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왕비 전하께서는….”
“아직 기침하지 않았다.”
야릇한 옷을 입은 시녀 하나가 와 카르낙의 앞에 향이 좋은 차를 내려놓았다. 깊게 파인 네크라인 안으로 새하얀 젖무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시선이 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메이라라는 아이입니다. 이제 갓 성년이 되었지요”
고프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왕의 의중을 읽은 것이라 자신했다. 사내란 모름지기 잘 여문 계집 앞에서는 똑같기 마련이지.
여종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고 카르낙은 태연하게 잔을 집어 들며 무심히 일침했다.
“묻지 않았는데.”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를 구한다고 하면서도 낯빛은 여유로웠다. 왕을 구워삶을 방도를 얻었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고프리.”
“예, 폐하.”
“너는 울퍼의 시종이면서 주인보다 더 말이 많구나.”
그러자 고프리는 껄껄 웃었다.
“그거야 제가 울퍼 님의 입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네가 울퍼를 돼지처럼 사육하는 것이 아니고?”
“…….”
고프리는 당황하여 재깍 울퍼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우적우적 고기를 씹어 먹으며 제 곁에 선 시종의 엉덩이를 도닥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프리는 말을 더듬더듬 읍소하기 시작했다.
“그, 그런.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행여 울퍼 님이 곡해할까 걱정됩니다. 제가 어떻게, 어떻게 폐하께서 선택하신 봉신에게 그런…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집어치워라, 고프리. 그런 입에 발린 말은 엘버그 놈들에게나 통한다.”
카르낙은 지루하다는 듯 냅킨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고프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혼이 나는 사내아이처럼 고개까지 푹 숙였다. 잘못을 들켜 버린 것이다.
“울퍼 같은 머저리에겐 뱀같이 교활한 시종이 필요하지. 가령 너 같은.”
칭찬인가, 욕인가. 감사하다 해야 하는가, 아니면 죄송하다 해야 하는가.
“하지만 난 그런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내 주위에 진력이 날 정도로 많은 까닭이지.”
확실히 칭찬은 아니다. 감사해야 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과해야 할 일도 아니나 고프리를 위축시키기엔 충분했다. 협박인지, 비난인지 모를 것을 가차 없이 내뱉는 카르낙의 말투와 태도에 그는 그대로 압살당할 것 같았다.
“만일 울퍼가 뒈져도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멀루아는 울퍼의 것이다. 그러니 그를 잘 보필해. 설령 그가 송장일지라도 넌 매일 그의 아래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고프리는 절대로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을 거라는 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국왕 내외의 침실에 왕비를 위한 늦은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파니릴리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넘기며 시종이 협탁 위에 내려놓은 은쟁반을 살폈다. 질 좋은 고기를 다져 넣은 파이와 신선한 자두, 라임을 넣어 만든 음료가 함께 나왔다.
“구스에게 먹을거리를 챙겨 줬나요?”
“예. 전하. 아침 일찍 주방 시녀를 통해 쿠키와 푸딩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릴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먹은 파이의 양은 채 절반이 되지 않았고 우묵한 그릇 가득 담아 놓은 자두도 한두 개만 손을 댔을 뿐이었다.
울퍼의 명으로 릴리의 시중을 담당해야 하는 시녀는 그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왕비 전하는 멀루아에 온 이래 한 번도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산해진미로 풍성하게 차리는데도 그녀는 대부분의 음식을 남겼다. 주인이 먹다 남긴 음식은 그 시종들에게 맛 좋은 별미가 되지만 그 한편에는 주인이 만족할 만한 음식을 내가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고는 했다.
“왕비 전하. 혹여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는지요?”
“아니요. 아주 맛있어요. 다만 제가 입이 좀 짧을 뿐이에요.”
늘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음식을 줄이고 또 줄였는데도 여전히 새 모이만큼만 먹는다. 아무래도 그녀가 그릇을 비우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울퍼가 한입에 해치울 정도의 양만 내놓아야 할 것 같았다.
“이건 구스를 위해 남겨 두어야겠네요.”
릴리가 자두가 담긴 그릇을 쟁반 위에서 빼놓았다.
“아이에게는 아침에 양껏 챙겨 주었습니다.”
“성장기잖아요.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을수록 좋을 거예요.”
좋은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엘버그에 몇이나 있겠는가.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소수의 아이들이나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겨우 근위대 기사의 종자.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작고 어려 안쓰러워 보일 때도 있지만 일찌감치 일자리를 구해 배곯지 않고 유년 시절을 보내는 것이 어디인가. 그 아이는 차라리 운이 좋다 해야 할 것이다.
그마저도 구하지 못해 굻고 사는 아이들이 이 멀루아 안에 수두룩하다. 거기에 어떻게 왕비의 눈에 들어 감히 이 성안의 누구도 먹지 못하는 진귀한 음식을 마음껏 먹으니 이렇게 호사스러운 일자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외람되오나 전하, 아랫것에게 너무 많이 베풀진 마십시오. 버릇이 나빠져 종국엔 자신이 주인 머리 위에 있다 생각할 것입니다.”
말투에 진심 어린 염려가 배어 있었다.
“조언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잖아요.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할 때인데 기댈 곳 하나 없이 혼자 고된 일을 하는 것이 안쓰러워서요.”
“형편이 되지 않는 집들은 아이를 위해 일찍 종살이를 시킵니다. 가능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을 원하지요 그러면 최소한 아이가 배곯아 죽을 일은 없으니까요.”
저런, 하고 릴리가 혀를 찼다.
“슬픈 이야기네요. 이게 다 왕가의 책임이에요. 왕실이 임명한 영주들의 문제고요.”
미친 왕으로부터 내려온 불행이다. 그 미친 왕은 자신의 아비이니 결국 그 책임은 오롯이 그의 핏줄인 자신의 것이라고. 릴리는 그렇게 믿었다.
“모두에게 미안해요. 아둔한 왕가의 잘못으로 짊어지지 않아도 될 고통까지 짊어지게 했어요.”
시녀는 손사래를 쳤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왕비 전하! 왕비 전하께서 성의 저장고를 개방하신 덕분에 모두가 진귀한 재료를 넉넉히 챙겼습니다. 당분간 건강하고 신선한 식재료로 연명하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히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거고요. 그 모든 것이 전하의 은덕입니다. 이 멀루아의 모든 이들이 왕비 전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굶주림과 질병에 피부가 까맣게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봤어요. 그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잖아요.”
“그러나 왕비 전하꼐서 나서지 않으셨다면 멀루아의 사람들은 머지않아 굶주림으로 죽어 갔을거예요. 울퍼 님은 왕비 전하만큼 자비롭지 않으시니까요. 아마 음식들이 썩어 들어가더라도 절대 창고 문을 열어 나누어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멀루아의 은인이십니다. 그것으로도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는 칭송받아 마땅하십니다.”
가만히 시녀의 말을 듣던 릴리는 문뜩 묻고 싶어졌다. 내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던 울퍼에 대한 궁금증을 확인하고 싶었다.
“울퍼는 어떤 주인인가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방 안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릴리는 삽시간에 싸늘해진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자가 성안의 여종들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는 알고 있어요. 당신들을 보는 눈과 나를 보는 눈이 그다지 다르지 않거든요.”
담당 시녀가 고개를 저으며 급히 입을 열었다.
“감히 어떻게 저희 같은 아랫것들과 왕비 전하가 같으실 수 있겠습니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인걸요. 그는 모든 여자를 그저 배출구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사생아가 많은 거겠지요. 게다가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영지민도 스스럼없이 팔아넘긴다고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에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요. 폐하의 봉신이기에 자제하려고는 하지만 앞으로도 절대 그 남자를 호의적으로 볼 수 없을 거예요.”
그런 자이기에 카르낙이 선택했으리라. 남편은 엘버그의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싶어 한다. 어느 누가 보아도 엘버그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파니릴리 자신이나 에이가 같은 개인에게는 다정하면서도 ‘엘버그인’이라 통칭되는 다수의 사람들에겐 정제되지 않은 증오와 혐오를 표출하고는 한다. 마치 엘버그 대륙에서 엘버그인들을 모두 몰아내려는 것처럼.
그것이 그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일까? 여전히? 울퍼 같은 자가 폭력을 휘두르며 멀루아 땅을 망가뜨려 가고 있는데도, 그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그는 전혀 불편해 보이지가 않는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암묵적인 허용이다. 마음껏 멀루아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좋다는 허락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제 그릇이 그만큼 넓지 못한 탓이겠지요.”
자조하는 목소리가 서글프게 들렸다. 시녀는 지난번 왕비가 울퍼의 뺨을 매섭게 내려친 일이 떠올랐다. 여인에게 그 같은 취급을 받은 적은 처음일 것이다. 모든 여자를 창부처럼 깔보던 사람에겐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은 치욕이리라.
“왕비님의 잘못이 아니십니다. 울퍼 님에 대한 원성은 이미 멀루아 안에 차고 넘치다 못해 성벽 너머까지 파다할 지경이니까요.”
이렇게 된 바에 차라리 왕비 전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자고 결심했다. 왕비 전하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테니.
“몇 번이나 멀루아를 구제해 달라는 서신을 북쪽 성전으로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캘던성으로 보내도 마찬가지였지요. 봉기를 하려던 계획도 몇 번이나 세웠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실패했어요. 영악한 고프리가 귀신같이 알아차려 그 주동자들을 바다 너머로 팔아넘겼거든요.”
시녀는 씁쓸한 얼굴로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이젠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다는 듯, 오직 단념이라는 허망한 감정만이 가득했다.
“결국 전부 와해되었지요. 그래서 다들 희망도 의욕도 없이 고통 속에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멀루아는 망할 거예요. 이미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요. 작물이 모두 병들고 사람들의 피부에 곰팡이가 펴 썩어 간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요. 신의 저주가 아닐까 합니다. 멀루아 땅이 그분께 버림받은 것이지요. 감히 우리같이 보잘것없는 인간들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별수 없지요. 여신님의 뜻을 오롯이 받아 낼 수밖에요.”
“아마네스는 사랑과 자비의 여신이라 들었는데요.”
“물론 그렇지요. 자비로우시기에 지금껏 멀루아를 지켜 주셨을 겁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죄를 저질러 이제 더 이상 아마네스 님의 자비를 바랄 수 없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