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카르낙이 움직일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식사는 잘했어?”
그가 물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고 릴리는 그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세일린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그 문제로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그렇게 달라고 했어요. 그녀는 내 말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에요.”
그 말에 카르낙은 혀를 찼다.
“고작 시녀 하나 혼냈다고 그걸 따지기 위해 찾아왔단 말이야?”
“그녀는 내 친구예요.”
릴리가 언성을 높이자 카르낙은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그 아이는 네 친구가 아니야, 릴리. 네 하녀지. 너는 그 아이를 부리고 그 아이는 너를 따르는 관계야.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어. 그 아이는 언제나 널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어. 네가 말라비틀어진 빵이 먹고 싶대도 너를 설득해야 할 책임 같은 거.”
“내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는 내가 결정해요.”
릴리는 반박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는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내 아내의 입에 그런 형편없는 음식이 들어가는 것은 용납 못 해.”
“그렇다면 말로 해도 되잖아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요?”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했나 보네. 그렇게 입이 가벼운 아이인 줄 몰랐는데, 의외야.”
“그런 아이 아니에요! 세일린이 무조건 자기 잘못이라고 울어서 다른 시녀를 채근해 알아낸 거예요!”
“본인이 잘못이라고 인정했는데 뭐가 문제야?”
그즈음 릴리는 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저 때문에 화가 나셨으면 차라리 저에게 화를 내세요! 엄한 곳에 화풀이하지 마시고요!”
“언성 낮춰, 릴리.”
카르낙이 차갑게 경고했다.
“매번 그런 말뿐이시죠! 그만해라, 참아라, 묻지 마라…. 그렇게 거리를 두고 싶으시면 폐하께서도 적당한 선을 지키세요! 제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까지 왈가왈부하지 마시고요!”
제법 여유가 있던 카르낙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는 눈은 아플 정도로 맹렬한 빛을 띠었다.
“그까짓 계집이 뭐가 대수라고 이러는 거야!”
카르낙은 히스테릭하게 고함쳤다.
“대수롭지 않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거예요!?”
“빌어먹을 파니릴리 발투만!”
카르낙이 욕조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애초에 네가 격에 맞는 식사를 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잖아! 네가 비렁뱅이야? 성에 말라비틀어진 빵과 개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을 수프가 전부야?? 창고에 온갖 음식을 쌓아 놓고는 그것도 다 말라비틀어지고 썩어 가야 먹을 참이야!?”
“값비싼 산해진미 따위 필요 없어요! 그런 음식은 정말로 그게 필요한 이에게 주면 되는 거라고요!”
불 듯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카르낙의 눈이 가늘어졌다. 릴리는 분을 못 이겨 숨을 들썩이며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설마… 너 설마 리오에서 가지고 온 식재료를… 그 출산했다던 여종에게 준 건 아니겠지.”
“폐하께서 상관하실 바가 아니에요.”
“돌았어?”
정말 미쳐 돌아 버리겠다. 카르낙은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모두가 당신을 신의 아이라고 부르니 정말로 자신이 신이 된 것 같아? 아마네스의 흉내를 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엘버그의 모든 인간들이 다 네 자식 같아?”
“난 그저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그래! 너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한다지만 엘버그 놈들이 퍽이나 그걸 알아주겠네! 앞으로는 무슨 작은 일만 있어도 네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고 욕이나 하겠지! 옆집의 누구는 애를 낳았을 때 리오에서 가져온 음식을 주더니 자기에겐 그만큼 해 주지 않는다고 말이야! 애초에 듣지 않아도 될 욕을 실컷 처먹고 나면 그제야 깨닫겠지! 이 더러운 종자들에게 호의를 베푼 건 실수라고!”
“정말 옹졸하기 그지없으신 분이네요! 그렇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게 아까우면 폐하 혼자 다 드시지 그래요! 그전까지 과연 그 식자재들이 상하지 않고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릴리는 잔뜩 쏘아붙이고는 욕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휙 돌렸다. 그러자 카르낙이 낮게 경고했다.
“그 문 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러나 그런 협박이 통할 정도로 심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릴리는 보란 듯이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그러자 쾅, 하고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세게 문이 닫혔다. 관자놀이에 뜨겁고 단단한 온기가 느껴졌다. 뚝, 뚝 어깨 위로 물이 떨어졌다. 어느새 카르낙이 욕조에서 나와 뒤에 서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숨통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릴리는 입이 마르는 기분이 들어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비켜 주세요.”
“어딜 도망가.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릴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속이 부글부글하는 것이 그녀의 낯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좋아요. 그럼 해 보세요.”
“…….”
“해 보시라니까요?”
재차 채근해도 답이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더니 막상 이야기해 보라고 자리를 펴 주니 안 하는 것은 또 무슨 심보인가.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나고 불만인 건지 인상은 잔뜩 찌푸리고 있으면서 입은 다물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다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됐어요. 할 말 없으면….”
난데없이 얼굴에 무언가가 충돌했다. 릴리는 갑작스러운 충돌에 문에 쿵, 하고 뒤통수를 박았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긴 눈을 뜰 때쯤에야 그녀는 카르낙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고 당혹스러워 릴리는 힘껏 그를 밀어내며 도리질 쳤다.
“칼! 그만해요!”
그러나 카르낙의 입술은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쫓았다. 젖은 몸과 부대끼며 그녀의 블리오 앞섶도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칼!”
어느 순간, 그가 아주 잠시 몸을 물린 틈을 타 릴리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다.
짝! 하는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릴리의 손이 그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강도에 못 이겨 카르낙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후려친 손바닥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왕의 용안에 손을 대다니, 이는 필시 반역이었다. 그러나 여인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가 저를 모욕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릴리는 고르지 못한 호흡을 내뱉었다. 헉헉거리는 숨에서 단내가 났다.
카르낙은 혀로 제 입가를 핥아 보았다. 피 맛이 났다. 퉤, 하고 그는 입에 고인 침을 뱉어 냈다. 그것을 본 릴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이 얼얼한 만큼 가슴도 욱신거렸다.
“영 젬병인 줄 알았는데….”
“…….”
카르낙이 고개를 들었다.
“너도 발톱이 있네, 파니릴리.”
“그럴 생각은… 너무 놀라서….”
파니릴리가 더듬거렸다. 카르낙은 손가락으로 찢어진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어서 그렇게 몇 번 두드리니 더는 피가 묻어나지 않았다.
“괘… 괜찮으세요? 리쿠스를… 리쿠스를 불러올까요?”
“불러서 뭐라고 하게? 내가 폐하의 뺨을 후려쳐서 입술이 터져 버렸다고?”
릴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폐하께서도 잘못이 없다고는 말씀 못 하시잖아요.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행동이셨어요.”
“욕실에 쳐들어와 꽥꽥 소리를 지른 건 퍽이나 적절하겠네.”
“저는 가진 것을 나누라고 배웠어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배웠고, 사람은 모두 동등하게 태어나니 사랑과 겸손으로 대하라고 배웠어요. 저는 제 신념을 충실히 지킬 뿐이에요. 저는 폐하를 이해하려고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노력해요. 그러니 폐하도 저를 다만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시면 안 되겠어요?”
“이건 노력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도 아니고 단지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네가 내 뺨을 후려쳐도 괜찮은 건 네가 내 아내이고 엘버그의 왕비이기 때문이야. 만일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게 이렇게 했다면 걘 벌써 내 손에 목이 잘렸어.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네 그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친구 세일린이 욕실에 들어왔다?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
“네가 쫓고 있는 건 허상이야, 파니릴리.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 아름답고 선하고 모든 게 완벽한 네 머릿속의 망상은 버려. 너보다 못하고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남에게 이유 없이 베푸는 짓 따위는 제발 그만두라고. 이건 다 널 위해서 하는 이야기야.”
내내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릴리가 입을 뗐다.
"저는 친구가 필요해요.”
“에이가가 있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세일린이든 스탠이든 분수에 안 맞는 이들은 제발 그냥 시종으로 남겨 둬. 정 같은 거 주지 말고 그냥 부려먹기나 하란 말이야.”
“페하는 절 이 성에 방치하셨어요.”
“…….”
“그리고 내내 버려두셨어요.”
“…….”
“영문도 모르고 탑에 갇혀서 다시 폐하가 나를 찾을 때까지 대책 없이 기다려야 했어요. 나는 그 시간을 오로지 에이가가 가져다주는 책과 세일린의 보살핌과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 냄새를 맡으며 견뎠어요.”
“릴리.”
“내가 그 시간 동안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건 에이가와 세일린이 내 곁을 지켜 줬기 때문이었어요.”
이번에 할 말을 잃은 것은 카르낙이었다. 오랫동안 꾹꾹 눌러 왔을, 아마 건드리지 않았다면 터져 나오지 않았을 감정을 릴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꾹꾹 씹어 뱉었다.
“그녀가 날 보살펴 줬어요. 폐하께서 절 방치하신 그 순간에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때도,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우린 영원히 부부가 되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을 때도 세일린은 한결같이 날 위해 주었어요.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키거나, 날 미워하거나, 날 버렸던 적이 없어요.”
“…….”
“그녀는 내게 일개 하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내 모든 것을 나눈 친구이고, 동지이고, 언제나 내 곁을 지켜 준 내 은인이에요. 늘 자기 자신보다 날 먼저 생각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요.”
유일한 사람? 세일린이 유일한 사람이라고? 그럼 난? 내가 저를 위해 해 왔던 건? 내가 하고 있는 건? 그녀가 저를 위해 하는 건 타당하고 내가 저를 위해 하는 행동은 부당하다는 건가? 내 아내가 그 지위에 맞는 정당한 식사를 제공받는 것을 바라는 게 잘못된 일인가? 맛있고 귀한 것을 먹길 바라는 마음은 이기적인 욕심이란 말이야?
“널 이 땅에서 진정으로 이해해 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