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해가 지자 세일린은 곧 침실로 돌아올 왕 내외를 위해 커튼을 치고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그러는 동안 몇몇 시종이 들어와 물그릇과 물병, 잘 건조된 리넨 천을 준비해 두고 질 좋은 포도주와 잔, 얼마의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세일린 님, 또 준비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시종들이 다가와 물었다. 세일린은 세숫물과 다과가 잘 차려져 있는지 확인한 후 대답했다.
“이만하면 되었어. 그리고 이제 곧 두 분께서 여행을 떠나실 테니 부츠와 구두를 정비해 두는 것이 좋겠다.”
“네, 세일린 님.”
“나가 보렴.”
세일린은 품에서 벨벳 천을 꺼내 들었고 시종들은 옷장을 뒤져 왕과 왕비의 신발을 품에 가득 안은 채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파니릴리의 화장대에 앉아 화려하고 정교한 자수로 장식된 보석함의 뚜껑을 열었다. 붉은색 실크를 덧대어 귀한 물건이 흠집 나거나 엉키지 않도록 조치해 놓은 보석함의 내부에는 아름다운 목걸이와 귀걸이, 그 밖의 장신구들이 저마다 눈부시게 발광하고 있었다.
왕비의 장신구를 만질 수 있는 것은 세일린 저뿐이었다. 그만큼 세일린에 대한 파니릴리의 신뢰는 무한했다. 왕비는 당신의 시종을 종으로 대하지 않았다. 언제나 친구로 대했다. 성안의 모든 일꾼들이 그러한 세일린의 처지를 부러워하지만 당사자인 그녀로서는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토록 고결하신 분에게 신뢰와 애정을 얻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죄악감마저 들었다. 너무나 과분한 처사였다. 그 때문인지 요 근래에 자꾸만 파니릴리를 대할 때면 마음이 아팠다. 기분이 착 가라앉고 슬픔이 스며들고는 했다.
세일린은 진주와 자수정으로 장식된 커다란 브로치부터 닦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 중에 특히 보석을 닦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매끈거리는 감촉도 좋았고 성심껏 문지를수록 더욱 광택이 나는 것을 볼 때면 뿌듯하고 보람되기도 했다. 또 가만히 앉아서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멍해지는 것이 싫었다. 멍해지면 자꾸만 잡생각이 들고, 그러면 한없는 자기혐오에 빠져들어 버려서. 다음으로는 오팔로 만든 귀걸이였다. 엄지손톱만 한 푸른 돌멩이는 우아하고 단정하였다. 세일린은 얼마 전 릴리가 이 귀걸이를 착용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날 카르낙 발투만은 제 아내의 목덜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새하얀 피부와 목덜미에 흘러내린 비단 같은 머리카락 몇 올이 어우러져 정말로 아름다웠지. 세일린은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볕에 그을려 거칠고 푸석한 피부, 콧등에 자리 잡은 주근깨. 남들과 다를 것이 없는 푸르고 탁한 눈동자. 황갈색 머리카락을 꼭꼭 감싼 누런 리넨 베일. 그나마 내세울 것이라고는 예쁜 콧방울과 작고 도톰한 입술뿐이었다.
나 같은 계집은 발투만 폐하 같은 멋진 사내와 맺어질 일이 없겠지. 어울리는 상대라고 해 보았자 상인의 아들이거나 아주 잘 쳐주어도 찢어지게 가난한 귀족의 막내아들 정도일 것이다. 허드렛일이나 하는, 무엇 하나 엘버그의 남성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보잘것없는 자신이 꿈꿀 수 있는 상대라고는 그 정도였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보잘것없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잘것없는 자와 결혼하여 보잘것없는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겠지.
조금이라도 아름다웠더라면, 왕비님같이 하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아니면 왕비님처럼 투명한 회색빛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그러면 내 삶은 조금 더 희망적이었을까. 발투만 왕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사내와 맺어질 수 있을까.
세일린은 릴리의 오팔 귀걸이를 제 귓불에 대 보았다. 은은한 조명에 반짝이는 빛깔이 영롱하였다. 그 빛 때문일까. 제 푸석한 얼굴이 제법 깨끗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오팔과 비슷한 제 눈동자의 색도 어쩐지 깊고 맑아 보였다. 세일린은 홀린 듯 귀걸이를 제 귓불에 걸고 나머지 한쪽도 착용했다.
얼굴을 양쪽으로 돌릴 때마다 귀걸이가 낭만적으로 흔들렸다. 세일린은 시선을 보석함으로 내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와 잘 어울리는 목걸이를 찾고 있었다. 마치 릴리의 눈동자 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들어 제 쇄골 근처에 대 보았다.
아… 이러니 조금 더 귀부인 같다. 제법 우아하고 고상해 보인다. 볼에 홍조를 덧그리고 장미를 갈아 만든 크림으로 입술을 붉게 물들이면 더욱 근사할 것 같았다. 그러면 제법 얼굴이 하얘 보이지 않을까. 그러면 발투만 왕이 혹여 자신에게 더 시선을 주진 않을까. 마치 파니릴리를 보는 것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뜨거운 시선으로.
“그런다고 네가 파니릴리 왕비님이 되는 것은 아니란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였다. 세일린은 ‘히익’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손에 있는 목걸이뿐 아니라 닦기 위해 열어 놓은 보석함마저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세일린은 감히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입을 뻐끔거리며 몇 번 뒷걸음질 쳤다. 화장대에 가로막혀 더는 갈 곳이 없자 모서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에이가는 어느새 침실에 들어와 기둥 옆에 서 있었다. 깊게 주름진 얼굴은 빈틈이 없었고 가지런히 모아 잡은 두 손은 침착하기 짝이 없었다.
“저… 저는….”
세일린은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저는… 그저….”
“네 변명은 듣고 싶지 않다, 세일린.”
“죄송합니다.”
부끄러움에 세일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네가 오늘 한 일들을 되돌아보자면 당장 너를 쫓아내도 할 말이 없을 거다. 폐하께 감히 먼저 말을 건네는 것도 모자라 이젠 왕비님의 귀중품까지 탐하려는 거야? 욕심을 부려도 정도껏 부려야지. 어디까지 분수를 모르고 올라갈 테냐.”
“죄송합니다, 에이가 님.”
최악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주인의 것을 탐하는 종. 이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다. 당장 거리로 내쳐져도 할 말이 없다. 그렇게 되면 더는 자신을 하녀로 써 줄 집도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리에서 굶어 죽거나 사창가로 들어가 창부가 되는 것뿐이다. 단 한 순간의 실수로 그녀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질 터였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너는 파니릴리 왕비님께서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종이다. 혹여 너의 행동이 전하에게 큰 상심과 슬픔을 안겨 줄까 두렵다.”
“…….”
세일린은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보석들을 잘 정리해 두거라. 그리고 내게 맹세해야겠다, 세일린.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왕비 전하의 것을 탐내지 않겠다고. 절대로.”
물론이다.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거다. 절대로, 절대 없을 거다. 그리하여 세일린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바로 맹세하렴.”
“네, 에이가 님. 반드시….”
정확하게 확답을 받으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릴리는 카르낙과 즐거운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며 그가 열어 준 방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걸음도 대화도 멈췄다. 장작 타는 소리와 벽난로의 열기가 훈훈한 방 안에서 에이가와 세일린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바닥에 쏟아진 보석들, 황망하게 흔들리는 세일린의 눈동자, 그녀의 귀에 달랑거리는 오팔 귀걸이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에이가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얼른 나섰다.
“처… 청소를 하다 실수로 보석함을 쏟아서요. 오팔 귀걸이가 혹시나 망가졌을까 싶어 제가 한번 착용해 보라 했습니다.”
“저런, 다친 곳은 없나요?”
릴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카르낙은 어디까지나 관망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의 무감한 눈동자에도 세일린은 숨통이 조였다. 그러다 릴리의 순수하고 정직하며 그 어떤 불결함도 묻어 있지 않은 진지한 표정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진실로 부끄러웠다. 에이가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세일린을 대신해 답했다.
“네. 다행히 다 무사합니다. 앞으로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던 차였습니다.”
그러자 릴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치지 않았으면 되었어요. 그나저나 귀걸이가 정말 잘 어울리네요, 세일린. 진작에 그것을 선물할 것을 그랬나 봐요.”
부끄럽다. 너무나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조차 없다. 대체 무엇을 탐내었던 건가. 감히 말도 안 되는 것을…. 주제도 모르고 감히…. 넘보아선 안 되는 것을. 그럴 자격조차 없는 계집이 감히….
릴리의 다정함이 세일린에게는 독과 같았다. 그녀를 하염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정리하거라, 세일린.”
에이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세일린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녀는 안다. 자비롭고 상냥한 주인을 모신다는 것은 때론 악하고 모진 주인을 모시는 것보다 더 괴롭기도 하다는 것을.
인간의 본능이란 그토록 간악한 것이다. 불완전한 피조물이기에 끊임없이 악마가 찾아와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타락하기를 종용한다. 그것을 이겨 내기란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것처럼 어렵고 고되다.
보석함을 정리하며 세일린은 손을 떨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차오르는 죄악감, 부끄러움, 자기혐오감, 수치심, 모멸감…. 차마 밖으로 쏟아 낼 수 없는 감정들을 속으로 삼키며 그녀는 릴리의 종으로서 그 방을 나설 때까지 제 역할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방문을 닫고 나자 차분함을 가장한 가면은 순식간에 균열하여 산산이 조각났다. 그녀는 제 손등으로 입을 막고 무작정 뛰었다. 어딘가에 이 더럽고 모난 감정을 쏟아 내고 싶었다. 현기증이 일 만큼 어지러운 탑의 계단을 몇 개나 내리고 올랐을까. 축축하고 눅눅하며 습기가 가득한, 어둡고 초라한 제 방이 드디어 보였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습기를 막기 위해 바닥에 깔아 둔 건초 더미 위에 구역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분명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쏟아졌을 테다. 향도 없고 색도 없고 형태도 없으나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역하고 끔찍한 것들이었다.
더러워, 더럽다. 어떻게 네가 감히. 어떻게 네가 감히 파니릴리 왕비님께 이럴 수 있어. 네가 어떻게….
세일린은 미친 사람처럼 제 침대 아래를 뒤졌다. 바느질감을 넣어 둔 함을 열고 손에 집히는 것은 아무것이나 다 끄집어냈다. 매일 밤 파니릴리를 위해 바느질을 했다.
자수를 놓은 하찮은 리본 하나에도 기뻐하는 주인을 위해, 자신에게 귀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사람들과 나누려는 사랑스러운 왕비님을 위해. 그러나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한 순간의 욕망이 모든 것들을 다 쓸모없게 만들었다. 감히 탐해서는 안 될 것들을 탐했기 때문이다.
“귀걸이가 정말 잘 어울리네요, 세일린.”
세일린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진작에 그것을 선물할 것을 그랬나 봐요.”
세일린은 날카로운 가윗날을 제 귀에 가져갔다.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할 수 없다. 너의 더러움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다시는 탐하지 못하게 벌을 내려야 한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감히 왕비님의 것을 탐하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