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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14화 (114/231)

114화

모래 폭풍으로 인해 엘버그 대륙의 절반 이상이 극심한 피해에 시달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수도인 캘던조차 아직도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고, 가뭄과 폭풍에 이골이 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하게너의 영지 또한 전례 없는 재난에 손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멀루아 역시 별다르지 않으리라 예상은 한 바였다.

그러나 막상 멀루아 땅에 들어서서 목도한 그 모습이란 예상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하늘은 까마귀 떼로 뒤덮여 그것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이 새까맸고, 암흑이 드리운 땅에는 벌레와 쥐가 들끓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이상한 냄새.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매우 고약한 냄새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소매로 제 코를 막았다. 버려진 폐허라 해도 좋을 만큼 을씨년스럽고 한적한 마을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몇몇 영지민들이 듬성듬성 밭을 갈고, 바닥에 떨어진 이삭이나 볍씨들을 힘겹게 줍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핀이 말의 옆구리를 차 선두에 선 카르낙의 옆에 나란히 섰다.

“저것 좀 봐.”

그가 턱 끝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꼬챙이처럼 꿰어 장대에 매달린 시체가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한 시체 위로 내려앉은 까마귀들이 새까맸다.

“…폭정으로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시체 썩는 내, 곤충과 쥐와 새들의 분변 냄새 그리고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의 몸에서 나는 악취까지 합쳐지니 사방에서 그토록 괴이하고 이상한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디 부유하지 않은 땅이었으나 그럼에도 소박하고 평화로웠다. 단단한 성벽과 높은 지대에 자리한 성채는 적을 방어하고 공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땅으로, 다소 폐쇄적이나 그 어떤 영지보다 안정적인 땅이었다.

그런 멀루아를 대대로 다스려 온 영주가 죽고 울퍼가 그것을 받아 다스린 지 겨우 1년이 조금 넘은 시점. 멀루아는 말 그대로 무간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과연 카르낙 발투만은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예상한 바와는 전혀 다른 멀루아의 풍경에 대해서 말이다.

을씨년스러운 마을을 지나 영주의 성에 들어서자 이번엔 자극적인 향내가 진동하였다. 성안 곳곳에 비치된 향로에서 새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흡사 화재로 소실된 건물의 잔해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여하간 뭐든 중간이란 것은 없는 곳이군. 멀루아성의 안채에 들어서며 핀은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 폐하. 왕비 전하. 멀루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침 마중 나온 울퍼의 통역사가 정중히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카르낙은 말에서 내리고서는 이제 막 마차에서 나오는 제 아내의 안색을 살폈다. 침착한 표정이었으나 안색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후각이 예민한 릴리로서는 멀루아의 향내나 악취가 매우 고역이리라. 그러니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카르낙은 멀루아에 들어서자마자 제 아내 걱정에 떠날 생각부터 하기 시작했다.

“먼저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 감히 용서를 구합니다. 멀루아의 영주이신 울퍼 님께서는 현재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시어 부득이하게 두 분을 성안에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감히 울퍼 님을 대신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그분의 통역사인 고프리라고 합니다.”

“그보다 먼저 왕비가 쉴 거처부터 안내해.”

성안의 시종들이 분주히 마차와 수레에서 짐들을 꺼내는 가운데 고프리는 카르낙의 곁에 선 릴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결혼식 날 보았던 것과 같은 새하얀 얼굴이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고단하실 왕비 전하를 위해 먼저 침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성안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성 내부를 보수하고 유지하느라 성안의 집기와 장식품들을 모두 팔아 버린 하게너성과 정반대임은 물론 왕의 거처인 캘던성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성안 곳곳에 금붙이와 화려한 장식품들이 즐비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사치스럽고 화려한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성벽에 시체들이 즐비하더군.”

카르낙이 종종걸음을 치는 고프리에게 말했다. 머리가 세기도 전에 등부터 굽은 통역사 고프리는 곧바로 대답했다.

“예, 폐하. 한바탕 폭동이 있던 터라…. 하지만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지금은 신속히 진압되어 안정을 찾았으니까요.”

신속히 진압된 것이 아니라 폭동을 일으켰던 자들을 모두 죽인 것이겠지. 릴리는 성 밖의 기이한 냄새를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처참하기 그지없던 영지의 모습과는 달리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성안의 풍경 또한 그녀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에이가에게 멀루아의 울퍼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들은 일이 있으나 직접 본 것은 혼인식 후 연회장에서뿐이었다. 릴리는 그의 꺼무죽죽한 피부와 거대한 체구를 떠올렸다. 에이가는 그를 방종한 사내라 칭했다. 그조차 에둘러 점잖게 표현했으리란 것은 이미 짐작한 바였다.

“울퍼는 어디가 아픈 건가요?”

릴리가 물었다.

“예, 오래전부터 욕창으로 고생하셨습니다. 그 덕에 허벅지에 발적과 염증이 생겨 거동이 영 불편하시지요.”

욕창이란 거동하지 못하는 노인이나 전신불수의 병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질병인데. 폭동을 진압하다 생긴 상처도 아니고, 과하게 놀고먹어 욕창이 왔단 말인가.

“다행히 많이 호전되어 가고 계십니다.”

행여나 그 때문에 걱정할까 고프리는 친절하게 덧붙였다. 릴리는 마지못해 상냥하게 답했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아아. 이곳입니다.”

고프리가 손짓하자 화려한 복장을 갖춘 시종들이 단단한 양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닥에는 호화로운 아라베스크 문양의 카펫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고, 벽면엔 화려한 부조가 장식되어 있었다. 황금으로 된 촛대, 이국에서 가지고 왔을 기이하고 이색적인 장식품이 사방에 널려 있었으며, 모든 가구는 비단과 벨벳 그리고 도금으로 마감해 두었다.

“벙어리 주제에 취향 한번 화려하네.”

카르낙이 방안을 둘러보며 파안대소했다. 너무 화려하여 거북할 지경인데 왕에겐 이것조차 웃음거리인 모양이었다. 다른 왕이었다면 이조차도 하극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감히 엘버그의 왕보다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성을 가지고 있다니,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안 여종들의 차림도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혼인 전의 여인들은 자신의 살결을 남에게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엘버그의 관습이라 들었건만 멀루아의 여종들은 모두 제 가슴과 어깨를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 오직 여종들만이 맨발이라는 사실이었다.

“울퍼 님의 고풍스러운 취향은 이미 이 멀루아 밖까지 정평이 나 있지요. 부디 국왕 내외분께서도 흡족하길 바랍니다.”

“고프리.”

릴리가 어깨에 두른 망토를 벗으며 그를 불렀다. 고프리는 자긍심이 가득한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예, 전하.”

“어째서 여종들만 신발을 신지 않았나요?”

그러면서 릴리는 고프리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그는 질 좋은 가죽으로 정성 들여 바느질한 고급 수제화를 신고 있었다. 이토록 사치스러운 성에서 저 정도로 사치스러운 신발을 신고 있으면서 재정난 때문이란 변명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종과는 다르게 성안의 남종들은 모두 싸구려일지라도 제대로 된 신을 갖추어 신고 있지 않은가.

“아… 예, 전하. 그것은 여종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

릴리는 방 안에 들어와 분주히 왕 내외의 물건을 정리하는 여종들의 면면을 살폈다.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그녀들의 얼굴은 건조하고 우울한 빛을 띠었다.

새하얀 살결을 가진 것으로 보아 엘버그인임에 틀림이 없을 그들은 제 가슴팍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수치스러울 것이다. 거기에 더해 신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는 굴욕감이라니. 아마 성을 탈출할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만큼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크리라.

“왕비는 사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널따란 방 안을 둘러보던 카르낙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고프리는 당황하여 흠칫 어깨를 떨었다.

“참으로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전하. 미리 전하의 심중을 살피지 못하고….”

“향이 좋은 꽃과 나무를 가져와라, 고프리. 가능한 한 많이. 이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여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폐하. 곧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고프리는 뒷걸음질 치며 방 안을 빠져나갔다. 릴리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카르낙을 보았다.

“과하셨습니다, 폐하.”

“그렇지 않을걸, 릴리. 당신 표정을 좀 봐.”

릴리는 본능적으로 제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얼굴 근육이 잔뜩 긴장되어 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릴리는 제 이마를 손등으로 비비며 긴장을 풀어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풀리기는커녕 피곤해지기만 했다.

“본래의 멀루아는 어떤 곳이었죠? 그러니까 울퍼가 다스리기 전에 말이에요.”

“글쎄, 굳이 떠올리자면…”

그는 여성의 나체가 조각되어 있는 토르소를 쿡쿡, 손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좀 딱딱하고 축축하고 지루한 곳이었던가. 여하간 재미없었던 건 확실해. 죽은 멀루아 영주가 아주 꼬장꼬장한 늙은이였거든. 꼭 수도사가 수행하는 수도원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곳이 지금은 향락에 찌든 방탕한 곳으로 변모해 있다니. 울퍼의 능력을 높이 사 줘야 할지도. 그런 생각에 카르낙은 킥킥 저 혼자 웃었다.

“성안은 아주 호화롭네요. 영지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큰 전란이라도 있었던 건가 했는데 말이에요.”

“전란에 버금가는 폭동이었나 보지. 마을의 분위기를 보나, 성벽에 걸어 둔 시체들을 보나 영지민의 절반 이상이 죽은 것만은 확실해.”

줄초상을 치른 집처럼 암울한 분위기 하며 드문드문 목격되던 영지민의 모양새 하며 잔뜩 겁을 먹은 표정들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뻔했다. 카르낙은 이 멀루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듯 굴었다.

영지민의 고통도, 울퍼의 사치도 그저 웃어넘기면 그만인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릴리에게는 달랐다. 릴리에게는 남루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던 영지민의 얼굴 하나하나가, 황폐한 농작지의 거무튀튀한 흙덩이 하나하나가, 성벽에 걸린 시체들 그리고 이 기이하고 고약한 냄새들 하나하나가 모두 그녀 자신의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녀의 양심과 도덕심을 들쑤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런 자신에게 공감하긴커녕 아마 이해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이 모든 광경은 마땅히 그들이 받아야 하는 인과응보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멀루아를 방문하기에 적당한 때는 아닌 것 같아요. 환영 만찬을 치를 여력이나 있을지….”

“이 방 안에 있는 금붙이만 가져다 팔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카르낙은 금동 향로를 툭툭 치며 웃었고, 릴리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그를 자극하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이 불안과 슬픔을 전할 수 있을까.

“환영 만찬은 또 얼마나 호사스러울지 겁이 날 지경이에요.”

카르낙은 긴장하지 말라는 듯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여느 때 같았다면 그런 그의 손길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정을 되찾았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그냥 즐겨, 릴리. 이런 호사스러움을 즐길 날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아내를 안심시키려는 카르낙의 노력에 호응하기 위해 릴리는 억지로 미소 지어 보였다. 하지만 두려움에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죄악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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