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전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순조롭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핀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복장을 정비하고, 허리에 칼을 찬 뒤 그는 자신의 말에게로 향했다. 전날 밤 푹 쉬었는지, 다시 길을 떠날 준비는 되었는지 핀은 놈의 콧등을 쓰다듬으며 컨디션을 확인했다.
“핀.”
윤기가 흐르는 털을 쓰다듬고 고삐가 단단히 매어져 있는지 확인하고 있을 때 차분한 음성이 그를 불렀다. 핀은 뒤를 돌아보았다. 릴리였다.
“전하.”
그는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릴리는 어색한 듯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렇게 저를 찾아와 말을 걸었을 터였다. 핀은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젯밤 당신과 나눈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릴리나 저나 이성을 잃은 상태로 서로에게 윽박질렀을 뿐이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어요. 당신이 말한 대로 징징거렸죠.”
“실언하였습니다, 전하. 감히 용서를 구합니다.”
무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왕비에게 언성을 높였다. 하극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상황이 유야무야 넘어간 것은 순전히 여성을 하대하는 엘버그의 관습 때문이었다. 게다가 왕의 행방이 묘연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고 말이다.
“내가…”
릴리는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였다.
“당신의 말대로 내가 그 같은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해요.”
“…….”
“위험에 처했을 때 내가 폐하를 더욱 위험하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최소한 그 상황을 함께 부딪쳐 나갈 수 있게요.”
카르낙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위험에 처하든지 이번에 그랬듯 다음에도 누구보다 먼저 파니릴리 자신을 멀리 보내 버릴 것이다. 그것이 카르낙의 마음임은 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아끼고 위한다는 것도, 보호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파니릴리는 진정으로 그의 반려가 되고 싶었다. 그러한 순간이 다가오면 적어도 가장 먼저 도피시켜야 할 연약한 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로 그런 나약한 자가 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도망쳐 자책과 두려움으로 이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절대, 다시는 그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으리라.
“당신이 날 싫어한다는 것은 알아요, 핀.”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날 좋아하진 않잖아요.”
“…….”
핀은 낮게 숨을 가라앉히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언제나 상냥하고 장난기 넘치던 핀의 눈은 사실 무척 차가운 초록빛이었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지성이 담겼다. 그래서 릴리는 핀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카르낙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고, 앞으로 자신에게도 반드시 도움이 될 존재라고 믿었다.
“전하는 좋은 분이십니다. 자비롭고 현명하고 아름다우시죠.”
릴리는 그의 말이 입에 발린 소리란 것을 안다. 거창한 칭찬 뒤에 나오는 말이야말로 그의 진심일 것이다.
“그런데요?”
“그러나 폐하껜 현명하고 아름답고 자비로운 왕비가 아니라 강한 왕비가 필요합니다. 때론 비열하고 때론 아주 어둡고 사악해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
“그것이 아니라면 전하, 부디 폐하의 ‘아내’로만 남아 주십시오. 그분이 캘던에서 편히 먹고 자고 쉴 수 있도록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 말은… 캘던성의 인형처럼 지내란 말인가요?”
“예, 전하. 본래 전하의 역할은 그것이었으니까요.”
본래 나의 역할. 그래, 본래 자신의 역할은 카르낙 발투만에게 왕위를 이어 갈 정당성을 부여해 줄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가지지 못한 파니릴리의 혈통. 그것 말고 바라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적장자를 원하지도 않았다. 파니릴리 자신도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그와 결혼을 해 그의 장자를 낳아 주고, 그 이후엔 그라타로 다시 돌아가는 것. 핀이 말한 대로 딱 아내의 역할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파니릴리가 엘버그로 넘어와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해 왔던 모든 것은 그와의 결합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던 자신을 바꿔 놓았다. 카르낙의 아내로서, 그리고 엘버그의 왕비로서 그녀가 짊어져야 하는 것들은 그보다 훨씬 많고 무거웠다.
당장 입을 닫고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 있으란 것은 제 눈앞에서 뻔히 벌어지는 온갖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모든 일들을 외면하란 말과 다르지 않았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릴리는 그라타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장님처럼, 벙어리처럼 살아갈 성정이 못 되었다. 미련하고 답답할지언정 그녀는 늘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워 왔다.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서 도망가 본 적이 없다.
때론 비열하고 때론 아주 사악해질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왕에게 필요한 반려이고 엘버그에 필요한 왕비라고? 파니릴리는 한순간도 자신이 바르고 어질고 현명하고 착한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부르테는 종종 그녀에게 ‘너는 쓸데없이 동정심이 많고 참견을 잘한다.’ 했었다. 그러니 자신의 그러한 면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에게도 충분히 비열하고 사악한 면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핀의 성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약의 상황이 오면….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키고 싶어요.”
“우리 모두 그렇답니다, 전하.”
핀이 마구를 정비하며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대꾸했다.
“뭐라도 좋아요. 검이나 활이나… 창이라도요. 알려 주세요.”
핀이 분주히 놀리던 손을 멈추었다.
“…뭐라고 하셨죠?”
“이래 봬도 체력이 나쁘진 않아요. 산도 곧잘 탔고 뜀박질도 정말 잘해요.”
“…….”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이니 잘 익힐 수 있어요. 열심히 할게요.”
핀은 입을 벌리고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서둘러 털어 내듯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전하. 국왕 폐하께서 아시기라도 하는 날이면 전 뼈도 못 추릴 거예요.”
“제가 설득해 볼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몸을 돌려 다시 마구를 만지는 것을 보아하니 릴리의 부탁을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폐하께선 그렇게 꽉 막힌 분이 아니에요. 합리적으로 이야기하면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예요.”
핀이 눈을 굴렸다.
“전하께선 그분을 제대로 이해 못 하고 계세요. 폐하께서 왕비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전혀 모르십니다.”
그가 자신을 아낀다는 것은 안다.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말에 태워 달아나게 해 줄 만큼. 그리고 그가 그토록 자신을 아끼는 만큼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얼마나 지옥 같은 고통이었는지도 이젠 분명히 알고 있다.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도망쳐 나오지 않으리라.
“아니요. 당신이야말로 내 입장을 전혀 이해 못 하고 있어요. 그가 날 아끼는 만큼 나도 그를 아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잖아요.”
“…….”
“나 역시 그를 지키고 싶어요. 내가 그럴 깜냥이 안 된다면 적어도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고요. 내가 당신처럼 무장하고 전쟁터에 나가 함께 싸울 전우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 반의반의 반이라도 좋아요.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줘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그는 단 한 번도 여성을 훈련시킨 적이 없다. 어떤 여인들은 취미로 활을 쏘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나 그래 보았자 과녁 맞히기 정도다. 취미로 활쏘기를 배우는 것과 전쟁을 위해 활쏘기를 배우는 것은 다르다.
취미로 검술을 배우는 것과 살상용으로 검술을 배우는 것 역시 달랐다.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검이나 활로 사람을 죽인다고? 저 여자가? 사랑이 넘치고 넘쳐 아마네스 여신처럼 자애롭다는 여자가? 헛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그는 간신히 참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건 안 됩니다.”
“명령이에요, 핀.”
“…….”
제법 단호한 어조에 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못마땅히 쳐다보았더니 릴리가 턱을 치켜들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 잔인하거나 교활하진 못해도 좀 사악하긴 한 여자다.
“불복합니다, 전하. 죽이십쇼.”
릴리가 어금니를 꽉 물고 ‘으으’ 소리를 냈다. 그녀는 조급함에 제 이마를 쓸고는 물었다.
“좋아요, 어떻게 하면 가르쳐 줄래요? 이야기해 봐요. 뭐라도 좋으니 어서요.”
“…….”
“어서요.”
고집이 센 여자다. 사악하고 고집 센 여자. 멍청하고 착한 여자보단 나았지만 사악하고 고집이 센 여자도 그다지 좋진 않지. 적절한 맺고 끊기가 필요한 때였다. 자신이 곤란해지지 않으면서 카르낙에게 드잡이 당할 일도 없는 딱 적당한 지점이 필요했다.
“좋습니다, 그럼. 죽은 이의 머리를 잘라 오세요.”
“…네?”
“죽은 사람의 머리를 잘라 오라고요. 페하께서 해 온 것을 보셨죠?”
보기야 했지. 보라색으로 변한 사람 머리를 밭에서 뽑아 온 무처럼 들고 온 것을 말이다. 애써 자세히 보려 하진 않았지만. 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가져오시면 됩니다. 그럼.”
“잠시만요.”
더 이상 나눌 이야기는 없다는 듯 서둘러 말에 오르려는 핀을 릴리가 제지했다.
“죽은… 죽은 사람은 어디서 찾죠?”
“글쎄요.”
핀은 대충 대답했다. 릴리의 안색은 이미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가 의도했던 대로였다.
“찾아보시죠. 아니면… 직접 죽여서 가져오셔도 되고요.”
“…….”
넋이 나간 왕비의 얼굴을 보니 꽤 흡족했다. 그는 가볍게 말 위에 올랐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하.”
인사를 마치고 가볍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다그닥다그닥, 느린 굽을 울리며 말이 천천히 릴리에게서 멀어졌다.
“요 며칠 릴리의 기분이 계속 안 좋아 보이는데 말이야.”
하게너의 성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카르낙이 푸념하듯 핀에게 말을 붙였다.
“긴 여행에 지치셨나 보죠. 마차 안에 갇혀 있는 것도 진력이 나셨을 테고요.”
폭포에서 한바탕 그 난리를 겪고 난 이후 릴리는 모든 풍경을 관망했다. 무엇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 행렬이 지체하지 않고 하게너성에 닿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그 덕에 그녀가 그라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많은 동물들을 그냥 지나쳐 왔다.
목이 길어 가장 높은 나뭇잎을 따 먹는 짐승에서부터 평원에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들소 떼까지. 진즉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지르며 구경하고 싶다 난리를 쳤을 장면들이건만 릴리는 그것들을 눈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종일 다른 생각에 골몰하는 것처럼 보였다.
뿌우, 하고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막 하게너 영지의 성벽이 보일 때쯤이었다.
“자할이 우리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아아.”
카르낙이 열기로 일렁거리는 성벽을 바라보며 안도의 신음을 내쉬었다. 드디어 목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긴장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