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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99화 (99/231)

99화

자기혐오와 절망감에 계속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너는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어. 너는 감히 슬퍼할 자격도 없어. 달달 떨리는 입술을 짓씹고 그녀는 서서히 가윗날을 좁혔다.

“세일린!”

방지기인 캐시가 나타나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막 뒷간에 다녀오던 참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세일린이 제 귀를 자르려 하는 모습이었다. 두 번 볼 것도 없이 뛰어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녀의 귀는 썰렸을 것이다. 귓등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니 눈앞이 아찔했다.

“이거 놔!”

세일린이 가위를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하루아침에 제 방지기가 달라졌다. 그 착하고 순하던 세일린은 어디에 가고 갑자기 반쯤 실성한 여인이 눈앞에 있다.

“너 미쳤어! 왜 이래!”

“이거 놔! 캐시! 난 벌을 받아야 돼! 벌 받아야 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처럼 착하고 순해 빠진 년이 벌은 무슨 벌! 네가 무슨 벌 받을 짓을 했다고!”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왜 이래, 대체! 뭘 용서 못 해, 뭘!”

캐시는 제 이를 사리물고 기어코 세일린의 가위를 빼앗아 그것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무너지는 세일린을 품에 끌어안았다. 지푸라기들이 구겨진 치마 아래에서 버석거렸다.

처참하게 울부짖는 세일린을 껴안고 캐시는 까닭도 모른 채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늘 차분하고 조용하던 아이가 왜 이러는 걸까.

“세일린, 너처럼 순해 빠진 계집이 어디 있다고. 네가 벌 받을 게 뭐가 있어. 남에게 해코지는커녕 우스갯소리도 잘 건네지 못하는 애가 무슨 잘못을 한다고.”

“…국왕 폐하를… 흠모해.”

그래서? 그게 뭐?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운단 말인가. 캐시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켰다.

“고작? 폐하를 짝사랑한다고 이 난리인 거야? 세상에…. 세일린! 폐하를 흠모하는 게 너 하나뿐인 줄 알아? 성에서 일하는 계집들은 다 겉으로는 티 안 내도 발투만 폐하 같은 사내를 다 꿈꾼다고. 폐하가 지나가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는 계집들이 몇인데! 셀 수도 없어! 원래 여자들이란 가장 강한 사내를 원하는 거야. 그게 본능이고 신의 섭리라고. 엘버그에서 가장 강한 사내는 발투만 폐하잖아. 그게 어떻게 죄가 되니!”

세일린은 캐시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도리질을 했다.

“달라, 캐시. 그것과는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 계집들이 사내에게 품는 마음이 다 거기서 거기지! 순해 빠졌다, 순해 빠졌다 했지만 이 정도로 순해 빠졌을 줄이야!”

“계속… 계속 생각했어. 계속… 질투했어. 폐하께서 내게 베푸는 친절이 왕비 전하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계속….”

내가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착각하고 싶었다. 착각하고 싶어 하니 어느 순간부터 꼭 그게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가 무서웠는데. 국왕 전하가 너무나 무섭기만 했는데. 제게 말을 걸어 제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카르낙 발투만의 탓이었다.

그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다정하게 제 이름을 묻고, 말을 걸고, 쓰다듬어 주지 않았더라면 제가 이렇게 열에 들떠 잠 못 이루고 하루 종일 애타게 그를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성큼 다가왔다. 너무나 성큼, 너무나 쉽게, 너무나 간단하게 저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

“자꾸만 바라게 돼. 자꾸만… 더 많은 걸 바라게 되고 말아.”

잔인하고 비정하고 천박한 벌레. 분명 저의 안에서 카르낙 발투만 왕은 그런 존재였다. 다가가고 싶지도 않은 사람.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 한 공간에 있기도 꺼려지는 사람.

그러나 실제로 본 발투만 왕은 어떻던가. 그는 전혀 다른 사내였다. 그는 격식이 없다. 선대의 왕처럼 교만하거나 나태하지도 않다. 그는 소탈했다. 호탕하고 사내다웠으며 또한 자비로웠다. 저 같은 무지렁이 시종에게도 그는 상냥하고 살갑게 대해 주었다. 카르낙 발투만은….

“너무 따듯해서… 숨이 막혀.”

그래. 따듯하고 때론 뜨겁다.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그의 부드러움을, 뜨거움을 세일린은 릴리의 곁에서 참으로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 그것을 갖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리 억누르려 애를 써도 그을 품는 자신이 밉고 무서웠다.

그는 널 사랑하지 않아. 세일린. 그가 네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네가 왕비님의 시녀이기 때문이야. 봤잖아. 아무것도 아닌 네가 폐하께 말을 걸었을 때 그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이미 겪어 봤잖아. 그러니 이제 그만해. 별 것 아닌 너 따위의 별 것 아닌 사랑. 거기에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지는 것은 오로지 너 하나뿐이야.

“세일린.”

캐시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왕은 수많은 정부를 둘 수 있어. 너도 알잖아. 알기어스 왕을 생각해 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품었나. 왕비의 시종이었다가 왕의 정부가 된 여자는 널리고 널렸어. 그러니까 괜찮아. 발투만 왕이 너를 품어도, 네가 그를 사랑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

세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넌 이해 못 해, 캐시. 네가… 네가 왕비 전하를 곁에서 모셨다면….”

캐시는 세일린이 파니릴리를 얼마나 위하는지 잘 안다. 세일린의 곁에서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주인에게 충실한지 늘 지켜보아 왔다. 착해 빠지고 딱한 계집애. 그러니까 너는 네 주인에 대한 사랑과 네가 열망하는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거로구나.

“내가 너무 더러워, 캐시.”

세일린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마음을 품은 내가 너무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

건장한 남자들이 여행을 위해 챙겨 둔 옷과 가방을 분주히 옮기느라 방 안은 다소 소란스러웠다. 제법 선선해진 날씨에 어깨 위에 망토를 두른 릴리는 에이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일린이 함께 갈 수 없다고요?”

“예, 전하.”

“어째서요?”

“고뿔에 걸렸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서늘해진 날씨 탓이지요.”

“많이 안 좋은가요?”

“그렇진 않습니다만 행여 멀고 고된 여정에 전하께 고뿔을 옮길까 염려가 되어서요. 전하께 옮기면 또 전하께서는 폐하께 옮기실 테고요.”

릴리는 에이가의 말에 수긍했다. 고뿔은 전염력이 높으니 분명 서로가 서로에게 옮길 테고, 안 그래도 여행길에 오르면 모두가 힘들고 고될 텐데 괜히 위험 부담을 떠안고 갈 이유가 없다.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쉽네요. 에이가도 세일린도 함께 가면 좋을 텐데요.”

“로로마저 성을 비우는 마당에 저라도 자리를 지켜야지요. 늘 그래 왔고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이가는 성을 비우는 법이 없었다. 왕이 자리를 비웠을 때 성을 지키고 방어하는 것은 왕비의 일이건만 에이가는 왕비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오롯이 그것을 감당했다.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에이가는 잔잔히 웃었다.

“대신 폐하께서 함께하시지 않습니까. 전하를 잘 돌봐 주실 겁니다.”

“제가 폐하를 보필해야지요,”

릴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본디 길을 떠나기 전 발투만 왕의 짐은 간소하였다. 옷은 한두 벌이면 족했고, 그 외에는 따로 챙길 것이 없었다. 허리에 찬 자신의 검과 방패면 충분했다.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병사들을 먹이고 입힐 갑옷과 식량, 피곤을 달래 줄 에일과 비와 눈을 막아 줄 천막 등이었다.

그 때문에 행렬은 길어도 챙겨 가야 할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달랐다. 첫 번째로는 이 행렬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때에는 파니릴리가 없었다. 여인 한 명이 늘어났을 뿐인데 그에 딸려 오는 것들은 엄청났다. 옷도, 음식의 재료도, 함께하는 시종도, 간이 천막의 재질과 그 안에 들어갈 물품도 모두 전과는 달랐다.

“이래서 전쟁터에는 여자를 데려가지 않는 거야.”

“유랑이잖아. 즐기라고.”

핀이 끊임없이 수레에 올라가는 짐 더미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고 카르낙은 눈으로 행렬을 정비하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 유랑의 끝에 결국 테이먼 테르조와 마주하겠지. 밤마다 허튼짓 말고 왕비님께 검술이라도 가르쳐 두는 게 어때? 만약을 위해서.”

“그럴 필요 없을걸, 핀.”

카르낙은 제 오른팔이자, 근위 대장이자, 심복인 핀을 향해 해맑게 웃었다.

“네 놈이 사력을 다해 지켜야 할 사람이니까.”

왕의 말이 맞다. 카르낙 발투만은 저 혼자도 능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장이었다. 그러니 위기가 닥쳤을 땐 놈이 신나게 사람을 썰도록 놔두면 된다. 카르낙 발투만이 뒈질 때쯤엔 아마 승세가 기울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싸움이 될 테니까. 그러니 왕의 심복이자 근위 대장인 자신은 왕이 아닌 왕비를 지켜야 했다.

“어떻게, 왕비님이 마차에서 내리실 때마다 엎드려 발판이라도 되어 드려?”

“당연하지. 상시 대기하라고. 발 닦개.”

카르낙은 제 할 말을 마치자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유쾌한 걸음걸이에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괜한 도발에 듣지 않아도 될 말까지 들은 핀은 분통이 터져 혼자 ‘으’ 하는 소리를 냈다. 긁어 부스럼이었다. 으, 저 염병할 놈.

파니릴리는 에이가와 작별의 포옹을 했다. 그녀가 탈 마차는 창문이 여덟 개나 되었고 여덟 마리의 건강하고 새하얀 백마가 매어져 있었다. 세일린은 성문 안쪽의 한 귀퉁이에 숨어 떠날 채비를 하는 왕과 왕비를 몰래 지켜보았다.

파니릴리는 평소와 같았다.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제 손길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부족하거나 모자란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해. 당연하다. 누가 파니릴리를 모셔도 응당 저보다 부족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카르낙 발투만. 아내의 곁에 서서 그녀가 성에 남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왕은 여전히 완벽했다. 크고 새까맣고 늘씬하며 단단해 보였다. 소년처럼 맑고 깊은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저 멀리서도 보이는 듯했다. 오뚝한 콧날 아래 그늘져 있는 보기 좋은 크기의 입술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겠지. 제 아내의 곁에서는 늘 그러듯.

세일린의 곁으로 세바스탠이 다가왔다. 성을 비우는 발투만 왕 내외의 여행길에 인사를 고하러 가는 제 스승을 따라 나왔다가 벽 뒤에 숨어 있는 세일린을 발견한 터였다.

“누굴 몰래 보고 있는 겁니까?”

세바스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세일린이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홱 몸을 돌렸다. 벽을 짚고 더듬대는 꼴이 수상하기 이를 데 없다.

“왕? 아니면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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