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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17화 (117/231)

117화

“거윈 님의 종자가 되지 않으면 죽을 거라 하셨어요.”

릴리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주어도 술어도 모두 빠져 있는 비문을 듣는 듯하였다.

“누가? 누가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거윈 님이요. 제가 거윈 님을 거절하면 폐하께서 절 죽일 거라고 하셨어요.”

“…….”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쿠키를 먹느라 오물거리는 구스의 작은 입을 주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칼이? 근위병의 종자를 대체 무슨 이유로?

이제 겨우 아홉 살인 아이. 처음부터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할 나이다. 릴리는 차근차근 물었다.

“폐하께서 왜 널 죽이려 하시는데?”

“제가 살아 있으면 이긴 게 아니래요. 전쟁에서요.”

“…널 죽여야 전쟁에서 이긴 것이 된다고?”

“네. 엄마도 아빠도 저도 없어야 한대요.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거윈 님이 폐하를 설득하셨대요. 저를 종자로 쓰고 싶다고요. 그래서 종자가 되었어요. 안 그러면 죽어야 한대서.”

“…….”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잘하면 평생 배곯는 일 없이 살 수 있대요. 거윈 님이 평생 거두어 주신다고 했어요. 그러니 저는 거윈 님의 말씀을 잘 따라야 해요.”

죽기는 싫거든요. 구스가 뒷말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릴리는 음울한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물었다.

“…구스, 네 고향이 어디야?”

“모웨나요.”

모웨나. 자신이 캘던성 탑에 갇혀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을 동안 카르낙 발투만이 함락시켰던 수많은 도시 중 하나.

“혹시… 네 성이 ‘코르넬리오’니?”

그러자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도리질을 했다. 슬픔이 가득한 눈망울이 금세라도 바닥으로 떨어져 깨질 것처럼 연약하였다.

“말하면 안 된다 하셨어요. 아무도 몰라야 한다고 하셨어요.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안 그러면 전 죽을 거래요. 저보고 잊으라고 하셨어요. 완전히 지워 버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네? 절대,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마세요? 약속해 주실 거죠?”

“물론이야, 구스.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마. 맹세할게. 그러니 걱정 마.”

릴리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이를 달랬다. 전쟁에 대해서는 익히 보고 들어 알고 있다. 멀리서 관망하자면 그것은 참으로 쉽고 간단했다. 침략하고 차지하고 깃발을 꽂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된다.

그러나 그로 인해 파생되는 비극은 너무나 크고 참담하며 복잡하였다. 이제 겨우 아홉 해를 산 구스를 봐도 알 수 있다.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한순간에 양친을 모두 잃고, 그것도 모자라 단지 살기 위해 제 부모를 죽인 자 밑에서 종살이를 해야 하는가.

전쟁이 없었다면 구스가 부모를 잃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엘버그인들이 투로들을 학대하지 않았다면 카르낙이 분노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알기어스 왕이 어질고 현명한 왕이었다면 엘버그를 이토록 불공평하고 기형적인 나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쯤에서 릴리는 길을 잃었다. 모든 것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고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그것을 고민한다고 해답을 찾을 수는 있을지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구스. 혹시나 맛있는 것을 또 먹고 싶다면 나를 찾아오렴.”

“…….”

아이는 미심쩍은 눈길로 릴리를 올려다보았다. 구김살 없이 맑고 순수했을 아이는 이제 호의를 의심할 줄 알게 되었다. 다만 그것이 성장인지, 아니면 죽음에서 야기된 상흔인지 단정 짓기에는 너무 일렀다.

“난 아이들을 좋아하거든. 그러니 언제든 찾아오렴.”

구스는 제 손에 들린 쿠키 조각을 쳐다보았다. 거윈 님도 종종 맛있는 것들을 쥐여 주시고는 한다. 하지만… 확실히 왕비님이 주는 것들이 훨씬 맛있었다. 예쁜 모양의 쿠키, 달콤한 초콜릿. 그 외에도 먹고 싶은 것은 정말 많았다. 모웨나에서 자주 먹었던 푸딩, 예쁘게 모양을 낸 레몬 케이크, 설탕 과자, 우유와 값비싼 얼음을 갈아 만든 아이스크림.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왕비님을 찾아가면 그런 것들을 먹을 수 있을까?

“…정말 언제든…언제든 가도 되나요?”

릴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지.”

“…푸… 푸딩… 푸딩을 먹을 수 있을까요?”

“음….”

릴리는 생각을 하느라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대답했다.

“이 성의 주방에서 만들 수 있다면 당연히 먹을 수 있지. 하지만 만약 만들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걱정 마, 구스. 캘던에 돌아가서라도 꼭 먹게 해 줄게.”

“…….”

이유 없이 저에게 친절을 베풀던 이들은 모웨나에서 모두 죽었다. 엄마, 유모, 저를 작은 주인님이라 부르던 상냥한 시종들. 홀로 살아남아 모웨나를 떠나올 때 그는 많은 것들을 버렸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버려야만 했다. 아이다운 천진함. 아이여서 부릴 수 있었던 어리광. 마음껏 뛰어놀거나 아무 때나 누워 뒹굴뒹굴하거나 혹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사치 따위의 것.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져 구스는 제 발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강해져야 한다고. 살기 위해서는 이런 감정 따위 꾹 눌러 삼켜야 한다고, 그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핀은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 층계를 뛰듯이 내려가 질척한 흙바닥을 지날 때쯤엔 미간에 주름까지 잡혀 있었다. 그는 성문 앞에 선 릴리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서서 그녀를 불렀다.

“왕비 전하.”

성문을 지키는 보초들은 모두 곤란한 낯빛을 하고 있다가 더듬더듬 핀에게 상황을 고했다.

“성 밖은 위험하여 문을 내릴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계속… 고집을 피우셔서….”

“전하.”

핀이 점잖게 릴리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단 것을 릴리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

“성안이 갑갑해서 그래요.”

“…하게너의 영지에서는 잘 계셨지 않습니까.”

“거긴 갑갑하지 않았거든요. 성안에도 볼 것이 많았고요.”

눈요기할 것이 많은 거로 치자면 멀루아를 따라올 수가 없었다. 온갖 진귀한 장식품에 요리에 식물에 하물며 양탄자까지. 눈이 가는 곳엔 모두 값비싼 것들뿐이지 않은가.

“내가, 내 나라의 땅을 거닐겠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릴리가 고집을 부렸다. 보초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난처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전하, 성 밖은 너무 위험합니다. 얼마 전까지 폭동이 있어 성벽에 시체를 걸어 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저희는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그래서 핀을 부른 것 아니겠어요?”

엥? 핀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야. 보초병들이 부른 것 아니었어? 파니릴리를 좀 말려 달라고? 그래서 사람을 시켜 날 불러온 것이 아니라, 파니릴리가 사람을 시켜 날 불렀단 말이야?

“…….”

보초들은 당장에라도 제 목숨이 날아갈까 봐 벌벌 떨며 핀을 쳐다보았다. 그들을 이 난국에서 구해 줄 유일한 구원자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핀인 것처럼. 정말이지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릴리에게 바짝 다가가 보초들에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속삭였다.

“울퍼의 폭정으로 영지 내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전하. 이런 시국에 성을 벗어난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어요.”

“그러니까 더 나가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릴리의 얼굴은 아주 단호했다. 새하얀 회색빛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모두를 난처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더 난처하게 만들 방법도 아주 많이 알고 있어요.”

하여간, 협박하는 것에는 남편 못지않지.

“폐하께서 아시는 날엔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뻔해요.”

“이 왕국의 모든 땅은 발투만 왕가의 것이에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하물며 적국도 아닌 봉신의 영지라면 내가 성 밖으로 나서는 데 허락을 받아야 할 이유가 더더욱 없어요.”

엘버그의 모든 대륙은 국왕의 은혜 안에 놓인 땅. 그가 밟지 못하는 땅도, 그가 건너지 못하는 강과 바다도 없다. 그녀의 말처럼 엘버그 왕국은 온전히 왕가의 것. 주인이 자신의 땅을 밟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랴.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과 사상에 근거한 것. 현재 엘버그의 시국이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하게 정의 내릴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열어요.”

“…….”

안 돼. 만에 하나 카르낙이 알면, 아니 분명 알아차리겠지만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다. 파니릴리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드잡이를 할 놈이니 제 아내에게 조금의 위해라도 가해지면 온 성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 뻔했다.

차라리 참견 많고 고집불통인 파니릴리가 사내이고, 세상만사 어떻게 되든 말든 괘념치 않는 카르낙이 여인이었다면 일이 참 쉬웠을 것 같았다. 적어도 이런 난감한 상황에는 처하지 않겠지. 만일 나가겠다는 것이 카르낙 발투만이었다면 흔쾌히 그를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 역시 울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영지에서 무슨 짓을 벌이는지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던 차였다. 그러니 차라리 카르낙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냔 말이야.

“열어요, 당장.”

릴리의 언성이 호되고 매섭게 변했다. 보초병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살려 달라는 듯 핀만 바라보았다. 염병할. 핀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제 허리춤을 더듬었다.

“왕비 전하의 명이다. 성문을 열어. 당장.”

“네, 네!”

보초병들은 망설이지 않고 명을 따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성문을 열고 도개교를 내리는 속도는 번개처럼 빨랐다.

“만일을 위해 병사들을….”

“사양하겠어요. 무장한 병사들을 데리고 다니면 오히려 영지민들에게 해코지를 당할 거예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안전을 도모한답시고 오히려 폭도들의 눈에 띄어 더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 릴리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발투만 왕의 근위대장이 저 같은 여인 하나 지키지 못할까 겁이 나는 건 아니죠?”

누구 놀려? 당신이 겁나는 게 아니다. 당신 때문에 길길이 날뛸 카르낙 발투만이 겁나는 거야. 속이 부글부글 끓어 콧구멍에서 김이 나올 지경이다.

“축하합니다, 전하. 이제 전하께서 제 목줄을 쥐게 되셨습니다.”

혹시라도 방심하여 저 어여쁜 피부의 털끝 하나라도 상한다면 그날이 바로 명이 다하는 날이 될 테니 말이다.

드르륵드르륵, 도르래가 무거운 도개교를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릴리는 입가 가득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걱정 말아요, 핀. 전 당신이 죽길 바라진 않으니까요.”

“그것참 자비로우시네요.”

핀이 대꾸하며 허리춤에 찬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는 서서히 내려가는 육중한 도개교의 너머를 주시하며 가능한 한 빨리 파니릴리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그래야 제 명줄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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