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목욕을 끝낸 후부터 카르낙은 내내 음악당에 처박혀 있었다. 에일이 가득 든 항아리는 계속해서 비워졌고 시종들은 채워 넣기에 바빴다. 리오에서 보내온 신선하고 진귀한 과일을 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악사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채 그를 위해 류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새 세속 음악 몇 곡이 추가되어 악사의 연주는 더욱 다채로워졌고 본인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도 새로운 곡조를 중간중간 넣어 가며 성심껏 노래했다.
“순백의 아가씨 어젯밤 꿈에서 그대를 보았소. 장미 꽃잎에 물든 어여쁜 손끝으로 나를 어루만져 주었소. 눈을 뜨면 그대는 햇살과 함께 사라지니 어둠과 함께 찾아오는 순백의 아가씨 영원히 눈뜨지 않도록 해 주오.”
“그 순백의 아가씨가 누구야?”
평소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세속 음악의 가사에 왕이 반응하였다. 악사는 놀라 띠링, 하며 류트 연주를 멈추었다. 카르낙이 다시 물었다.
“순백의 아가씨가 누굴 어루만지는 건데?”
“예, 폐하… 그것은… 그러니까…”
악사가 말을 고르며 더듬거리자 카르낙이 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혹시 파니릴리인가?”
“노래라 하는 것이 딱히 누굴 꼬집어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이것은 그러니까 어떤 비유의 하나로서… 순백의 아가씨란…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이 나라에 순백의 아가씨가 파니릴리 말고 또 누가 있어. 하얀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는 그녀 하나뿐이잖아.”
“물론… 왕비 전하에 대한 숭배와 경애에 대한 마음도….”
“가사가 저급해. 그 노래는 이제 금지다. 부르는 놈은 모조리 지하 감옥에 처넣겠어.”
악사는 왕의 기세에 눌려 꿀꺽 침을 삼켰다. 세속 음악이 다 그런 것이지. 지금껏 불러 왔던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음악인데….
순백의 아가씨란 엘버그의 상징 같은 존재 아닌가. 여인이 부르는 노래에는 반드시 ‘순백의 기사’가 등장하듯 남자가 부르는 노래에는 반드시 ‘순백의 여인’이 등장한다. 엘버그에서 순백의 사람이란 남녀노소의 이상향과 다를 바가 없는데 그것을 부르지 말라 하면 그럼 어떤 노래가 남지? 남는 노래가 없다.
“다시 해. 다른 노래로.”
제기랄. 하나 해결하면 다른 하나가 문제고, 다른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하나가 문제고. 이놈의 궁정 악사도 생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속으로 잔뜩 험한 말을 하면서도 혹시나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그는 류트를 치며 같은 반주를 무한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류트의 음정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카르낙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술잔을 홀짝였다.
그만하고 싶다. 인제 그만 자고 싶다. 밤이 꽤 늦은 것 같은데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국왕 비위 맞추기가 너무 어렵다. 하지만 맞춰 주지 않으면 목이 달아나겠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의 비위를….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데 마침내 아마네스 여신이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했는지 그의 연주를 멈추어 줄 구원자가 등장했다. 악사는 곧바로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왕비 전하.”
그 말에 카르낙이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절반은 헛소리란 생각에, 절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러나 헛소리를 한 것도, 헛것을 본 것도 아니었다. 깨끗한 슈미즈에 부드러운 실크 가운을 걸친 여인은 분명 파니릴리였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모두 마친 듯 차림새는 정결했으며 윤기가 흐르는 은색 머리는 한 올 한 올 정성껏 빗어 내린 듯 차분하였다.
카르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릴리가 먼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저의가 무엇이든 그녀에게 잔인하게 굴었고 상처를 주었다. 카르낙은 자신의 행동이 옳다 여기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던 건지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 릴리는 악사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음악당 밖으로 사라지자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셔서요.”
평소와 다름없는 상냥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카르낙은 제 이마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미안해.”
사과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나왔다. 카르낙은 파니릴리의 방문에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평소와 같이 상냥하다는 것이, 그녀가 저에게 실망하고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그를 안도하게 하고 또한 평화롭게 하는지 말이다.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어.”
두 번 다시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았지. 너는 내게서 도망가고 텅 빈 침실에 들어서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워 자신은 이렇게 숨어 있는데 그녀는 대범하게도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나약하고 비겁한 자신이. 상처받을까 두려워 그녀에게 상처를 준 자신이. 그러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장난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철없는 행동을 한 자신이 한없이.
“릴리, 난…. 난 너와 있으면…”
카르낙은 잔머리로 헝클어진 제 이마를 초조하게 긁으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 내가 너무….”
그래. 맞아. 너와 있으면. 난 너무도…
“낯선 사람이 되어 버려.”
모두가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었다. 한 번도 들어서 본 적이 없는, 모든 것이 생경한 세상 속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가슴이 뛰고 무섭고 설레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진다. 지금까지의 자신은 어디 가고 전혀 모르는 자아가 들어선 것 같았다.
중심을 잡을 수가 없고, 늘 휘청거리고, 이리저리 쓸려 다니며 아주 작은 바람에도 여지없이 흔들리고 만다. 어디에 표류할지 모르는 돛단배처럼 그저 망망대해에 서 있는 기분.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결국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저는….”
릴리는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늘 순종적인 아내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천성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런 시늉이라도 하고자 진심으로 노력해요.”
나는 그녀가 순종적인 아내이길 원하는 걸까. 아니.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순종적인 아내 파니릴리가 아니다. 한 번도 그러길 원한 적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그저 네가 내 곁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이다. 틈 없이 몸을 맞붙이고 죽는 날까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다짐을 받고 싶다. 신의를 지킬 줄 아는 여자이니 맹세를 얻고 싶다. 절대로, 절대로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언제나 곁에 머물겠다는, 언제나 함께하겠다는, 당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곁에 있겠다는.
그러나 그녀가 행여나 그럴 수 없노라 답할까 봐, 혹여나 찰나의 망설임이라도 보일까 봐 겁이 나 물을 수조차 없다. 언제나 넌 그라타를 꿈꾸니까, 너는 이 여행이 끝나면 네 고향으로, 네가 바라는 삶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겁쟁이라는 것을, 그렇게나 욕심 많고 분수를 모르는 사내라는 것을 너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순간들도 있어요.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하거나 인내가 다한 순간들이요.”
“널 탓하지 않아, 릴리.”
“손찌검해서 죄송해요.”
“…….”
“믿어 주실지 모르겠지만 살면서 한 번도… 한 번도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 없어요. 잠시 이성을 잃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릴리, 네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어. 그녀의 화를 돋운 것은 자신이었다. 막무가내로 입을 맞추려 들고 그녀의 가장 소중한 이들을 죽이겠노라 협박하였다. 그러니 영영 저를 보지 않겠다 하더라도, 영영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너는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마땅히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다.
카르낙은 낮은 목소리로 짧고 조용히 답했다.
“믿어.”
“…….”
“네 말을 믿어.”
“…….”
“넌 다른 이를 해코지할 사람이 아니지. 그에 비해 난 피를 뿌리며 올라온 이 자리를 지키려고 또다시 다른 이들의 피를 뿌려.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아무리 더럽고 비열한 짓이라도. 그러니… 너는 내게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너를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 의자 등받이를 짚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그러니까… 네가….”
그는 쉽사리 뒷말을 잊지 못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바닥을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곧은 시선을 옮겼다. 마치 유리관 안에 들어 있는 한 줄기의 꽃송이 같은 눈빛이었다. 미약하고 투명한 것에 둘러싸여 작은 흔들림이나 바람에도 금방 허물어져 버릴 듯 위태로웠다.
“날 때려도 좋아, 릴리. 다만, 다만 날 싫어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
“내가 밉더라도… 그래도 날 싫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커다랗고 견고하고 무감해 보이는 그 안에 상처받고 고통받은 나약한 벌레가 있음을 릴리는 안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다만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가시 돋친 벌레가.
“싫어한 적 없어요. 그저 조금….”
릴리는 잠시 눈을 굴리며 과거를 되짚었다.
“조금 미운 적은 있었지만요.”
그 말에 카르낙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너무나 쉽게 그녀의 마음이 허물어진 것 같아 걱정이 되건만 그래도 웃음이 났다. 안도했고 기뻤다.
릴리가 걸음을 떼었다. 카르낙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릴리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품에 안겼다. 카르낙은 제 아내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따듯하고 달콤한 체취를 들이마셨다.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떡하지.
“내내 손바닥이 얼얼했어요. 폐하의 뺨을 때린 건 나인데… 손바닥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해치는 이에게도 상처는 남는다는 것을요. 폐하께도 상처가 있겠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무수히 상흔이 남겠지요. 고통스러운 길이에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길일 테지만 그래서 더 간절히 빌어요. 카르낙 발투만이 행복해지기를.”
아아, 릴리.
네가 조금만 덜 눈부셨다면….
그렇다면 이토록 너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