 싶지 않아. 어쨌든 넌 나와 함께 있어야 해.”

그는 아이처럼 고집을 부렸다. 아내가 거기에 진력을 내고 있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촌극으로 치부하기에 자신이 뒷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가령 아내가 자신의 잔인함을 알게 되는 일 같은 것들. 그러니 아내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었다.

또한, 그러면서 자연스레 파생될 수밖에 없는 부정한 감정들, 이를테면 저를 향한 실망과 혐오 같은 것 역시 인정할 수 없었다. 릴리가 저를 싫어하는 것은 싫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도 싫다. 릴리가 저를 보며 낯빛을 굳히고,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싫었다. 아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고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멀리해서도 피해서도 미워해서도 거부해서도 안 되었다. 비록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표출해선 안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았고 용납할 수 없었다.

영영 제 아내와 멀어질까 카르낙은 두려웠다. 그렇게 하나하나 저에게서 도망가려는 제 아내의 행동과 감정을 용인하다가 어느 순간 곁에 오지 않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이대로 영영 멀어지면 어쩌나 그 생각에 피가 말랐다. 지금 이 순간 이 문을 열어 주면 그것을 허락하는 뜻이 될까 몹시도 두려웠다. 그녀가 저를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될까 봐.

“…….”

릴리는 카르낙의 행동에 얼이 빠졌다. 화가 난다기보다 기가 막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지난번처럼 그의 뺨을 후려갈길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전 제가 그러고 싶을 때 같이 있을 거예요. 제가 함께 있고 싶지 않을 땐 그러지 않을… 악!”

카르낙이 들어 올리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짧은 비명을 지르고 난 뒤 릴리는 침대에 낙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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