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22화 (122/231)

122화

릴리는 납득할 수 없었다. 어느 어미가 자식을 굶기고 병들게 하여 죽게 한단 말인가. 하물며 사랑과 자비로 상징되는 신이 그 같은 일을 저질러선 안 된다. 그리하여 엘버그의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신이란 허상인 것이다.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아. 이 세상의 모든 이치는 결코 단 하나의 신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이 거대한 유기체는 각자의 섭리를 따라 유지된다. 어린 시절, 그것을 총칭하여 대지라 부른다고 하였다.

사람은 그저 대지에 빌붙어 증식하는 유약하고 보잘것없는 하나의 종족일 뿐. 누구도 그 거대한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을 알기에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돌 하나, 풀 한 포기.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마저 착취해 섭리를 거스르고 사람과 땅을 병들게 하는 울퍼의 행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그것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카르낙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아마네스 님께서 왕비 전하를 이곳에 보내셨을 겁니다. 당신의 아이를 친히 이곳에 보내어 멀루아가 왕비님의 앞에서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 분명해요.”

누군가의 의지로 이곳에 왔다면 그것은 엘버그의 왕인 카르낙 발투만의 것이다. 그가 무엇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 이젠 모르겠다. 엘버그인들이 울퍼의 폭정에 시름시름 앓으며 고통받는 것을 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울퍼가 얼마나 모자라고 음흉한가를 보기 위해서인지.

시녀는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의 탓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배제되고자, 면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녀 역시 발투만 왕가의 일원. 카르낙이 저지른 죄에서, 그리고 알기어스 왕이 저지른 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으리라.

왕비의 어두운 안색이 좀처럼 밝아지지 않자 시종은 넌지시 물었다.

“구스라는 아이를 불러올까요? 전하께서 부른다 하면 필시 기뻐하며 한달음에 달려올 겁니다.”

“그래도 될까요?”

되묻는 릴리의 눈가에 비로소 생기 넘치는 반짝임이 맺혔다. 시녀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전하.”

그녀의 말대로였다. 구스는 파니릴리의 부름을 듣고 닦고 있던 거윈의 군화를 내팽개치고 곧장 하인의 뒤를 따랐다. 거윈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강아지처럼 그 뒤를 따르는 구스의 뒷모습을 멍하게 쳐다만 보았다.

카르낙 발투만의 근처에 자주 드나들면 좋지 않다. 일부러 그와 스치기도 어려운 하급 기사이기에 놈을 종자로 들였는데 발투만 왕의 지근거리도 아니고 그의 아내와 직접 대면하며 교류한다니. 조만간 근위대장을 찾아가 이 일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최악의 상황이 닥치는 것은 피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언제나 안 좋은 일은 미처 준비하기 전에 생기기 마련이었다. 잠깐의 방심, 아주 작은 실수 하나가 기어이 화약고에 불이 붙고야 만다.

게다가 카르낙은 다른 이들은 잊어도 자신의 적만은 절대로 잊지 않는 사내였다. 그는 눈을 감을 때도 뜰 때도 적들의 얼굴을 되짚어 기억하고는 했다. 그러니 제 어미와 꼭 닮은 작고 새하얀 금발 머리의 꼬마 아이를 못 알아볼 수는 없었다. 직접 놈의 손에 칼을 쥐여 주며 ‘네 어미를 베어라.’ 하고 명령했던 때가 그리 오래지 않다.

고프리의 시중을 받으며 제 방 앞에 도착한 카르낙은 시녀의 손에 붙잡혀 우악스럽게 머리를 조아리는 코르넬리오의 장자를 보자마자 자리에 멈추어 섰다. 고프리는 삽시간에 싸늘해진 왕과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마치 철퇴와도 같은 침묵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스는 제 발끝을 향해 있는 두 눈을 좌우로 굴렸다. 언제쯤 왕이 제 앞을 스쳐서 지나갈까, 오직 머릿속엔 그 바람뿐이었다.

뚜벅뚜벅 왕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무거운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왕의 오른쪽 어깨에 달린 화려하고 거대한 견갑이 내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구스의 바람과는 달리, 왕의 군화는 구스의 머리 앞에서 멈추었다. 시야에 그의 단단한 정강이 그림자가 보일 때쯤 아이는 비로소 거윈의 염려를 떠올렸다. 때론 냉정하고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그의 엄격함을.

“이놈이 왜 여기 있어?”

묻는 왕의 언성이 서릿발 같았다.

“…와… 왕… 왕비 전하께서….”

시녀가 더듬거렸다. 빨리 대답하고 싶어 입술이 마르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어… 어린 종자를… 보… 보자 하시어….”

파니릴리가 이 반역자의 자식을? 카르낙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쇳물 같은 살기가 어렸다. 그를 본 시녀가 곧 발작이라도 할 듯 몸을 떨었다. 그 두려움이 전이되어 구스 역시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곧 스르렁, 하고 칼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파열음이 고막을 고통스레 들쑤셨다.

죽음을 예감한 시녀는 자리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사, 살려 주시옵소서! 폐하, 저는 그저, 그저 왕비 전하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부디….”

카르낙의 눈동자는 곧바로 굳게 닫힌 문으로 향했다. 종년의 목소리에 릴리가 이 소란을 알아차릴 것이다. 카르낙은 재빨리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 구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이의 젖은 발끝이 솜털처럼 돌바닥에서 들렸다.

“간신히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살려 주었더니 이제 감히 내 침전의 앞마당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보구나. 네 어미, 아비가 뒈진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지?”

구스의 발 아래로 쪼르르르,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무서움을 견디다 못해 오줌을 지리고 만 것이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잘 들어. 코르넬리오의 망아지야.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알짱거렸다간 네놈뿐 아니라 네놈의 주인, 네놈의 말, 네놈의 친구까지 모조리 사지를 갈라 줄 테다. 알겠어?”

아주 빠르게 속삭이고 그는 던지듯 구스의 목을 놓았다.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콜록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칼.”

릴리가 조용히 그를 불렀으나 아내가 이 일에 엮이기 전에 먼저 놈을 이곳에서 치워야만 했다. 카르낙은 어금니를 물고 작게 내뱉었다.

“꺼져.”

구스는 코를 쿨쩍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이처럼 머리가 양옆으로 덜덜 떨리는데, 아름다운 파니릴리 왕비와 눈이 마주쳤다. 부끄럽고 슬펐으며 또한 두려워 구스는 히끅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마치 메두사라도 마주친 듯, 아이는 그 자리에서 쏜살같이 달아났다. 무방비하고, 나약하며, 처절한 달음박질이었다.

“…….”

릴리는 영문을 묻듯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분명 목격하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는 왕의 손에 우악스럽게 들린 구스의 잿빛 얼굴을 보았다. 발아래 흐르던 비릿한 액체와 내팽개쳐 나동그라진 작은 육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모습도.

카르낙의 얼굴에는 여전히 노기가 서린 채였다. 그 노기는 릴리와 마주한 때에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파니릴리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힘에 못 이겨 릴리의 몸이 왈칵 그에게로 쏠렸다. 카르낙은 그대로 릴리를 끌고 방에 들어가 실내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 질렀다.

“나가! 전부 다!”

벼락같은 호통에 시종들이 천적을 만난 설치류들처럼 움직였다. 모두가 탈출한 후 쾅, 하고 방문이 닫히고 단둘이 남게 되자 카르낙은 비로소 제 아내의 팔뚝을 놓았다.

릴리는 저릿저릿한 팔뚝을 주무르며 경계 어린 눈으로 카르낙의 낯빛을 주시했다. 침착해야만 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반역자의 장자와 개인적인 접촉을 시도했기 때문이리라. 상대가 더할 나위 없이 어린 핏덩이라 하여도 결국은 카르낙에게 반기를 든 적의 핏줄일 뿐.

구스에 대한 릴리의 태도를 반색할 이유도 명분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러니 침착해야지. 성이 난 짐승을 도발해 보았자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정신 나갔어!? 사람들이 아마네스 여신이라 칭송하니 정말 여신이라도 된 것 같아?”

그러나 릴리의 침착한 얼굴을 마주하고도 칼은 진정되기는커녕 더욱더 이성을 잃어 가는 것 같았다.

“울퍼의 저장고를 풀어 멀루아 돼지 새끼들을 먹이더니 이젠 하급 기사의 쥐새끼들한테 침소라도 내어 줄 참이야!? 그래!?”

“…칼.”

“어떻게 그런 놈을 감히 왕의 침실 앞에 데려올 수가 있어!”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에요.”

카르낙은 제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놈은 그저 어린아이가 아니야! 그놈은 멀루아의 바르시 코르넬리오다. 코르넬리오의 장자이자 멀루아의 적통을 이어받은 그 땅의 주인이다. 한순간의 동정심이자 이제는 실수가 되어 버린 정복의 산물. 살려 두었으나, 살려 두면 안 되었을 놈.

만약을 위해 살려 두어야 한다는 거윈의 읍소 따윈 들어선 안 되었었는데. 놈을 수중에 두고 잘 관리하겠다는 그 약속을 믿어서는 안 되었었는데. 어느새 한 뼘 더 자라 그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제 눈앞에, 아니 파니릴리의 눈앞에 나타날 거라 예감했다면 그 자리에서, 그 싹을 자르고 말 것을.

그러나 말할 수 없다. 놈이 바르시 코리오넬로 라는 것을, 그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끝에 자신이 얼마나 잔인하게 잔당들을 처리했는지, 얼마나 무자비하게 그 도시를 도륙했는지. 차마 파니릴리의 앞에서 놈의 부모를 모두 죽였다는 사실을, 부모를 모두 죽였을 뿐 아니라 아이의 앞에서 아비의 시신을 욕보이게 하고 제 어미의 배를 가르라 했다는 것도 전부, 도저히,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놈은 하급 기사의 종자야. 감히 왕비의 침전에는 들여선 안 될.”

“난 그라타의 천둥벌거숭이였어요. 당신은 사막의 투로였고요. 울퍼는 벙어리 노예였어요. 그렇게 치면 우리 중 누구도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어요.”

릴리는 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진심을 담아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이어 갔다.

“그저 아이예요, 칼. 부모를 잃고 홀로 남아 연약한 몸으로 기사의 옷을 빨고 장작을 패고 그 커다랗고 무거운 갑옷을 온종일 이고 지고 나르는 그저 가엽고 야윈 아이일 뿐이라고요.”

그러나 카르낙의 눈매는 경계와 의심으로 날카롭기만 하여 마치 그녀를 조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놈은 당신의 눈에 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거야.”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네 동정심을 사서 가까워지려 했겠지.”

“칼.”

릴리는 제 이마를 짚었다. 말도 안 되는 확대 해석이다. 그러나 카르낙은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상상은 더 집요해졌다.

“네 옆에 달라붙어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야.”

그래. 그놈은 기회를 엿보는 거야.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노리는 거다. 거윈은 놈을 다스리지 못한 거야. 그 지독하고 끈질긴 코르넬리오의 핏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게 분명했다.

릴리는 제자리를 맴돌며 불안과 조급증에 시달리는 카르낙에게 물었다.

“무슨 기회요?”

“…….”

“대체 무슨 기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

카르낙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늘 여기였다. 늘 이 지점에서 멈추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침묵 뒤의 점멸. 그 깜깜하고 암담한 어둠의 시작점. 그러나 릴리는 다시 남편과 제자리걸음을 하며 속앓이를 할 생각이 없었다.

“…다시 모웨나로 돌아갈 기회요?”

갑자기 벼락이라도 친 듯, 카르낙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누가.”

누가 파니릴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가 묻고 싶었다. 어떻게 구스가 코르넬리오의 장자임을 알게 되었는지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