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그러나 파니릴리는 그의 말 허리를 잘랐다.
“이미 아이는 부모를 모두 잃었어요. 가문은 멸망했고 지위는 박탈당했어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아아. 결국. 카르낙은 넋이 빠져 중얼거렸다.
“놈을 살려 두어선 안 되었어. 실수였어.”
내 실수였어. 명백한 실수였어. 멍청한 짓을 한 대가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멍청한 자비 따위를 베푼 탓이야.
릴리는 남편의 중얼거림이 섬뜩하여 히스테릭하게 반응했다.
“아이가 가문과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잖아요. 그저 어쩌다 코르넬리오가에서 태어난 아이일 뿐이에요. 지금은 종자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고 있고요. 대가는 충분히 치렀잖아요.”
릴리를 향한 카르낙의 낯빛은 조금 더 날카롭고 무거워졌다. 심지어 그녀의 호소를 제대로 들은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릴리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놈은 코르넬리오의 장자고, 너는 반역자의 핏줄을 내 침실에 들였어.”
아니. 아니야.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릴리는 도리질하며 항변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맛있는 것을 배부르게 먹는 것뿐이었고 내가 아이에게 주려던 것은 단지 자두 나부랭이일 뿐이었어요!”
“언성을 낮춰, 릴리.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칼, 제발요! 내통이니 반역이니, 음모이니, 이제 겨우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아이를 품어 주면 돼요. 제가 할게요, 칼. 믿어 줘요. 아이를 남부럽지 않은 애정 속에 보살필게요. 행복 속에 커 가면 아이는 절대로, 절대로 우리에게서 등 돌리지 않을 거예요. 아이는 충만함 속에 절대로 엘버그 왕국의 은혜를….”
“어디서 병신 같은 동화 나부랭이를 지껄여!”
카르낙이 릴리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에게서 살기가 넘실거렸다. 다른 이였다면 이쯤에서 그의 손에 죽었으리란 것을 안다. 그러나 릴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신의 위력으로도, 무력으로도 부러뜨리지 못하는 것이 있노라고.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놀라워하지도 않고 그저 팽팽하게 뜨거운 것엔 뜨거운 것으로, 차가운 것엔 차가운 것으로 맞부딪힐 힘이 그녀에게도 있노라고. 릴리는 조용하고 낮은 언성으로 고하였다.
“때론 자비로워야 할 때도 있어요, 칼. 부디 죄 없는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요. 그럼… 우리 모두 덜 고통받게 될 거에요.”
카르낙은 비소를 띠었다.
“자비는 이미 차고 넘치게 베풀었어.”
네가 모르는 순간, 네가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들마다 넘치게 베풀었다. 넌 모르지, 릴리. 넌 모를 거야. 너에겐 차마 자비라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는 그 모든 순간이 내게는 자비였다. 사람들이 의아해할 만큼.
그 때문에 두려워. 오줌을 지릴 만큼, 핀이 내게 정신 차리라고 욕설을 퍼부을 만큼. 너와 만나 지냈던 그 하루하루가 모두 내겐 자비였다.
“아이를 죽이면 당신은 내 존경을 잃게 될 거예요.”
그런데도 감히 그 잘난 세 치 혀로 그녀는 왕을 협박하고 조롱한다. 그것에 놀아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가진 힘으로 저를 들쑤시고 뒤흔들려고. 너로 인해 절망하는 나를 보려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보려고.
네가 아마네스의 여식이라 했던가. 내게 저주와 고통만을 준 그 거짓 신의 영혼이 너에게도 깃들어 있던가. 그러나 내겐 아니야. 이런 지옥을 만든 그런 여신 따위 개나 주라지.
“아이와 그의 주인은 이 멀루아성에 갇히게 될 거요, 경애하는 파니릴리 왕비. 구더기들과 함께 썩어 가라지. 영원히.”
너만이 나의 여신이다. 파니릴리. 비록 비틀리고 잔악한 순교자일지언정. 오로지 너만이.
***
카르낙은 양피지를 단단한 대리석 책상 위에 가볍게 던졌다. 덤덤하고 고저 없는 표정이었으나 그 저변에 깔린 기운은 몹시도 냉랭하였다.
“대책이 없는 거야? 어디에도?”
핀이 그와 쓸모없이 버려진 양피지 사이를 가늠하며 물었고 카르낙은 답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왕비의 말로는 땅이 모두 썩어 가고 있댔어. 영지민의 풍토병은 전혀 나아지지 않을 거야.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상은 절대로.”
“…….”
그러나 이 많은 영지민들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내동댕이쳐진 서신들은 모두 리오와 캘던, 그리고 하게너의 영지에서 온 것들이었다. 여분의 병력을 지원해 줄 순 있어도 자원과 인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 하여 병든 자들을 받아 줄 도시도 없었으며 설령 그런 도시가 있다 하여도 현재 멀루아 영지민들의 상태로는 무리였다. 도시에 다다르기 전에 모두 병사하리라. 멀루아를 떠나 하루, 이틀 정도면 아마 하나씩 쓰러져 일어서지 못하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그다지 군사적으로 중요한 땅은 아니야,”
카르낙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에인과 브롱힐, 그리고 자유 도시인 리오까지 함락해야만 당도할 수 있는 땅이다. 깎아지른 절벽과 깊은 골짜기들이 많은 험난한 지형. 행군을 하기에도 배급을 하기에도 마땅치 않은 척박한 땅이다.
누구의 입맛에도 그다지 맞지 않을 소박하고 가난한 도시. 그러니 울퍼 같은 등신이 다스려도 별 탈이 없어야 마땅했다. 핀은 그 때문에 카르낙이 울퍼를 멀루아의 영주로 임명했을 거라 생각했다. 제 눈으로 땅과 사람들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그러나 현실은 비정한 법. 멍청하고 무능력한 우두머리가 얼마나 제 식솔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지, 핀은 그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해야만 했다. 그저 수저로 떠먹기만 하면 되는 땅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그뿐이랴, 이젠 그 뒷수습도 해 주어야 한다.
아직 통일되지 않은 왕국에서는 단 하나의 우방도 중요하니 말이다. 게다가 멀루아라면 엘버그 대륙 안에서 어느 영지보다 발투만 왕가에게 충직한 땅이었다. 비록 이렇게 쇠퇴했어도 충직한 영지와 병력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전시 상황에선 꽤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곳은 우리에게 최후의 요새가 될 수 있어. 더는 퇴각로가 없을 때 버틸 수 있을 만한 곳은 오직 멀루아뿐이야.”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가 멀루아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야.”
왕은 빛이 투영된 청아한 보라색 눈동자를 들며 말했다.
“그럼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거야?”
핀이 미간을 찌푸리며 따졌다.
카르낙은 아득하고도 먼, 대양의 어디쯤을 홀로 그리다가 그저 은밀하게 웃기만 하였다. 보기에 따라 정말 어떤 뜻을 담은 듯 보이기도 하는 미소.
“네놈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카르낙.”
일찍이 이해하기 버거운 놈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체 속이 깊은 건지, 아니면 아주 얕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아주 많은 건지 그조차도 판별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알기 쉬운 구석이라고는 왕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저 사랑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는 얼뜨기처럼만 굴어 대니. 내 진작 그녀가 네놈에게 버거울 줄 알고 있었지.
“그럼 어쩔 테냐. 다 썩어 문드러져 사지(死地)가 되도록 내버려 두잔 거야? 거윈도 같이?”
“…생각 중이다, 핀.”
“그놈의 생각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건데?”
역정을 내듯 투덜거린 후, 그는 한참 동안 망설이던 이야길 하는 수 없이 뱉어 냈다.
“왕비의 조언이 필요해.”
카르낙을 예민하게 만들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적어도 들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의견을 내놓을 거야.”
“그녀가 내놓을 의견은 뻔해. 성채를 개방해 전부 다 털어먹고 선구자처럼 멀루아인들을 이끌고 리오로 가자고 하겠지. 아니면 모두를 껴안고 화해시키고 사랑을 전파시켜서 죽은 땅이 살아나게 하는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머무르려고 하거나. 그도 아니면 몰라, 젠장. 진짜 여신처럼 손끝 하나로 죽은 자라도 일으키려는지 누가 알겠어.”
왕은 욕을 지껄이듯 투덜거렸다. 얼굴엔 못마땅함이 가득하였다. 어린아이 같기는.
“카르낙.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진 않지만 네가 말하는 것만큼 이상주의자는 아니야. 적어도 부당한 것에 분노할 줄 알고 그것에 위력을 쓸 줄도 아는 여자야.”
물론 폭력도.
“그리고 그 점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카르낙이 그의 말에 뒷말을 보태었다. 핀은 다시금 이해할 수 없어 도리질을 하며 물었다.
“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그저 이쁘장하기만 한 꼭두각시 인형이길 원하는 거야?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이 네 손에 놀아나기만 하는?”
“뭐. 어쩌면.”
“…….”
핀은 말을 잃었다. 미친놈 아니야, 이거? 그런 여자를 좋아했으면 진작 아무 여자나 꿰찼겠지. 엘버그에 널린 게 인형같이 멍청한 여자들인데.
왕은 아무 말이나 생각 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이란 일은 죄다 벌려 놓은 주제에 수습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건가. 그렇다면 겨우 종자의 일로 쇠고랑을 찬 거윈은 대체 어쩔 생각이란 말인가. 이쯤 되면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거윈은 우수한 전사야. 놈을 잃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라고.”
비록 성질이 유하고 미련하여 출세할 순 없을지언정 거구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힘으로 전장에 서면 적 네댓은 너끈하게 해치울 수 있는 뛰어난 자였다.
“근위대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텁고 무엇보다…. 무엇보다도 놈은 우리와 처음부터 함께한 전우잖아. 전장에서 네놈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줬잖아.”
“난 그보다 더 많이 놈의 목숨을 구했고 말이야. 빚으로 치자면 놈이 내게 갚아야 할 것이 더 많지 않겠어?”
“거윈에게 구스를 허락한 건, 카르낙 너잖아. 거윈은 왕명에 따라 구스를 종자로 택했고 지금껏 아무 문제 없이 잘 돌보아 왔어. 종자는 거윈의 심부름을 하는 중이었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고. 대체 왕비가 시종들이나 드나드는 뒷마당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어? 거기서 하필 구스와 부딪힐 줄은 또 누가 알았겠냐고. 그걸 거윈이 어떻게 통제할 수 있냔 말이야.”
겁에 질려 입을 닫은 어린 구스를 대신해 거윈은 자신의 상관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구스가 어떻게 왕비를 만났는지, 그녀가 구스를 위해 어떤 음식들을 챙겨 주었고 그날 아침 구스가 무슨 이유로 왕의 침소 앞에 서 있었는지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잘못을 저지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구스는 왕비의 명령을 따랐으며 거윈 역시 그랬다. 왕비 역시 언제나처럼 아랫사람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으며 거기엔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 차라리 있으면 좋았을 걸 싶을 정도로 말이다. 꼭 잘못을 집어내야 한다면 애초에 카르낙이 바르시를 살려 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거기서 코르넬리오의 장자를 죽였어야 했는지도 모르지. 그래 어쩌면 그게 맞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우린 놈을 거윈에게 맡겼고 그렇다면 좀 더 그럴듯한 이유로 거윈을 처벌해야 해. 단지 종자가 왕비의 부름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그런 좆같은 이유 말고.”
“생각해 보지.”
카르낙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모두 너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들이야. 누군가 네게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그건 다름 아니라 거윈일 거다. 그러니 제발 제대로 생각을 해. 대충 입으로만 생각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