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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18화 (118/231)

118화

생각했던 대로 마을은 스산했다. 성벽에 걸린 반란자들의 시체들은 카르낙의 명을 받아 말끔히 치웠지만, 벽면을 타고 흘러내린 핏자국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핀이 황량한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네요.”

“울퍼가 두려운 탓이겠죠.”

그렇게 답하고 릴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경작되지 않아 돌과 잡초가 드문드문 나 있는 빈 농지들, 그 끝에 거의 다 부서진 울타리와 어딘가는 꼭 허물어져 있는 나무 집들이 보였다. 분명 이제 곧 아침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일 터인데 그 어느 집의 굴뚝에서도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다. 빈집일 수도, 그것이 아니면 불을 때 요리할 음식이 없는 것일수도 있었다. 무엇이 되었건 멀루아의 사정에 득이 될 만한 것은 아니리라.

“여러 악취를 맡아 봤지만… 이건 정말 지독하네요.”

시체 썩는 냄새에 이골이 난 핀조차 제 코를 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성에서 벗어나 농지로 다가갈수록 냄새는 더 지독해져 걸음을 떼기조차 버거웠다.

“이걸 좀 봐요. 핀.”

그는 릴리를 따라 황량한 경작지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흙이 모두 새까만 빛을 띠었다.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도 개의치 않고 릴리가 손으로 흙을 짚었다. 손에 닿은 흙은 재 가루를 개어 놓은 듯 질척했다. 논에 물을 대 곡식을 키우는 모습은 그라타에 있을 적에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그 논에선 이런 지독한 악취가 나지 않았다. 생명을 품은 흙내음이 가득했다 그러니 이것은 습기를 머금고 있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기분 나쁘고 불결한 무언가였다. 핀은 미끄덩한 덩어리가 릴리의 손을 타고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해 얼굴을 찌푸렸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릴리가 말했다.

“죽은 땅이에요.”

죽은 땅?

“…흙이 죽을 수도 있습니까? 사람이나 동물처럼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세상의 모든 것엔 생명이 있대요. 바람도 비도 눈도 심지어 이 흙조차도. 생명이 있으니 씨앗을 품고, 그것을 틔워 열매를 맺는 것이라 들었어요. 하지만 이 땅은 아무것도 못 품어요. 무엇이든 죽이기만 할 거예요.”

핀은 선뜻 릴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좁쌀만 한 모래 알갱이들뿐이잖은가. 그렇지만 릴리의 말이 영 터무니없이 들리지는 않았다. 특히나 시커멓게 변해 악취를 풍기는 흙을 제 눈으로 보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적어도 이런 일에 관한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영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리라.

울퍼는 알까. 자신의 영지가 썩어 가고 있다는 걸? 아니. 그놈이 알 리가 없지. 멍청한 놈이니 설령 누군가 말해 주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릴리가 바삐 다른 경작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의 흙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음 경작지도, 또 그다음 경작지도 그랬다. 그쯤 되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의문이 생겼다.

“…대체 울퍼 놈은 그 많은 음식들을 어디서 가져왔답니까.”

성에 차고 넘치는 그 풍성한 음식들 말이다. 온갖 산해진미들. 울퍼의 배를 불리다 못해 뒤룩뒤룩 살찌게 만든 그 수많은 고기와 채소, 다디단 과일과 열매들.

“…몰라요. 모르겠어요….”

릴리는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해를 등진 새까만 그림자가 다가왔다.

핀은 릴리의 등 뒤를 막으며 곧바로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검집을 빠져나온 검 끝은 정확히 목표물을 향했다.

“누구냐.”

핀이 물었다.

“…부… 부디….”

나이를 알 수 없는 작고 구부정한 여자였다. 영양이 부족해서인지 다갈색 머리는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피부의 여기저기엔 반점 같은 것이 있어 얼룩덜룩했다. 분명 새하얗고 부드러웠을 여인의 피부는 거칠게 갈라지고 주름이 져 있었다. 고통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기운을 잃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프고 음정이 불안정했다. 그녀는 낡고 닳아 해진 모포 속에서 갓난아이를 꺼냈다.

“…부디… 추… 축복을….”

핀은 곧바로 칼을 물렸다. 상대는 왕비를 해코지할 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부디… 제 아이에게 축복을 내려 주세요. 한 번만 아기의 얼굴을 만져 주십시오.”

“아….”

릴리는 안타까운 신음 소리를 냈다. 아이의 얼굴에도 무엇인지 모를 반점이 가득했다.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고만 있었다. 그대로 두면 하룻밤도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핀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전하. 역병일지도 몰라요.”

그는 물러날 뜻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여자는 울먹이며 더 간곡히 빌기 시작했다.

“부디, 부디 한 번만…. 그저 아주 잠시만이라도… 제 아기를 살려 주십시오, 전하. 하나 남은… 하나 남은 제 아이입니다. 이제나저제나… 전하를 뵙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부디… 아마네스 여신님의 축복을… 부디 기적을 행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자신에겐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힘 따위는 없다. 그저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일 뿐. 아마네스 여신의 기적 같은 건 없어. 자신이 이어받았다는 그 혈통조차 제대로 믿지 않는걸.

“멀루아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피부에 반점이 있나요?”

릴리가 묻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요?”

“…올… 봄부터… 조금씩….”

“이 반점이 생기고 나서 죽은 이들은요?”

그러자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지만… 대부분 굶거나… 병사들에게….”

그녀는 핀의 눈치를 보며 아이를 바짝 끌어안았다.

“병사들에게 죽임을….”

릴리는 손가락에서 금으로 된 가락지를 빼 여인에게 건넸다. 핀은 제 마른 입술만 씹다 불쑥 내밀어진 손바닥 위의 물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릴리를 휙 돌아보았다.

“받아요. 신의 은총보다는 이것이 더 필요할 거예요.”

“…….”

왕비가 아니었다면 미쳤느냐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이도, 그것을 받아야 하는 이도 당황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가운데 그것을 주는 이만은 침착하다 못해 고요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될진 모르지만 그것으로 먹을 것을 구하세요. 가능한 한 많이요. 젖먹이에게 필요한 건 신의 은총이 아니라 엄마예요. 잘 먹고 나면 아이에게 먹일 젖이 돌 거예요. 그러니 받아요. 아기를 살리고 싶다면요.”

“…….”

여인은 머뭇거리다 그녀의 앞에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릴리는 그 위에 반지를 얹어 주고, 그녀의 손을 힘껏 오므려 주었다. 뜻밖의 접촉에 ‘헉’ 소리를 내며 여인이 움찔 몸을 떨었다.

“도울 방법을 찾아볼게요.”

어떻게 해서든.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볼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의 자비로우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인은 감격하여 울먹였다. 그리고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를 다시 강보에 싸서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얼마 정도 거리를 벌린 후에는 도망가듯 달음박질했다. 한시라도 빨리 먹을 것을 구하고 싶었으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치장하는 건데. 목걸이도 귀걸이도 하고 나왔다면 그것을 다 나누어 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일회성의 소모적인 친절일 뿐이다.

“…성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소문을 듣고 영지민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어 전하를 약탈해 갈지도 모르니까요.”

“…저 여자를 좀 봐요.”

핀의 조바심에 릴리는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해 노쇠한 늙은이나 다름없는데 무슨 힘이 있어 감히 폭동을 일으킨단 말이죠?”

“사람이나 짐승이나 굶주릴수록 더 난폭해지는 법이랍니다.”

“몸의 반점은 곰팡이예요, 핀.”

“...곰팡이요?”

“잘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면 생겨요. 그라타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죠.”

주로 범죄를 저지르고 그라타로 도망 온 카스티 제도의 범법자들이었다. 미로 같은 그라타의 숲에 숨으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대신 굶어 죽기도 쉬웠다. 몇 날 며칠을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아사한 시체를 발견하면 그중 몇은 저런 곰팡이균이 피어 있고는 했다.

먹지도, 제대로 씻지도 못하면 생기는 균. 종국엔 온몸으로 번져 결국 어느 한 곳에서부터 괴사하여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다고 부르테가 알려 주곤 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치료한다면 말끔히 나아 사라질 병.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래고 몸을 깨끗이 하며 볕에 잘 말린 이부자리에서 자기만 해도 씻은 듯이 나을 병이었다.

멀루아의 모든 이들에게 저런 반점이 있다 하니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한지 보지 않아도 그릴 수 있었다. 어둡고 좁고 습하고 더러운 곳에 옹기종기 모여 쥐와 그 배설물들과 섞여 살고 있을 것이다. 주린 배를 껴안고서 말이다. 그 바로 앞의 다리 하나만 지나면 나오는 영주의 성안에는 온갖 종류의 사치품과 음식과 술이 차고 넘치는데.

“돌아가시죠, 전하. 더는 특별할 게 없어 보입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핀.”

“네, 하문하십시오.”

“내가 울퍼의 그 번들거리는 머리통을 때리겠다면 날 말릴 건가요?”

“아니요. 전하를 위해 놈의 머리를 아주 잘 잡고 있어 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노략질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몇 명이나 필요하십니까? 제가 쓸모 있는 장정들을 좀 압니다.”

“좋아요.”

릴리는 전투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를 뒤따르는 핀의 걸음걸이는 경쾌했다. 지금껏 릴리와 함께 있었던 순간 중 가장 가벼운 발걸음일 것이다.

파니릴리는 성채에 들어서자마자 핀이 소집한 장정들과 함께 식량 창고로 향했다. 도개교와 성문은 왕비의 명대로 개방된 상태였고 ,장정들은 제 몸집만 한 자루에 가득히 식량을 넣어 성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고프리를 거쳐 울퍼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개미들처럼 줄지어 성 밖으로 곡식을 실어 나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울퍼는 고프리를 달고, 사치스럽게 질질 끌리는 블리오 자락을 움켜쥐고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는 붉게 물든 얼굴로 손짓을 해 가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고프리는 숨도 제대로 거르지 못하고, 그의 말을 통역하느라 애썼다.

“헉, 헉, 이, 이게, 헉 이게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헉 무, 물으십니다.”

“어서 와요, 울퍼.”

핀의 옆에 서서 미소 짓는 릴리의 얼굴은 태연자약했다. 마치 이 성이 자신의 것처럼. 하기야 따지고 보면 그녀의 것이 맞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대범한 짓도 저지르는 것 아니겠는가.

“창고에 먹을 것이 미어터지기에 제가 개방했어요. 그대로 두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아서요.”

또박또박, 차근차근 발음하는 릴리의 입 모양을 보는 울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포악스럽게 손을 휘둘러 댔다. 화가 나 욕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나 굳이 그 내용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이것은 모두, 모두 진귀한 식재료들로… 우, 울퍼 님께서 아끼시는….”

“안 그래도 궁금했어요. 대체 이 식재료들은 어떻게 구한 건가요? 멀루아 땅에서 나긴 힘든 작물들 같은데 말이에요.”

그러자 울퍼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손을 휘둘렀다. 손바닥을 탁탁 치고, 제 목이 졸리는 시늉을 하고, 성벽을 가리켰다가 다시 손을 탁탁 쳤다. 무언가를 상징하는 모양을 손으로 만들어 보인 뒤 다시 밖을 가리키고,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는 등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제스처를 뚱하게 쳐다보고 있던 핀이 미간을 좁히며 고프리에게 물었다.

“팔았어? 영지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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