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눈을 치떴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면 이미 늦었습니다. 상황은 벌써 수습되었을 거예요.”
아니야, 그럴 리 없다. 카르낙은 아직 살아 있을 거야. 살아서 놈들에게 쫒기고 있을 거야. 쫓기며 자신을 구하러 올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홀로. 홀로 숲에 남아서. 그 생각을 하니 피가 말랐다.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누군가 도와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니 가야 해! 가야 한다고!”
“페하께서 도움을 요청하라 하시던가요?”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해! 그는 혼자란 말이야! 혼자 칼을 든 강도들과 맞서고 있단 말이야!”
“중요합니다, 전하. 만일 그분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분명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셨을 겁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상황이 너무 급했다. 그는 저를 말에 태워 대피시키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그를 혼자 두고 저는 말을 타고 도망쳐 왔다. 왕을 두고. 엘버그의 왕을 혼자 두고.
“제발 도와줘요, 핀. 제발요. 제발 명령이에요! 만에 하나라도 그가 죽으면 기필코,”
기필코 당신을 용서치 않으리라.
“카르낙은 안 죽어!”
핀이 참지 못하고 같이 언성을 높였다. 해선 안 될 하극상이란 것을 알면서도 왕비의 꼬라지를 봐줄 수가 없었다.
“그는 카르낙 발투만이야! 겨우 좀도둑 몇에게 당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아!”
핀은 호흡을 골랐다. 소리를 지르려면 더 지를 수 있었지만 참아야 했다. 하극상으로 비쳐선 안될 테니.
“그러니 이제 그만 징징대고 정신 차리시죠. 애초에 당신이 폭포수가 보고 싶다고 안 했다면 카르낙이 숲으로 들어갔을 리도 없었고 그럼 이런 꼴을 안 당해도 되었겠지요.”
“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어요.”
“그러셨나요? 하지만 전 알고 있었지요.”
“…….”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어요. 그는 당신의 미소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거든요”
“…….”
“그러니 이 정도 일쯤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앞으로 수도 없이 이런 일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만에 하나라도….”
“그는 놈들의 머리를 베어 올 겁니다. 전하.”
호언장담하는 핀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두려움에 떠는 것은 오로지 릴리 저 하나뿐인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그렇게 되리라 믿는 걸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하는가. 만의 하나라도 카르낙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왕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그와 그의 병사들은 머리가 잘린 채 캘던에 효수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불안에 떨지 않는가. 왕의 목숨이 귀하지 않다면 잘려 나갈 제 목숨은 귀히 여기는 것이 사람일 텐데, 그 불확실함 때문에라도 피가 마르고 초조해야 마땅할 텐데. 그럼에도 핀은 침착했다. 굳은 낯빛으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있었다.
“두고 보세요.”
그리고 머지않아 해가 질 무렵, 카르낙 발투만이 숲을 수색하러 들어간 캘던의 근위병들과 함께 돌아왔다. 핏물을 뒤집어쓴 채 한 손에는 우두머리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핀이 말한 대로였다.
환희인지, 공포인지 모를 것이 릴리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무엇이라 칭하든 그것은 분명 전율이었다. 그녀의 세계 한쪽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무언가는 바뀌어야 할 때였다.
***
놈의 머리는 원형 간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일행은 천막을 치기 시작했고 카르낙에게 필요한 세숫물과 과일주, 염장된 고기와 오트와 우유를 섞어 만든 스튜 등이 재빠르게 상위에 올랐다. 모닥불이 피워지고 피 묻은 왕이 갈아입을 깨끗한 옷도 마찬가지로 준비되었다. 핀이 고통스럽게 구겨진 투로의 머리를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놈이 하게너의 영지에서 추방당한 투로라고?”
카르낙의 손과 얼굴을 씻은 물은 금방 혼탁한 핏빛으로 변했다. 그는 물기를 닦은 수건을 아무 곳에나 던지며 대답했다.
“그래.”
“네 손으로 투로를 죽였군.”
피가 빠져나간 그것은 푸른빛을 띠었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가 흐렸고 정말 잘린 사람의 머리라기보다 두상만 조각해 놓은 석고처럼 보였다.
원하지 않던 일이다. 제 손으로 형제를 죽일 줄은 몰랐다. 그들 때문에 엘버그의 왕이 되었건만 제 손으로 투로를 해쳤다. 굳건하게 지켜 온 ‘절대로 투로는 단죄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념이 깨진 것이다.
“내가 쉽게 생각했어.”
억압받는 투로가 모두 선량한 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고통과 증오가 사람을 얼마나 비틀어 놓는지는 자신도 겪어 보아서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함께 고통을 겪은 이들에 대한 동질감은 있을 거라 믿어 왔다.
함께 고난을 겪어온 형제에 대한 아주 강한 유대감 같은 것 말이다.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세상은 그보다 복잡하고 잔인하고 어려운 데도 철없이 허상을 좇은 것이다. 모든 투로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모두 전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더는 음지에 숨어 고통받으며 살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 동등한 기회를 가지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차라리 누군가를 나락에 떨어뜨리기는 쉬웠다.
엘버그인들을 사막에 버리는 것처럼, 핍박하고 고통을 주는 것은 그랬다. 그러나 이미 고통에 인이 박여 그것이 인생이 되어 버린 이들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어둠 속에 작은 빛이 보여도 그것이 빛인 줄도 모를 테니 말이다.
“네가 모든 투로를 구원할 수는 없지, 카르낙.”
“알아.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그는 허탈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모르겠어. 젠장, 내가 왜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지?”
계속해서 칼을 휘두른 이유. 계속해서 엘버그인들을 죽인 이유. 땅따먹기 하듯 점령지를 하나씩 늘린 이유. 그것은 적어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 더는 부당한 이유로 고통받지 않을 권리 그것을 위해서였다.
힘들 때가 찾아오면 그는 이스바를, 로로를, 자신의 형제들을, 투로를 생각했다. 다시는 그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노라, 다시는 고통 속에 떨어지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리하여 세상을 발아래 두고 싶었다. 자신의 발아래, 투로의 발아래. 모두를 밟고 서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자신의 가치를. 형제들의 가치를. 투로의 가치를.
그러나 단단하다 믿어 왔던 신념은 그 뒤꿈치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목적지를 잃은 것만 같았다. 투로가, 투로를 죽일 수 있다면…. 투로가 투로에게 적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럴 이유가 없다. 왕이 될 이유도, 엘버그를 제 발아래 두어야 할 이유도.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아갈 필요도 없다. 무엇을 위한 광기였는지 무엇을 위한 분노였는지 이젠 모르겠다.
“그냥 강도 놈들일 뿐이야. 큰 의미를 둘 필요 없어.”
핀은 카르낙의 어깨를 두어 번 도닥이더니 우두머리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이건 어떻게 할 거야?”
“…자할에게 가져갈 거야. 놈들에게 들은 말의 진위를 확인해야지.”
“그럼 이건 일단 내가 가져가지. 왕비 전하께서 무서워하실 테니.”
“…….”
핀이 그대로 천막을 빠져나갔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노랗고 붉은빛이 카르낙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잠시 후 릴리가 물그릇을 들고 천막으로 들어왔다. 분명 핀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것이리라. 그녀는 카르낙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물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른 천을 물에 적신 후, 릴리는 그것을 제 남편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미처 닦아 내지 못한 핏물 얼룩들이 아직도 산재했다.
카르낙이 부드럽게 제 목덜미를 닦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작한 불길에 머물렀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릴리, 손이 떨려.”
“…….”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릴리는 아직도 겁에 질려 있었다. 한순간 제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엘버그의 왕을 밀림에 버려 둔 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녀는 결코 핀처럼 카르낙의 강함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려웠다. 만일 그를 잃는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모래 폭풍으로 그를 잃을까 걱정하던 때와는 달랐다. 지금은 그때처럼 이성적일 수 없었다. 침착할 수가 없었다. 현명해질 수가 없었다.
핀은 앞으로도 몇 번이나 이런 상황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무뎌질 수 있을까. 그때마다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질까. 견딜 수 있을 만큼 강인해질까.
“릴리.”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내를 불렀다. 그 덕에 눈물이 터졌다. 릴리는 울며 카르낙의 목에 매달렸다. 갑작스러운 포옹이었다. 제 옷과 피부에서 피비린내가 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카르낙은 기꺼이 제 아내의 허리를 안고 떨리는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난 괜찮아. 멀쩡해. 정말이야.”
“미안해요, 칼. 다시는, 다시는 무언가를 보고 싶다고 고집 피우지 않겠어요.”
“사실 넌 고집 피운 적 없어.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건 나니까.”
거기에 부득불 둘이서만 가겠다고 우긴 것도 카르낙 본인이었다. 물론 아주 크고 훌륭하고 음흉한 계획이 있었지. 비록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그렇다면 다시는 무언가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렸다. 목덜미와 어깨가 뜨끈하게 젖어 갔다. 피와 같은 온도일진대 스며드는 감촉은 아주 달랐다. 따듯하고 감미로웠다.
“그건 곤란해, 릴리. 나는 네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모습을 아주 좋아하거든.”
“호기심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이제 알았어요.”
“그리고 그 호기심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지. 네가 현명한 것은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야.”
“아주 멍청한 호기심이었어요. 전 멍청이고요.”
“…….”
카르낙이 그녀를 품에서 떼어 냈다. 훌쩍거리는 모습이 보고 싶어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올렸다. 붉게 충혈된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왜 기쁜 것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기뻤다.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늘 멀고 높았던 것만 같던 릴리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이제야 온전히 그녀를 가진 것 같았다. 그녀를 안을 때조차 느끼지 못했던 충만함이었다.
“멍청이라. 네가 멍청이가 될 때가 다 있군.”
그러자 릴리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릴리! 농담!”
“내가 이렇게 한심하기는 처음이에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어요!”
카르낙은 다시 제 아내를 품에 안았다.
“그거 알아, 릴리? 난 지금처럼 멍청하고 한심한 내 아내가 더 좋아.”
그러니 앞으로 더 멍청하고 한심해져도 좋아. 내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너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게. 그럼 너는 나를 떠나지 못하겠지. 그리고 그건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 거야, 릴리. 그러니 릴리, 언제든 지금처럼 울고 내게 매달려 줘. 내가 완벽해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