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맞다. 입을 여는 족족 카르낙에게 쓴소리만 해 대는 것이 에이가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에이가가 없으니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이는 파니릴리 자신뿐이었다. 원치 않더라도 말이다.
“영지를 다스리기엔 너무 아둔하지 않을까요? 좋든 싫든 영주로서 져야 할 의무라는 것도 있잖아요. 그걸 감내할 수 있는 자 같진 않아요.”
“영주로서 의무를 다하라고 멀루아를 맡긴 게 아니야, 릴리.”
그는 아내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사치스러운 풍경과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비천하다 하기에 그는 아무나 감히 가질 수 없는 묵직함과 우아함이 있었다.
“그런 것에는 관심 없어. 그저 그놈이 내 명령으로 이곳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는 게 중요한 거야.”
릴리는 무겁게 시선을 내렸다. 떨구어진 눈동자를 따라 눈꺼풀이 반쯤 내려왔다. 낙담한 듯한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성 밖의 시체들은 곧 소각될 거야. 냄새 맡기를 좋아하는 당신을 고역스럽게 할 수는 없지.”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고, 엘버그의 관습대로 깨끗한 강보에 싸 매장하도록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제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해도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이니 자비를 베풀 리 만무하고, 설령 그런 자비를 베푼다 해도 과연 그 시체를 수습할 가족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괜한 오지랖일 게 뻔했다.
카르낙을 따라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멀루아가 영지민에게 너무 가혹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 사치스러운 성안에서 사치스러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태연히 잠든 카르낙이 신기하고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편한 얼굴로 단잠에 빠져든 카르낙의 말간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그녀의 전부였다. 이 남자 때문에 엘버그로 왔고, 이 남자에게 좋은 반려가 되어 주는 것만이 자신의 목적이었다.
그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 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었잖아, 릴리. 그것만이 네가 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이었잖아. 그러니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 그가 걱정할 만한 짓은 하지 마. 그가 싫어할 만한 짓은 저지르지 마.
그럼 나의 믿음은? 지금껏 배우고 지켜 왔던 가치와 진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결심이 섰다. 그것은 파니릴리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직언을 해야 해, 릴리. 그를 이해하는 것과 그를 위하는 것은 달라. 그를 이해한다고 하여 그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도울 수는 없다. 옳은 일을 해, 릴리. 그를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해.
“울퍼의 여자들을 좀 보고 싶어요.”
아침 일찍 다과를 하며 릴리가 요구했다. 카르낙은 입술을 닦으며 고프리에게 물었다.
“울퍼의 사생아를 낳은 계집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성 밖에 있습니다, 폐하. 성으로 불러들일 수는 있지만,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외견이 남루하여 감히 전하에게 보일 것이 못 됩니다.”
고프리는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대답했다.
“그럼 아이들은요?”
“아이들은 모두 어미와 함께 있을 겁니다.”
있을 겁니다? 릴리는 미간을 구겼다.
“…영주의 사생아를 전혀 돌보지 않았군요.”
“형편이 여의치 않은 탓이지요. 거기에 더해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얼마 전 모래 폭풍이 대륙을 덮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모로 살림이 넉넉하지 않답니다.”
“이 찻잔 하나를 팔아도 그들의 하루 끼니 값은 나오겠어요.”
제 앞의 찻잔을 흔들며 이야기하는 릴리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렸다. 그것을 본 고프리는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저 사생아들일 뿐입니다, 전하. 울퍼 님이 그들을 챙겨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지요.”
릴리는 말문이 막혀 울퍼를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도 모르고 손에 쥔 두꺼운 빵 덩어리를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처음부터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실례할게요.”
왕비가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가자 그녀를 따라 일어선 고프리와 울퍼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냥 둬.”
갈등하던 고프리가 왕비를 따라가려 하자 카르낙이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성정이 곧고 깨끗한 사람이다. 시궁창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할 거야.”
“…….”
고프리는 침착한 왕의 면부를 살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릴리는 제 복부에 손을 얹고 무작정 복도를 따라 걸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호화롭게 반짝거려 숨이 막혔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 회랑을 돌고 마침내 성채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어디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울퍼의 눈길과 발길이 닿지 않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정제되지 않은 먼지가 뒤섞여 남루한 광경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일꾼들이 장작을 패고, 닭들이 줄지어 지나간 자리에 어떤 이는 양동이 가득한 오물을 뿌렸다.
잡다한 냄새. 그을린 향과 연기, 돼지와 닭의 울음소리가 한데 모여 어지럽고 분주하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지치고 고되어 보였다. 여유라곤 없는 낯빛으로 대화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기계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릴리는 이것이 멀루아의 민낯이라 생각했다.
그때, 무언가 릴리의 등과 콱, 하고 부딪혔다. 잠시 몸이 휘청했고 앞으로 몇 발자국 밀려났다. 곧 “앗!” 하는 앳된 외침과 함께 와장창하고 무언가가 떨어져 드레스 밑단이 붉게 젖었다. 포도주임이 확실했다.
부딪힌 것은 키가 제 허리께를 간신히 넘는 아이였다. 그는 깨진 독을 보고 어쩔 줄 몰라 울상이었다.
“괜찮니?”
릴리의 물음에 그는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이 팔려서… 죄송합니다. 부인.”
거윈이 준 건과일이 먹고 싶어 허리춤을 뒤적거린 것이 원인이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주인이 가져오라는 술은 바닥에 몽땅 쏟아 버렸고, 거기에다가 술병까지 깨 버렸다. 회초리로 맞을 것이 분명했다.
릴리는 울상이 된 아이를 살폈다. 새하얀 살결에 투명한 벽안. 까만 그을음이 묻은 지저분한 외형에도 귀티가 났다.
“이곳에 사니?”
릴리가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릴리를 보았다. 백금발을 한, 눈처럼 하얀 사람. 아무리 우매한 자라도 제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알리라. 구스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죄, 죄, 죄송합니다. 왕비 전하! 저, 저는 캘던 근위대 거윈 님의 종자 구스라고 합니다!”
“아, 그렇구나.”
어떤 기사들은 어린 사내아이를 종자로 들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종자로 삼기엔 지나치게 작고 어려 보였다.
“구스.”
릴리는 아이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한 번 소리 내어 읊었다. 아이는 넙죽 허리를 더 굽혔다.
“예, 왕비 전하!”
“나 때문에 항아리를 깨서 어쩌지?”
“아닙니다! 제가 멍청해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발투만 왕과는 다르게 왕비는 자비로운 여인이라 하였다. 조용하고 따분하다 하여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도 왕비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잔악하기로 유명한 발투만 왕의 처.
구스는 그녀가 무서웠다. 그녀의 뒤로 피비린내를 풍기며 멀루아성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겹쳐 보였다.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일이 고되지는 않니?”
왕비가 부드럽게 물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생경하여 구스는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올해 나이가 몇이니? 구스?”
“아홉… 아홉 살입니다.”
아홉 살.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려 놀랐다. 이제 겨우 아홉. 릴리는 자신이 아홉 살일 때를 생각했다. 늙고 지친 올라의 품에 안겨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광이나 피웠던 때다. 손에 들린 것은 무엇이든 놓치고 엎어서 깨트리기 십상이던 때. 이렇게 술이 가득 든 무거운 항아리를 놓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일단… 거윈에게 술부터 가져다줘야겠구나. 그렇지?”
“예, 왕비 전하. 허락하신다면 다시 술을 가지러 가 보겠습니다.”
“함께 가자.”
“예?”
깜짝 놀란 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릴리는 상냥하게 웃었다.
“네가 부탁하는 것보다 내가 부탁하는 것이 더 이로울걸? 네 주인에게 더 좋은 술을 가득 가져다주고 싶다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그녀는 엘버그의 왕비다. 그녀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최고의 것을 주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엘버그의 왕비가 종자의 사사로운 실수를 해결하러 몸소 기사를 위한 술병을 부탁한단 말인가.
그러나 왕비를 만류하고 손사래를 치기에 구스는 너무 어렸다. 머리가 여물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왕비의 뒤를 따랐다. 왕비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보다 술 항아리를 다시 가지러 갔을 때 들을 꾸지람과 잔소리가 더 무서웠다. 그러나 왕비가 부탁하면 야단치지 않으리라.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릴리는 저장고의 시종에게 거윈의 술병을 부탁했다. 잘 차려입은 건장한 사내는 커다란 항아리를 가볍고 안정적으로 들고 부엌을 나섰다. 그리고 구스는 거윈의 심부름을 하는 대신 릴리의 손에 이끌려 잘 꾸며진 성의 안뜰로 향했다. 릴리는 편편한 대리석 조각 위에 앉아 아까 부엌에서 챙겨 온 쿠키를 건넸다.
“자, 구스. 먹어 보렴.”
릴리가 펼친 천 주머니 안에는 온갖 종류의 쿠키와 달콤한 디저트가 가득했다. 절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구스로서는 거부하기가 어려운 유혹이었다. 그는 꿀꺽 침을 삼키며 두 손으로 공손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그는 주저 없이 쿠키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릴리는 아이가 오물거리는 모습이 다람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보고 있자니 흐뭇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넌 어쩌다 거윈의 종자가 되었니?”
릴리의 물음에 아이는 우울한 낯빛으로 도리질을 했다.
“거윈 님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약속을 어기면 혼이 날 겁니다.”
순박하고 말간 표정에 릴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난 왕비잖아. 그러니 내겐 말해도 된단다, 구스.”
“…….”
릴리의 말에 구스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거윈과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지만, 왕비님의 앞에서 입을 다무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지 고민이 되었다.
“…그럼… 왕비님만 알고 계세요.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아이다운 반응이었다. 릴리는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구스. 절대로,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마.”
“약속하신 겁니까?”
“그래. 약속하마.”
구스는 입 안의 쿠키를 꿀꺽 삼키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