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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15화 (115/231)

115화

“구스!”

거윈이 자신의 종자를 불렀다. 나무 받침대를 밟고도 발뒤꿈치를 들어야 겨우 거윈의 갈색 말의 등에 빗질을 할 수 있는 아홉 살배기 구스는 주인의 부름에 헐레벌떡 발받이에서 내려섰다.

“네, 네! 거윈 님!”

아이는 자신의 두건을 깊게 눌러쓰며 대답했다. 거윈은 구스의 머리카락이 두건 밖으로 삐져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종자의 하얀 살결이나 시릴 정도로 투명한 푸른 눈동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눈부신 금발 머리에 가장 예민했다. 그 덕에 구스는 늘 자신의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숨겼다.

“부르셨습니까? 거윈 님?”

거윈은 자신의 종자에게 작은 천 뭉치를 건넸다.

“자, 이거 받아라.”

“이게 뭡니까?”

“과일에 설탕을 발라 말렸다나 뭐라나, 네놈은 벌레 새끼도 아닌 주제에 단맛이라면 아주 환장을 하잖아.”

구스는 달콤한 설탕시럽이 묻은 알록달록한 과일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거윈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콧등과 광대를 지나는 커다란 흉터는 캘던성을 탈환할 때 생긴 상처라 하였다. 그가 웃을 때마다 그 상처를 따라 홀쭉하게 주름이 접혔다.

“감사합니다. 거윈 님.”

“너무 많이 먹지는 마라. 이빨이 다 녹아 사라질 테니.”

“네, 거윈 님. 감사합니다.”

구스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한 거윈은 좋은 주인이었다. 언사는 거칠지언정 언제나 따듯하게 대해 주었고, 늘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도록 해 주었으며 깨끗하고 안락한 잠자리에서 잘 수 있게 해 주었다.

코르넬리오가의 장자. 바르시 코르넬리오란 어엿한 이름 대신 ‘구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엘버그 기사의 종자가 되었지만 어린 구스는 그것에 억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성안에 혼자 남은 어린 장자의 두려움이 너무도 컸다.

죽는 것이 무서웠고, 그저 살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비명횡사해 버린 고아나 다름없는 그는 살기 위해 기꺼이 엘버그의 군인 거윈의 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늙어 죽을 때까지 거윈의 종자로 남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거윈은 좋은 주인이고, 강한 군인이었기에 그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마치 아무 근심 없이 어머니 아버지 품에 있었던 때처럼 말이다.

거윈이 준 건과일을 한 점 집어먹는데 코즈모가 다가왔다. 그는 젖은 천으로 땀을 닦아 내며 거윈에게 물었다.

“성벽에 매달린 시체들 봤어?”

“그래.”

거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벙어리 놈, 노예였을 적에는 내 그림자만 봐도 무서워 오줌을 지렸는데 1년여 만에 딴사람이 됐어. 장족의 발전이로군.”

“원래 옹졸하고 겁이 많은 놈이 권력에 취할수록 더 잔인해지는 법이지.”

거윈이 코즈모의 말에 대꾸했다. 둘은 몇 해 전 카르낙 발투만이 멀루아의 성을 차지하고, 이름도 제대로 없던 벙어리 놈을 영주로 임명할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죽은 이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이 멀루아의 성안에서 장난처럼, 농담처럼 카르낙 발투만이 그놈을 봉신으로 임명하던 때 둘은 피범벅이 된 채로 그 장면을 함께 보았다.

그때에도 멀루아는 그다지 풍요로운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궁핍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쥐가 들끓고 사방에서 썩은 내가 풍기는 죽은 땅은 아니었다. 울퍼의 폭정이 멀루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더 듣거나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거 알아? 거윈? 이 성의 여종들 말이야, 모두 울퍼와 초야를 치렀대. 그 뽀얀 가랑이 사이에 울퍼의 씨물을 다 품고 있단 소리라고.”

“…….”

거윈은 슬그머니 구스를 바라보았다. 어린 종자는 아연한 낯빛으로 눈알을 굴리면서도 달콤한 것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젠장,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천박한 벙어리 놈과 베갯동서는 안 해. 그런데 문제는 이 멀루아에 멀쩡한 계집이 있는 곳이라고는 이 성밖엔 없단 말이지?”

“아아.”

하고 거윈이 혀를 차며 비아냥거렸다.

“어쩐지. 화려하고 천박한 것이 캘던의 사창가가 떠오른다 했지. 울퍼 놈은 멀루아의 영주가 아니라 포주인가 보군.”

코즈모는 낄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술이나 실컷 마셔야겠어, 거윈. 오늘 밤 내 잠자리를 따듯하게 데워 줄 계집은 없을 테니 말이야.”

그러더니 거윈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 휴식을 취하는 다른 군인들 사이로 사라졌다.

“만일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면 멈추는 게 좋을 거다, 구스.”

조용히 건과일만 오물거리고 있을 뿐인데도 거윈은 경고 조로 읊조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요, 거윈 님.”

“그래, 그거다. 너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거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울퍼는 사치스럽고 천박한 영주다. 엘버그의 군인들은 모두 그를 조롱하고 하찮게 여긴다. 구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부유한 모웨나의 영주였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역시 울퍼와 다를 바 없이 많은 여자들을 거느렸고 사치스러웠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벙어리가 아니었다는 것. 찬란하던 모웨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다른 곳의 영주도 울퍼와 같을까. 머릿속에 수만 가지의 생각이 스쳐 갔다.

그러나 다행히 거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구스의 말을 믿었다. 다행이었다. 이제 점점 거짓말에 능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구스는 깊이 안도했다.

울퍼의 연회는 화려하고 이색적이었다. 상 위에는 온갖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했고, 헐벗은 무희들이 기이한 운율에 맞춰 하늘하늘 몸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손목과 발목에 달린 금빛 방울이 딸랑거렸다.

“방울뱀 같군.”

핀이 체리 하나를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거윈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울퍼는 뱀 같은 여자를 좋아하나 보죠.”

연회장의 모든 사내들이 생경하고도 사치스러운 풍경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은 가운데 파니릴리만이 딱딱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게너성에서 열린 연회도 이렇듯 사내들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비파와 피리, 조잡한 북을 두드리며 시종일관 정신없는 연주를 해 대고,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추다 바닥을 기어 다녀도, 저들끼리 욕지거리를 주고받다가 종국에 주먹질까지 해 댈지라도 유쾌하기만 했다. 거칠고 딱딱한 빵도 맛있었고, 미지근하고 비린 싸구려 에일도 달게 넘어갔다.

난잡하고 조잡하고 투박하다 해도 릴리는 모두가 흥과 술에 취한 그 광경을 진심으로 즐겼다. 만일 누군가 함께 춤을 추자고 릴리의 손을 잡아당겼다면 기꺼이 함께 나가 춤을 췄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정성 들여 차린 호사스러운 음식임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노련하고 이국적인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화려한 무희들의 몸짓에도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즐거워 보이지가 않았다. 흐린 눈으로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 광경에 흡족하고도 즐거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울퍼, 그 하나뿐이다.

“왕비 전하. 혹시 불편하신 게 있는지요?”

고프리가 내내 표정이 좋지 않은 릴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카르낙이 대신 대답했다.

“적당한 혼처를 찾아 결혼을 했어야지, 울퍼. 연회장에 냄새나는 사내들만 득실거리니 편할 리가 있겠어?”

릴리는 난처하여 웃었다. 자신 때문에 혹여 카르낙이 곤란해질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릴리의 난처함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고프리의 통역에 울퍼는 손을 내저으며 완강하게 반응했다. 두꺼비 같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지독한 사향 냄새가 났다.

“백작 부인이 되면 사치를 부리고, 허영심이 깃들 것이 뻔하니 계집들의 관리 차원에서 이대로 지내겠다 하십니다.”

누가 보면 본인은 대대손손 영지를 이어받은 명망 있는 백작 가문인 줄 알겠네. 멍청하고 미련하고 천한 탓에 운이 좋아 왕에게 영지를 하사받았으면서.

“또….”

통역관이 말을 이어 갔다.

“멀루아 땅엔 왕비 전하같이 눈부신 미인이 없다 하십니다.”

“당연하고도 건방진 말을 하는구나, 울퍼. 투로인 내가 파니릴리를 얻었다고 너 역시 그럴 수 있다 생각하나?”

카르낙의 목소리에 제법 노기가 배었다. 고프리는 당황하여 말을 보탰다.

“그만큼 왕비 전하께서 아름다우시다는 찬양과 숭배의 뜻이옵니다, 폐하. 왕비 전하 같은 분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오로지 폐하뿐이십니다.”

고프리의 변명을 끝으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화려하고도 불편한 연회는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릴리는 내내 가시방석이었고, 카르낙도 그다지 만찬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게너성에서의 만찬 때와는 전혀 달랐다.

돌아온 방 안에는 카르낙의 요구대로 싱그럽고 향긋한 꽃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마치 정원에 들어온 듯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을 해야 마땅하나 멀루아에 들어선 후로 내내 본 그 묘지 같은 영지의 풍경이 떠올라 과연 이 많은 꽃들은 어디서 누구를 쥐어짜 가지고 온 것인지 걱정부터 되었다. 여종들은 또 얼마나 시달렸겠는가.

“경박한 사내예요.”

여종들의 도움을 받아 슈미즈로 갈아입은 뒤 릴리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카르낙은 갑갑한 더블릿의 소매 단추를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절제라곤 모르는 것 같아요.”

“고관대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이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멀루아의 영주로 임명했고.”

“…….”

언젠가 그는 분명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분명 울퍼는 그러한 카르낙의 미래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으면 잡았지.

그 작자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그렇게 말해 볼까.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종들의 눈빛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연회장에서의 그 음울함에 대해서는 어떨까. 카르낙의 심중을 거스르지 않고 그에 대해 공감을 얻어 내는 것이 가능할까.

“폐하의 치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내입니다. 그는 폐하의 명예를 실추시킬 뿐이에요.”

그는 웃었다.

“신기하네, 릴리. 당신이 에이가처럼 말하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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