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카르낙은 장담했다. 엘버그와 조금도 맞지 않는 파니릴리의 본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 주고 배려해 줄 사람은 오로지 투로인 자신뿐이라고. 그녀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뜻을 같이해 줄 사람도 오로지 자신뿐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널 지켜 줄 사람도 오로지 나뿐이야. 네 여종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증명해 보세요, 그럼.”
“뭘 어떻게 하란 거야.”
“사과하세요.”
“뭐?”
“사과하시라고요….”
“…지금 왕인 내게 사과하라고 하는 거야?”
“사과를 하시면 제가 대신 세일린에게 전해 주겠어요”
미친 건가, 이 여자.
“정신 나갔어?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 난 왕이야. 왕은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아.”
“그럼 나가겠어요.”
릴리가 그에게서 몸을 돌리려 했다. 카르낙은 그러지 못하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문에 밀어붙였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또 등을 돌리려는 행동을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젖은 머리에서는 여전히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때문에 하루 종일 머리가 복잡해. 그 때문에 시간만 낭비해서 아주 기분이 더럽다고.”
“그럼 좀 참아 보시지 그래요. 저는 누구 때문에 늘 그러거든요.”
분명 비아냥거림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 릴리. 만약 그 말을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으면 지금쯤 주먹이 날아갔을 거야.”
“해 보세요, 그럼. 때려 보시라고요. 그럼 난 성벽을 타고 도망가 버릴 테니까.”
카르낙이 릴리의 어깨를 당겼다가 세게 문으로 밀었다. 쿵 소리를 내며 어깨가 문에 부딪혔다. 릴리의 콧등이 경미하게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말조심해. 난 투로야, 잊었어? 난 비루먹은 벌레 새끼라고. 너 같은 거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어.”
그가 어금니를 씹으며 경고했다. 그러나 릴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나도 안 무서워요.”
진심일 것이다. 무섭지 않다는 말은. 릴리는 굴복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자기 스스로가 몸을 낮출지언정 그 누구도 강제로 그녀의 무릎을 굽힐 수는 없다. 오직 카르낙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온전한 아내가 되는 것뿐이다.
그녀를 완전히 소유하여 더는 그녀가 저에게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파니릴리를 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왜 그녀는 제 마음을 이토록 몰라 주는가.
내내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다가 왜 한 번씩 이렇게 토라져서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이런 때가 되면 왜 이렇게 잔뜩 뿔이 난 망아지처럼 굴어 제 손에 쉽게 잡히지가 않는 건지. 사실 카르낙은 릴리가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상관이 없다.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할퀴는 것도 상관없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그는 상관이 없었다.
떠나겠다는, 그에게서 달아나겠다는 그 말만 빼면. 뭐든지 말이다. 제 입으로 말한 것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행하는 이라는 것을 안다. 대쪽 같고 올곧고 그래서 더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여자. 너를 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를 꺾으면서 동시에 네가 시들지 않게 하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네가 도망가면 세일린을 죽일 거야.”
“…….”
손아귀에 붙잡힌 가녀린 어깨가 움찔 떨렸다. 카르낙은 광기에 차 말을 이어 갔다.
“못 믿겠으면 도망가 봐. 에이가도 함께 죽여 버릴 테니까.”
릴리는 분을 이기지 못해 다시 한번 철썩 그의 뺨을 휘갈겼다. 또다시 카르낙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릴리의 어깨가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보내 줘요.”
경고하는 릴리의 목소리가 그녀의 어깨처럼 위태롭게 떨렸다. 가쁜 그녀의 호흡이 곧 깨질 것처럼 여렸다. 카르낙은 그것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쩜 이리도 한결같은지. 그래서 내가 널 원하지, 릴리. 무결하고 순수하고 너무도… 투명해서.
카르낙은 그녀의 턱을 잡고 억지로 입을 맞췄다. 릴리는 읍, 하고 입을 닫고 그를 밀치기 위해 몸부림쳤다. 카르낙이 그녀의 위아래 입술을 차례대로 빨았다. 혀를 넣어 보고 싶었지만 지금 기세로는 그의 혀를 씹어 뱉을 것 같아 단념했다.
마지막으로 입가를 부드럽게 혀로 쓸고서는 그녀가 미는 대로 저항 없이 밀려 주었다. 릴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활짝 열린 문밖으로 시종들은 그 자리에 얼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카르낙의 벌거벗은 나신에서 여전히 물이 흘렀다. 그것이 뚝뚝 떨어져 그의 발끝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
릴리는 대장간 한편에 앉아 멍하게 타오르는 화로를 바라보았다.
"여기 이렇게 하염없이 계시면, 조만간 저는 목이 달아날 거예요.”
세바스탠은 의기소침해 보이는 릴리의 모습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침잠해 있던 릴리의 표정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고 비로소 눈동자에 약간의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기 오는 게 습관이 되었나 봐요. 남들은 불을 싫어하는데 아무래도 저는 불이 좋은 모양이에요. 엘버그의 왕비로서는 실격이겠죠?”
“갖고 있지 않아 선망하시는 걸 수도 있죠. 전하께서는 얼음과 눈으로 만든 달의 아이이시잖아요.”
“그라타는 달보단 태양을 더 좋아해요. 밝고 따듯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여기거든요. 불씨는 태양으로부터 대지로 떨어진 선물이라 여기고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주고 사나운 짐승을 쫓아 주고 추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잖아요.”
“카스티 제도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죠.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물줄기가 끊이지 않는 신비로운 땅이라 하더군요. 죽기 전에 가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거든요.”
“그럼 대장간을 비워야 하잖아요.”
“제가 없어도 대장장이는 많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쇠만 두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행이란 것을 좀 해 보고 싶습니다. 늙어 후회하기 전에요.”
“그건 곤란한데요, 스탠. 당신만큼 재능 있는 대장장이는 없으니 떠나려거든 당신 같은 도제를 수십 명은 만들어 놓고 가야 할 거예요.”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라니…. 차라리 솔직하게 가지 말라 하시죠.”
그러자 릴리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고귀하고 신비로운 여인은 웃을 때만큼은 아이처럼 천진했다. 이것도 아마네스 님의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선물 중 하나일까.
대장간에 자주 드나들지 말아 달라 읍소할 작정이었는데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그거 알아요, 스탠? 엘버그로 온 이후로 누구도 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더군요.”
릴리가 제 무릎을 모아 손으로 감쌌다. 스탠은 움츠러든 그녀의 어깨를 보며 대꾸했다.
“전하께서는 고귀한 분이시잖습니까. 감히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이시니 당연하지요.”
“1년 전까지만 해도 누구와도 이야길 나눌 수 있었어요. 혼자 있으면 친구나 동무나 저를 알고 있는 아주머니나, 아저씨나 모두 먼저 말을 걸어 주시곤 했거든요. ‘릴리, 여기서 뭐 하니?’, ‘릴리, 내가 도와줄까?’, ‘릴리, 우리 집에서 먹을 것을 좀 가지고 가렴.’ 아무 계획 없이 밖에 나가도 늘 무슨 일이든 생기곤 했죠. 늘 할 일이 생기고 어딜 가나 누군가가 있어서 외로울 틈이 없었어요. 혼자일 때도 없었죠. 그런데 이곳으로 오고 나서는 늘 혼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이 엘버그에서 전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누구나 전하를 경배하고 존경합니다.”
릴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쓰디썼다.
“저들이 나를 사랑하는 건 내 태생 때문이에요. 그러니 이 핏줄을 타고났다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을 테지요. 그게 누구든지 신의 아이이기만 하다면요.”
“그것이 전부라면 알기어스 왕이 그렇게 죽진 않았을 겁니다. 저들이 전하를 사랑하는 것은 전하께서 자애롭고 현명하시기 때문이에요.”
“폐하께서는…. 그분께서는 내가 알기어스이기 때문에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일까요?”
“…….”
스탠은 발투만 왕을 떠올리는 파니릴리의 슬픈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풀이 죽어 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는 왕비 전하를 끔찍이도 아끼십니다.”
릴리가 푸, 하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켰다.
“정말이에요. 그 때문에 왕비 전하와 말을 섞는 모든 사내를 증오하십니다. 제가 아까 무어라 전하께 말씀을 드렸나, 상기시켜 보세요.”
“조만간 저는 목이 달아날 거예요.”
스탠은 그렇게 말을 걸어왔더랬다. 그 말이 카르낙 발투만을 염두에 둔 말인 줄은 몰랐다. 그저 너무 오랫동안 대장간에 머무는 저를 걱정하여서 하는 가벼운 농담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만일 스탠의 말처럼 카르낙이 저를 끔찍이 아낀다 하여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카르낙은 저를 믿지 못하고, 그리하여 늘 견고한 벽을 세워 두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내들이란 완전히 자신의 것이란 확신을 하지 못할 때 더 사납게 이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폐하도 사내이시지요. 간절히 원할수록 더 여유가 없으실 겁니다.”
“전 이미 폐하와 혼인을 하였는걸요. 온 세상천지가 그것을 다 아는 마당에 제가 어떻게 폐하로부터 달아날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것은 모르지요.”
세바스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감정이 없는 쇠나 유리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하물며 감정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족쇄로 팔다리를 모두 구속하여 철창에 가두어도 그 안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흐르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는데요.”
릴리는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많은 것들을 깊이 고민하게 하는 말이었다. 릴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 불현듯 물었다.
“내가 스탠과 친하게 지내면… 정말 폐하께서 당신을 해코지하실까요?”
“십중팔구로요.”
그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근데 어쩌죠. 저는 스탠같이 현명하고 다정한 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은데요. 이 캘던성에는 당신처럼 저를 구김살 없이 대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
릴리가 눈을 반짝였다. 무구하여 맑은 눈은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웠다.
“그렇다면 제 목숨을 책임져 주셔야겠습니다.”
“장담은 못 하지만 노력해 볼게요.”
스탠은 소리 내어 웃었다.
전하. 엘버그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전하의 청을 거절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또한, 전하를 사랑하지 않는 이도 없겠지요. 그 사랑이 순결한 것이든 불결한 것이든 모두가 당신을 흠모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