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릴리가 핀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가 식은땀을 흘리는 고프리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사실이에요? 고프리?”
대체 울퍼의 수화를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사실이었다. 전쟁 중 수신호를 종종 쓰기도 한다더니 그래서일까. 고프리는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그러니까 그것이… 아시다시피 모래 폭풍으로 영토가 모두… 엉망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다 마무리 짓지도 않았는데 릴리의 매서운 손길이 울퍼의 뺨을 올려붙였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두툼한 그의 뺨이 여지없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새빨간 상흔이 선명했다. 울퍼는 당황한 채 제 뺨을 부여잡았고, 릴리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서슬이 시퍼런 눈동자로 그를 쏘아보았다.
“어떻게 영주가, 제 뱃가죽에 기름칠하자고 영지민을 팔아넘길 수가 있어요!”
때리실 때는 제가 머리통을 잡고 있기로 했잖습니까, 전하. 그러니 이렇게 일을 벌일 때는 사전에 언질을 주셔야죠. 이렇게 대뜸 일을 저지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핀은 아쉬움과 곤란함에 입맛을 다셨다.
“저… 전하… 이, 이게… 무….”
새하얗게 질린 고프리가 덜덜 떨며 제 주인의 곁에 다가가려 하자 핀이 그를 가로막았다.
“물러서, 고프리. 네가 감히 끼어들 일이 아니다.”
게다가 네 주인 놈은 몇 대 더 맞아도 쌀 만큼 병신 같고.
릴리는 ‘후우’ 하고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제 앞섶을 쓸며 화를 진정시키더니 다시 태연자약하고도 거만한 낯빛으로 되돌아갔다.
“이것들은 모두, 모두 울퍼 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함부로 개방해 버리시면….”
“함부로?”
핀은 제 심기를 건드린 표현을 되짚었다. 고프리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지금 왕비 전하에게 ‘함부로’라 그 세 치 혀를 놀렸느냐?”
“…그, 그것이 아니라, 마땅히 이 성안에 규칙과 절차가 있는데….”
“왕비 전하이시다. 너와 네 주인은 발투만 왕가에 복속된 종으로, 또한 왕비 전하의 종이기도 하다. 이 저장고는 네 주인의 저장고이기 이전에 왕비 전하의 저장고야.”
“…….”
막무가내에 제대로 말도 통하지 않는다. 고프리는 저대로 저장고가 털리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그는 망연자실하게 바닥에 주저앉은 울퍼 대신 국왕에게 읍소하기 위해 몸을 돌려 걸음을 서둘렀다.
카르낙은 그 시간 값비싼 과일주를 마시며 캘던에서 온 서신들을 읽고 있었다. 대부분이 에이가에게서 온 것이고, 개중 몇 개는 다른 지역의 영주들이 보냈으며. 또 하나는 이제 곧 대관식을 치를 차기 에나 베오르토에게서 온 것이었다.
카르낙은 책상 위에 두 발을 포개 얹고, 그 위에 얹어 놓은 검을 중간중간 부드러운 벨벳 천으로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베오르토로부터 온 초대장을 막 펼치려던 찰나, 이렇다 할 기척도 없이 벌컥 방문이 열렸다. 그러곤 사색이 된 고프리가 꼭 발에 걸려 넘어진 듯 철퍼덕 바닥에 엎어졌다. 그만큼 여유 없고 초조한 움직임이었다.
“폐하! 제발 왕비 전하를 좀 말려 주십시오!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뭐야? 릴리를? 카르낙이 미간을 구겼다.
“왕비가 왜?”
“왕비 전하께서, 전하께서는 지금 멀루아성의 식료품 저장고를 개방하여 그것을 성 밖에 내다 버리고 계십니다.”
“…….”
“그것들은 모두 이 멀루아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진귀한 것들로, 그중엔 울퍼 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귀한 열매들도 있어 이렇게 길에 내다 버리면 두 번 다시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들입니다. 게다가 그 안에는 폐하께 드리려 아껴 두었던 것들도 잔뜩 있어 이대로 두면 폐하께서 멀루아를 떠나실 때 빈 상자로 떠나시게 됩니다.”
고프리가 길고 긴 호소를 마쳤다. 카르낙은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짧게 물었다.
“…그런데? 그래서 뭐가 어쨌단 거지?”
고프리는 바닥에 처박았던 고개를 휙 쳐들었다. 그래서 뭐가 어쨌냐고? 방금 그렇게 말씀하신 건가?
“…예?”
“왕비가 식품 창고를 개방했는데,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야?”
“…그러니까, 부디 폐하께서 왕비 전하를 좀 말려 주십사….”
“왜?”
“…예?”
“내가 왜 그걸 말려야 하는데?”
“…그것은… 당연히.”
“내 병사들은 딱딱한 밀 빵에 귀리죽으로도 몇 날 며칠을 버틸 수 있다. 그러니 진귀한 식품 따위는 필요 없어.”
“하지만 폐하… 왕비 전하께서는 지금… 정도를 벗어나셨습니다. 심지어 전하를 진정시키려던 울퍼 님의 뺨을 치셨습니다.”
“…파니릴리가? 파니릴리가 울퍼를 쳤단 말이냐?”
“예, 폐하. 어찌나 세게 내리치셨는지….”
하하하하하! 하고 카르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바람에 고프리는 이야기를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채 넋을 잃었다.
맞아 봐서 알지. 어찌나 매서운지 볼이 불에 댄 듯 화끈거렸더랬다. 심지어 어금니가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손가락으로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라타에서 산자락을 타고 다녔다더니 팔 힘은 웬만한 장정 못지않은 듯 했다.
“내가 그걸 봤어야 했는데….”
쯧, 하고 카르낙이 혀를 찼다. 유쾌한 빛이 만연했다.
“좋은 구경을 놓쳤군.”
하긴. 이제 파니릴리에게 뺨을 맞은 사내는 저뿐만이 아니잖아. 그건 조금 아쉬운 걸. 뭐든 유이한 사내가 되고 싶은데.
“폐하. 저에게는 엄중하고 시급한 사안입니다. 부디 비전하를 말려 주십시오. 이렇게 간곡하게 청합니다.”
“고프리.”
카르낙이 광택이 흐르는 검의 칼등을 매만지며 침착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폐하.”
“내가 울퍼에게 영지를 하사한 이래, 한 번이라도 네놈들의 폭정에 상관한 일이 있던가?”
폭정. 분며 카르낙은 그렇게 말했다. ‘폭정’ 이라고. 설마 그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 몰랐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건가. 국왕은 전장을 뛰어다니느라 다른 영지에 관해선 영 무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것에 관심을 쏟기에 왕은 비루한 투로가 아니던가. 그만한 그릇을 가졌을리 없다 자신했던 것이다. 마치 그런 고프리의 생각을 잃었다는 듯 카르낙이 말을 이었다.
“내가 영 무지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캘던성으로 네놈들의 행실을 성토하는 서신은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날아오거든.”
“…….”
“그럼에도.”
카르낙은 칼을 치켜들었다. 잘 벼린 칼날을 따라 섬광이 일었다.
“난 상관하지 않는단 말씀이야. 네놈들이 이 땅과 영지민을 볶아 먹든 솎아 먹든 쥐어짜 말려 먹든, 그 무엇도.”
“…….”
“그것과 마찬가지로 내 비가 네놈들의 창고를 털어 재끼든 아니면 불을 질러 다 태우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의 아내이자 엘버그의 왕비이고 네놈들의 주인이니 그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지.”
“…….”
“그러니 내 대답은 그녀를 내버려 두란 거야, 고프리. 그것으로 그녀가 만족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내놓아야 할 거다. 그게 내가 바라는 네놈들의 충심이지.”
“…….”
“알아듣겠나?”
카르낙의 독촉에 고프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예, 폐하. 뜻하신 대로 행하겠습니다.”
결국 울퍼와 고프리는 파니릴리가 제 음식 창고를 거덜 내는 꼴을 꼼짝없이 지켜봐야 했다. 성문 근처에 영지민들이 단 냄새를 맡은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귀한 식재료들을 갖고 달아나는 것 역시 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놈들은 울퍼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오로지 파니릴리, 카르낙 발투만 왕의 아내만을 찬양하였다. 아마네스 님의 가호가 있기를, 상냥하신 발투만 왕비께 신의 축복을. 성벽 위에서 그 꼴을 지켜보던 울퍼가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며 제 가슴을 두드렸다.
“진정하십시오, 울퍼 님.”
고프리가 굳은 낯빛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주인을 달랬다. 그러나 그는 더 난폭하게 손을 휘둘렀다.
‘가만두지 않겠어! 그 백발 마녀! 내 음식들을 가져다가 저런 시궁창 쓰레기들에게 나눠 주다니! 지가 무슨 성녀라도 되는 줄 알아! 운 좋게 카르낙 발투만과 결혼해 왕비 나부랭이가 된 주제에! 만약 그 년이 멀루아 땅에 있었다면 진즉 내 아래에서 살려 달라고 빌다가 노예로 팔려 나갔을 거야! 다른 엘버그 년들과 마찬가지로!’
고프리는 주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기어스 가문의 단 하나 남은 핏줄입니다. 그 존재만으로도 엘버그인들의 신망이 상당히 두텁지요.”
그렇기에 카르낙 발투만도 그녀와 결혼을 한 것이다. 지리멸렬한 탁상공론을 끝내고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갖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으리라. 그리고 지금은…
“카르낙 발투만이 그 알기어스의 핏줄에게 푹 빠져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왕이 그녀의 뒤에 버티고 있는 이상 감히 그녀를 해코지할 수는 없어요.”
그랬다간 뼈도 추리지 못하리라. 고프리가 고개를 저어 보이자 울퍼가 다시 손을 휘둘렀다.
‘저년이 두 번 다시 내 영지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해! 내 것을 제 맘대로 훔쳐 간 것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르도록 할 거야!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조심해야 합니다, 울퍼 님. 상대는 카르낙 발투만이에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만큼 비범한 자입니다. 그러니 신중해야 해요. 저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울퍼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프리의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해 조급할 지경이었다.
“모두가 자비롭고 선하다 칭송해 마지않으니 정말로 본인이 성인이 된 것 같겠지만 현실은 발투만가의 왕비이지요. 잔인하고 비정한 카르낙 발투만의 처. 그러니 자신의 처지를 좀 알게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녀가 되기엔 남편이 저지른 짓이 차고 넘쳐서 말입니다.”
그때도 과연 지금처럼 당당하게 선의를 행한다며 나설 수 있을까? 부끄럼 한 점 없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 있을까? 만일 파니릴리 발투만이 제 남편의 과거까지 끌어안고 감내할 수 있다면 둘은 그야말로 끈끈한 부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맞는 짝이 되겠지.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파니릴리가 제 남편의 잔인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결국 둘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면 파니릴리는 끈 떨어진 신세가 되는 거다. 카르낙 발투만이 없다면 그저 흔하디흔한 엘버그의 계집에 불과할 테니 지금의 치욕은 그때 갚아 주면 된다. 만약 잘못된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적으로 이 문제는 왕과 왕비의 문제가 될 테니 말이다.
다음 날 구스는 거윈의 세탁물을 찾으러 아침 일찍 성의 주방을 찾았다. 주방을 지나 쪽문으로 나가면 빼곡하게 세워진 빨랫줄 위에 길고 긴 성의 세탁물들이 연신 널렸다가 거두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안에 거윈의 옷이 함께 널려 있었다. 구스는 주인의 옷을 잘 개어 품에 안고 전날 시종에게 기워 달라고 부탁한 그의 양말을 찾아 막 주방을 벗어나고 있었다.
“얘!”
누군가 느닷없이 구스의 등을 퍽 쳤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 세탁물을 바닥에 떨구었다. 그래 놓고는 당황하여 ‘앗’ 소리를 내며 서둘러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놀라긴, 사내 녀석이 새가슴이구나. 네 이름이 혹시 구스니?”
여자는 두툼한 제 허리를 양손으로 짚고 서서 혼비백산한 구스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웬만한 일에는 인이 박인 듯, 여자의 목소리와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묻잖니. 네가 구스냐고! 혹시 너도 귀머거리야?”
구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
여자는 선반 위에서 천 뭉치를 하나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받아. 푸딩과 쿠키야. 왕비 전하께서 당신 몫의 디저트를 네게 주라 하셨다.”
“…….”
“뭐 해? 받으렴.”
그러나 구스는 쉽사리 손을 내밀지 못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당신을 찾아오라 하셨지만 설마… 당신의 몫을 저를 위해 남겨 두실 거라 상상도 해 보지 못한 탓이었다. 혹여 제가 큰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그저 당신께서 먹다 물린 부스러기 몇 점. 자신이 생각했던 것은 겨우 그 정도인데.
도저히 받을 생각을 않자 여자는 눈을 굴리며 구스의 세탁물 위에 천 뭉치를 턱 하니 올렸다.
“어쨌든 난 전한 거다. 나중에 전하께서 여쭤보실 때 다른 말이나 말렴.”
그러고 난 후 여자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구스는 두 눈만 깜빡이다 중얼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너무 뒤늦은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