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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13화 (113/231)

113화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새하얀 이가 매끈하게 드러났다. 자파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니 근심만 가득하던 마음속에 즐거움이 샘솟았다. 자파가 제 옆의 의자를 탕탕 두들기며 손짓했다.

“자! 전하! 여기 상대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게 만드는 사내였다. 투로들은 다른 엘버그인들처럼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딱딱한 캘던성과는 다르게 이곳은 소탈하고 솔직하고 유쾌하여 늘 생기가 넘쳤고, 그런 하게너성의 매력은 릴리를 사로잡았다.

태양처럼 뜨겁고 에너지가 넘치는 투로들이 좋았다. 그들의 커다란 덩치, 귀가 얼얼할 정도로 소란한 목소리, 자유분방하고 어쩌면 무례해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 방식도 좋았다. 바로 그 점이 릴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들의 무질서함을 바로잡아야겠으면서도 그들의 방탕함은 그대로 두고 싶었다.

릴리는 투로들의 천박함이 좋았다. 저에게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건네고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머리를 조아리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좋았다. 한 가지를 지키면서 다른 한 가지를 깨트릴 수 있을까. 그 균형을 유지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손대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걸까.

자파는 은잔 가득 붉은 과일주를 따라 릴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호방하게 웃는 입가 아래의 턱수염엔 미처 닦아 내지 못한 과일주 방울들이 이슬처럼 달려 있었다.

“자요. 자고로 술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마셔야 제맛이죠!”

“…저는 술을 잘 못 해서요.”

릴리는 곧 넘쳐흐를 듯 찰랑거리는 액체를 조마조마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자파는 다시 호방하게 웃었다. 그는 무엇이든 즐겁게만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왕비 전하께서는 식수가 충분한 곳에서 자라셨나 봅니다! 이곳은 물이 귀해 누구든 술을 마신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다요! 곡물과 과일 찌꺼기들로 발효시킨 알코올이 아니었다면 모두들 갈증으로 말라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자파가 늘 고주망태가 되어 있다고 원망만 할 수는 없다. 그저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갈증을 쉽게 느끼고 또 음료를 많이 마셔야 하는 사람일 뿐이니.

그라타의 그 풍부한 과일과 식수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이곳에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몸을 담그고 적시고 쏟아부어도 차고 넘치는 것들인데 이 대륙에 아주 조금만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라타의 하늘 위의 비구름을 단 몇 조각이라도 떼어 오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릴리는 잔 속의 술을 조금 홀짝이고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재판이 있더군요.”

마침 자파도 있고 하니 작심했던 이야기를 꺼낼 좋은 기회였다.

아아, 하고 자파가 반색했다. 그는 자초지종을 알고 있었던 듯 말린 고기를 씹으며 대뜸 물었다.

“그래서 누가 이겼습니까?”

“알탄이란 사내요.”

푸, 하고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카르낙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팔자 폈다고 게을러진 탓이야. 그 둔한 몸으로 어떻게 알탄 같은 젊고 패기 넘치는 사내를 이기겠어.”

카르낙은 무료한 얼굴로 소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제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릴리의 낯빛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무슨 재판이었는데?”

별것 아니야, 하며 자파가 운을 띄웠다.

“루거의 처가 알탄과 눈이 맞았거든. 그런데 이 알탄이란 놈은 내세울 게 제 다리 사이에 달린 물건과 멀쩡한 몸뚱이밖에 없는 빈털터리란 말이지. 그래서 루거에게 결투를 신청한 거야. 여자와 재산을 차지하고 싶어서.”

릴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전해 들은 이야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악스럽다.

“그럼 루거가 재판을 요청한 것도 아니란 거예요?”

“예. 뭐, 결과적으로 결투를 승낙했으니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만….”

대답하는 자파의 얼굴은 태연하다 못해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일을 해괴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파니릴리 저 하나뿐인 듯싶었다.

“루거가… 신청한 재판이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그게 이치에 맞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억울한 사람은 그쪽이 아닐까, 하고….”

“억울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제 낡은 배는 버리고 튼튼한 새 배에 승선하겠다는데…. 안 그렇습니까?”

자파가 짓궂은 눈웃음을 쳤다. 카르낙은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쪽 손을 들어 제 정수리에 올리니 단단한 흉곽이 더 널따랗게 펴졌다. 예전 같았다면 코웃음을 치며 자파의 말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쩐지 자신의 처지에 대입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 배로 갈아탄다…? 파니릴리가…? 젊고 혈기 왕성한 애송이에게…? 이런 시발?

“글쎄, 자파. 그건 좀 생각을….”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 그냥 쫄리면 뒈지는 거지 무슨.”

릴리가 끼어들어 카르낙 대신 답했다.

“엘버그의 법에 따르면 간음은 중죄예요. 아내는 자신의 남편에게 헌신할 의무가 있어요. 남편 역시 아내를 충실히 보살필 책임이 있고요.”

자파가 작은 눈을 깜빡거렸다.

“간음이 뭐야?”

카르낙은 자파가 알아먹기 쉽게 설명했다.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랑 떡 치는 거.”

“아아.”

그는 아는 척했다가 이내 ‘응?’ 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리라.

“물론 엘버그에서 그 어떤 것보다 지켜지지 않는 법이란 것은 알고 있어요.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는 것도요.”

그 법을 가장 많이 어긴 것이 바로 알기어스 선왕. 제 아비란 자였다. 그 아비가 간음을 하여 태어난 결과가 바로 파니릴리 자신이고 말이다. 그러니 지레 찔려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 엘버그인들은 그 누구보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다녔는데 말이죠. 참 알면 알수록 희한한 족속들입니다. 안 그래요? 지키지도 못할 법도는 왜 만들어 놔? 변태야? 어길수록 흥분돼서 그러는 건가?”

할 말이 없다. 제가 벌인 일도 아닌데 릴리는 낯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엘버그. 세상 꽉 막힌 듯 온갖 규율과 법도는 다 만들어 놓고, 하고 다니는 꼴은 여기 투로들만도 못하다. 그래. 차라리 미개하다 치자면 투로들보다 엘버그인들이 더 미개했다. 미련하고 멍청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엘버그인인 자신이 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감히 없다. 누가 누구에게 훈계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이제 새로운 왕이 들어섰으니 엘버그의 좆같은 법도 바뀌어야죠. 무엇보다 그 간음인가 뭔가부터 없애십쇼. 별 해괴한 법이 다 있습니다그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카르낙이 골몰한 끝에 말했다.

“간음을 중죄로 다스리는 거. 이왕이면 하게너의 재판 방식을 따오고 싶군.”

그래야 그 개새끼를 합법적으로 아주 잘게 다져 버릴 수 있으니.

“…그건 중죄로 다스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더 힘센 놈이 다 가져가는 게임일 뿐이죠.”

그런 거라면 더더욱 괜찮다. 누가 됐든 걸리기만 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쫄리면 뒈져야지 뭐.”

문득 머릿속에 세바스탠이 떠올랐다. 그 얼굴만 희멀건 밀가루 반죽 같은 놈. 하여간 걸리기만 해 보라지. 용광로에 처넣어 줄 테다.

“엘버그에 어울릴 만한 법도는 아닌 거 같은데요, 폐하. 무엇보다 에이가가 가만있지 않을걸요.”

“어쨌든 간음은 나빠. 엄하게 다스릴 거야.”

몰라. 다 모르겠고 어쨌든 좆같다 이거야. 너무 몰입이 심하게 된다. 마치 자신이 당한 일인 것처럼 카르낙은 가슴이 펄떡거렸다. 대상도 없는 분노에 으드득 이가 갈렸다.

“차라리… 간음을 저지른 자들은 지위를 박탈하고 어디… 멀리 유배를 보내는 건 어때요? 아니면 어디 감옥에 가두거나… 그게 아니면….”

“그건 안 돼. 그런 일로 아내와 떨어져 지낼 순 없지. 어쨌든 나쁜 놈은 멀쩡히 남편이 있는 여자를 홀린 그 새끼잖아. 그렇지?”

“…….”

자파의 고개가 묘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발투만 폐하의 안광이 시퍼렇게 빛났다.

“그러니까 그놈을 죽여야 마땅하지. 합법적으로. 정의롭게. 깔끔하잖아. 뒤끝 없고, 산뜻하고.”

네놈이 어디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지는 아주 잘 알겠다, 카르낙.

“이건 시간을 좀… 좀 두고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요.”

구멍 난 가마니에서 쏟아진 쌀알을 주워 담듯, 릴리는 옆구리가 터져 버린 카르낙의 분노를 주워 담기 위해 해사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에이가.

우리는 무사히 하게너의 영지에 도착했습니다. 로로와 함께 로레인 하게너의 무덤에도 가 보았답니다.

이곳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덥고 넓더군요. 에이가 당신이 왜 그렇게 잠이 없는지도 전 이제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하게너의 밤은 정말이지 너무나 짧더군요. 따가운 볕 때문에 늦잠을 자기도 힘들고요.

이곳에서 로레인과 함께했을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성안 곳곳에는 여전히 당신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비록 내부는 단출하게 변했어도 저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답니다.

이곳에서 만난 투로들은 모두 열정적이고 순박하며 낙천적입니다. 그들의 비극적인 삶과는 너무 달라 놀라울 지경입니다. 긴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때 묻지 않은 영혼에 절로 마음이 경건해지기까지 합니다. 처음 이곳에 몰려온 투로들과 마주했을 때 로레인 하게너도 이 같은 기분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그분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이겠죠.

여전히 이곳에서는 여자와 아이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로 인해 종종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특히 여인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이 빈번한데 해결책이 썩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여인을 귀하게 여기는 습성과는 반대로 투로들은 결혼을 하거나 가정을 꾸리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종종 패전 후 노예로 끌려온 엘버그의 여인들을 취한다고는 들었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적은 것을 보면 그조차도 흔하지 않은 일 같습니다.

투로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난잡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드는 것에만 열성적입니다. 마치 매일매일이 축제 같답니다. 심지어 식탁 위에서 서로에게 오줌을 갈기는 광경까지 보았지요. 네, 에이가. 당신이라면 상상도 해 보지 못했을 광경이지요. 하지만 분명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랍니다. 놀랍게도 저는 졸도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에이가,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요. 하게너성에 오기 전 커다란 폭포가 있는 숲을 보았어요.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과 풀이 있었는데 조금 더 깊이 알아보고 싶어요. 쓸 만한 약제사들을 보내 연구해 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식용 식물과 약재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캘던의 명민한 건축가들을 하게너의 성으로 보내 주세요. 성의 보수로 바쁘다는 것은 알지만 극심한 가뭄에 영토가 말라 버린 하게너의 성에 수원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폭포수가 있으니 그곳에 수로를 연결하는 방법도 있겠지요. 물론 비용적인 면을 고려해 봐야겠습니다만… 그 문제는 후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지요.

캘던에는 다시 비 소식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원의 연못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는지도 궁금하고 세일린의 감기는 나았는지도 궁금하고요. 무엇보다 에이가 당신이 무탈한지 궁금합니다. 부디 제가 없는 동안 무사하고 평안하길 빕니다.

당신의 친구, 릴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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