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덜컹, 하고 돌부리에 마차 바퀴가 걸렸다.
“아윽.”
릴리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했다. 엎어지지 않기 위해 그녀는 간신히 창틀을 부여잡고 이를 사리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마주 앉은 로로가 파리한 혈색으로 물었다.
“네. 괜찮아요.”
릴리는 애써 웃었다. 두피에 십중팔구 식은땀이 고여 있을 테지만.
“아침부터 영 낯빛이 안 좋으십니다. 혹여 간밤에 잠자리가 불편하셨나요?”
잠자리는 아주 편했답니다. 다만 잠을 자지 못했을 뿐이지!
“아니요. 로로. 아주… 아주 편했어요.”
최대한 생기 넘치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대답했다. 창밖으로 지난 밤 그녀를 탈진하게 만든 원흉이 보였다. 말 안장 위에서 여유롭고 리드미컬하게 말을 타는 그의 모습이 얼핏 지난 밤과 겹쳐 보였다.
허리를 쓴 건 저 사내이건만 왜 아작 난 건 나의 허리인가. 밤새워 움직인 건 저자이건만 왜 근육통을 앓는 것은 나뿐인가.
릴리는 이 불공평한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네스 여신은 인간을 잘못 창조한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육체적 고통을 한쪽이 이토록 일방적으로 감당해야 할 리가 없을 테니까.
“칼.”
릴리가 창밖으로 제 남편을 불렀다. 조금씩 앞서가던 카르낙이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췄다.
“하게너의 성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죠?”
“아직 멀었는데, 릴리. 지금 속도라면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더 가야 해.”
엘버그가 커다란 대륙인 것은 알았지만 말을 타고 도시 하나를 건너가는 데 닷새나 걸린다니. 그라타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곳에선 천천히 걸어도 하루 이틀이면 어디라도 도착할 수 있었는데.
덜컹, 마차 바퀴가 다시 돌부리에 걸려 흔들렸다. 숨이 턱 막혔다. 카르낙은 제 아내의 굳은 얼굴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괜찮아?”
“좀….”
릴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좀 쉬었으면 하는데요.”
“…….”
벌써? 출발하고 한 식경은 지났을까. 아직 그조차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전날 두말 않고 밤이 될 때까지 잘 참아 내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카르낙은 곧 죽어도 자신이 밤새 릴리를 들볶은 탓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멀쩡하니 응당 그녀도 멀쩡하리라. 그는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렬을 멈추었다. 작게 차양을 치고 릴리와 로로가 쉴 수 있도록 푹신한 의자와 테이블보를 깔도록 했다.
어쨌든 그는 아내의 부탁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큰일이 있지 않고서는 가능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고자 결혼한 순간부터 결심했던 바였다. 여행이 조금 더 지체된다 하여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릴리와 함께하기 위해 떠나온 여행이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사람들에게 마실 것과 간단한 과일을 내어 주는 동안 릴리는 마차 밖으로 나와 천천히 주변을 돌았다. 시종들이 앉아있을 간이 의자를 놓아 주었지만 앉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앉아 있는 것이 가장 힘들고 고되었다. 차라리 천천히 걷는 것이 나았다. 그러고 있으면 하반신의 욱신거림도 조금 잦아들곤 했다.
릴리는 불현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볕이 쨍한 하늘이었다. 그러나 분명 물 내음이 났다. 릴리는 제 손바닥을 들어 비벼 보았다. 분명 젖은 느낌이 났다. 그라타처럼 한순간 비가 쏟아졌다 다시 맑아지는 기후도 아니고, 사시사철 습한 지역도 아니건만 꼭 싸리비라도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카르낙은 의아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릴리에게 포도주 한잔을 건네며 말했다.
“폭포에 가까워진 거야. 릴리.”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그 거대한 폭포 말인가요?”
“그래, 그 폭포.”
그래서구나. 갑자기 습하고 우거진 산림이 나타난 것은. 카르낙은 이곳에 온갖 종류의 동식물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우린 그 폭포를 볼 수 있는 거죠?”
“아마도. 가까이 갈 순 없겠지만.”
“어째서요?”
릴리는 미간을 구겼다.
“첫째로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두 번째로는 물보라 때문에 시야 확보가 잘 안 되거든. 그 덕에 조금만 가까이 가게 되어도 온몸이 흠뻑 젖어. 꼭 물에 빠진 생쥐처럼.”
카르낙의 말을 들으며 릴리는 그라타에 있는 작은 계곡과 폭포수들을 떠올렸다. 떨어지는 수압에 깊게 파인 암석들. 그 깊은 수심에 투명한 물들은 짙푸른 색을 띠고는 했다. 소용돌이치던 물결들, 튀어 오르던 물방울들.
릴리는 사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가까이 가면 폭포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이렇게 멀리 있는데도 그 물방울들을 느낄 수 있다면 대체 그 폭포는 얼마나 거대할까. 릴리는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가까이 가 보고 싶어요.”
“폭포?”
“네,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얼마나 큰지, 얼마나 넓은지 그런 거요.”
카르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폭포가 한눈에 보이면서 가장 안전한 위치로 갈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사람들을 모두 데려갈 순 없어. 폭포를 보려면… 산길을 좀 올라가야 해. 말을 타고 갈 순 있겠지.”
카르낙은 릴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말은 한 필이면 될 것이다. 릴리는 가벼우니 저와 함께 타면 된다.
“네가 괜찮다면.”
“전 괜찮아요.”
“글쎄. 엉덩이에 가시라도 돋친 사람처럼 굴어서. 말은 마차보다도 더 힘들 텐데?”
“대신 오늘 밤에는 폐하께서 제가 잠을 푹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요.”
“좋아. 생각해 보지.”
카르낙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려면 서둘러야 해, 릴리. 서두른다면 해가 지기 전에 폭포를 볼 수 있으리라 장담하지.”
릴리는 기쁘게 잔을 비우고 그것을 카르낙에게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언제 앓았냐는 듯 생기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문제없어요.”
아내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 카르낙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
자할은 성의 망루에 서서 메마른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카르낙 발투만이 먼지를 일으키며 하게너성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상상했다.
“자할!”
성벽 아래의 우렁찬 목소리가 산통을 깼다. 자할은 가닥가닥 털실을 꼬아 묶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망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제대로 갑옷조차 입지 않은 백전노장의 자파가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물론 한 손에는 넘쳐흐르는 술잔을 든 채였다.
“벌써 망루에서 이제나저제나 카르낙을 기다리는 거야? 서방님을 기다리는 계집처럼?”
“넌 벌써 술이나 처마시고 있군, 자파? 네 허리에 차고 있는 게 술병인지 칼인지 확인이라도 한번 해 보지 그래!”
그러자 자파는 술을 들이켜며 깔깔깔 웃었다. 거품이 낀 에일이 그의 덥수룩한 검은 수염을 타고 후드득 흘러내렸다.
“그만하고 내려와, 자할! 어차피 올 놈이니 언젠가 오겠지! 그러지 말고 같이 술이나 마시자고!”
저 망할 주정뱅이. 자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는 엘버그의 왕이야! 그리고 우린 그의 명령으로 하게너성을 지키고 있단 말이야! 백날 천날 술독에 빠져 사는 모습을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허구한 날 술만 퍼마시는 건 아니잖아, 자할! 어쩌다 한 번씩 사막에도 가잖아. 안 그래? 놈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보살펴 준다니. 얼마나 자비로운 성주야?”
그래. 자비로운 성주지. 하게너는 사막에서 투로들이 죽어 가든 말든 그저 노예로 잡아가기에 급급했던 반면에 그래도 자신과 자파는 하루아침에 사막의 벌레 신세가 된 엘버그인들이 연명할 수 있도록 그들이 먹을 식량과 식수를 제공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가축만큼의 대접은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놈들을 팔아 그 목숨값을 챙길 수가 없었다. 그 빌어먹을 약골들. 엘버그인들은 사막의 벌레들처럼 강하지 못했다.
음식도, 물도 없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 과거 그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지를 못했다. 사막에 던져 놓으면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갖가지 이유로 뒈져 버렸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 빌어먹을 놈들을 보살필 수밖에. 그럼에도 그 벌레만도 못한 것들은 고마운 줄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런 나약한 놈들에게 지금껏 당해 왔다는 것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혼자 오는 게 아니야. 자파. 그는 로로와 그리고… 자기 아내를 데리고 온다고. 왕비 말이야.”
“그 알기어스 왕의 사생아 말이지?”
“그리고 로레인 하게너의 딸이지.”
“아. 그래 로레인의… 딸이지.”
자파가 입맛을 쩝 다시고 에일을 꿀꺽 들이켰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하얀 머리에 하얀 피부에 은빛 눈동자를 가졌대. 아마네스 여신의 화신처럼 보인다더군.”
자파는 자할의 불안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기어스의 딸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왕족은 늘 그런 생김새로 태어나지 않나. 새삼스러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게 뭐?”
“그 전설 알잖아. 알기어스 왕가의 전설. 지상의 불을 끄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낳은 거.”
“…그래. 알지. 첫 아이는 용이었다던가 뭐라던가, 그놈이 지상의 불을 끄고 어쩌고저쩌고 하다 뒈진 다음에 두 번째 아이로부터 알기어스 가문이 이어졌다며. 그게 뭐 어쨌단 거야? 알기어스 놈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설마 믿는 건 아니겠지?”
“…….”
자할은 말이 없었다. 설마. 자파는 눈을 굴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자할! 세상에 용이 어딨어! 신이 어딨고!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도 엘버그 땅만을 위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 아마네스 여신인가 뭐시깽이인가 말이야! 제 자식들이 투로의 사막에서 말라비틀어져 가는 걸 저렇게 두진 않겠지! 애초에 카르낙 발투만이 알기어스를 죽이게 놔뒀을 리가 있어?”
“…….”
“그러니까 그놈의 책 좀 그만 보라고 했잖아! 그런 건 나약한 엘버그 놈들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라니까. 애초에 태어나길 비실비실하게 태어난 놈들이 살고자 대가리깨나 굴렸나 보군! 네 놈이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동요하는 걸 보니까.”
언어란 것은 기본적으로 수 계산이나 하고 서신을 읽을 정도만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은 허약한 글쟁이들이나 방어 수단으로 파고드는 것일 뿐 태어나길 질기고 강인하게 태어난 자신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할은 하게너성을 차지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칼을 쓰는 날보다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붙잡고 있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로레인 하게너가 시집을 오면서 귀한 서적들을 하게너성으로 많이 들여왔다는 것은 언뜻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할이 그런 것을 탐닉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애초에 자할에게는 읽고 쓰는 법을 알려 주어선 안 되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샌님 같진 않았겠지. 그의 불안감이 그 로레인의 서적들에서 기인한 것임을 안다. 대체 거기에 뭐라 지껄여 놨길래 자할이 저토록 동요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파는 조만간 그 책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말겠다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