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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94화 (94/231)

94화

“…….”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세일린은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 번 더 이런 음식을 내갔다가 걸리면 그땐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어?”

카르낙은 흐느끼는 여종들을 무감하게 한번 쳐다보고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세일린은 더 이상 왕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세일린!”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따르던 시종들이 그녀를 받치고 파리하게 질린 세일린의 얼굴에서 식은땀을 닦아 냈다.

무슨 정신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음식의 잔해들을 치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랜 채 비틀비틀 주방으로 돌아가 요리사에게 온갖 산해진미를 가져오라고 명령한 것은 세일린이 아니었다.

그녀를 걱정한 다른 여종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왕비의 식사를 화려하게 세팅하기 시작했고, 세일린은 멍하게 벽만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쟁반을 들고 에이가의 문 앞에 서 있을 때까지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손에 무엇을 들고 있고,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넋을 놓고 있는 세일린을 대신해 누군가 ‘똑, 똑, 똑’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렸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지금껏 벌어졌던 일은 잠시 제 머릿속 한편으로 치워 두고 담대하고 침착하게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 이후 침대에 쓰러지든 아니면 울어 젖히든 그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세일린은 에이가와 마주 앉아 평온한 얼굴로 저를 맞이하는 릴리를 본 순간, 애써 삼키려 했던 감정을 모두 토해 내고 말았다.

세일린의 커다란 눈동자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르자 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릴리의 반응에 에이가도 영문을 몰라 뒤를 돌아보았다,

흑,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세일린의 쟁반을 빼앗아 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그녀를 끌어안은 것은 서둘러 다가온 릴리였다.

“세일린,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이러면 안 된다. 이러면 정말 국왕 폐하께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당장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풀려 버린 서러움은 쉽사리 진정되지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왜 이러는지… 정말 죄송해요.”

세일린은 고장 난 오르골처럼 사과만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에이가가 세일린을 뒤따라온 시녀 아무에게 물었다. 쟁반을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이들 중 하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입이 마르는지 몇 번이고 혀를 축였다.

“식사를 준비해 오다가 국왕 폐하를 뵙게 되었는데….”

“아니에요!”

세일린이 그 말을 가로막았다.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잘못한 겁니다, 전하. 제가 미련하여….”

누구나 수상하게 생각할 만큼 필사적인 모양새였다.

“계속해 봐요. 폐하를 뵈었다고요?”

“전하….”

시녀는 릴리의 명령에 침착하게 순종했다.

“왕비 전하의 식사가 너무 초라하다 하시며… 쟁반을 들어 엎으셨습니다.”

에이가는 시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릴리의 낯빛부터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은 돌연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폐하께서 쟁반을 들어 엎으셨다고?”

에이가가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는데 세일린은 목청 높여 반박했다.

“아닙니다, 에이가 님. 제가 먼저, 제가 감히 먼저 국왕 폐하께 말을 거는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잠시 정신을 놓아 불경을 저지른 탓입니다! 전하! 믿어 주세요.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제가 주제를 모르고… 감히….”

세일린은 뒷말을 흐리며 흐느꼈다.

“대체 어떻게 된 정신머리기에 폐하께 먼저 말을 건단 말이야!”

에이가는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야. 그 자리에서 요절이 나도 이상할 게 없는 짓이야. 세일린이 잘못한 겁니다, 전하.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 때문인 것 같지가 않아요.”

카르낙은 예의범절을 그다지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단지 시녀가 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고 음식이 든 쟁반을 뒤엎는 것은 그답지 않았다. 차라리 시녀가 쟁반을 뒤엎어 버려 그것으로 화를 냈다는 것이 더 그다웠다.

릴리는 그것이 화풀이라 생각했다. 기분이 안 좋은 때에 세일린과 마주쳤고 아주 작은 꼬투리를 잡아 분풀이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에이가에 이어 저와도 제법 언성을 높였던 게 떠올랐다. 비겁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나약하여 무어라 해코지해도 저항할 수 없는 자에게 그 같은 행동을 저지르다니 속이 뒤집혔다.

릴리는 자신이 마셔야 할 따듯한 찻잔을 들어 세일린에게 내밀었다.

“마셔요.”

세일린은 기겁하며 도리질했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어떻게…. 거두어 주십시오”

“괜찮아요. 따듯한 차를 한잔하면 진정에 도움이 될 거예요.”

“안됩니다, 전하. 저 같은 것이 감히 어떻게 왕비 전하의 것을….”

이 모든 것이 카르낙 발투만 때문이다. 간신히 얻은 친구를, 믿을 수 있는 동지를 얻었는데…. 그의 분풀이가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릴리는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전하!”

에이가가 다급하게 그녀를 쫓아갔다. 씩씩거리는 그녀의 발걸음을 쫓느라 에이가는 벌써부터 숨을 헐떡였다.

“전하. 어딜 가시는 거예요?”

“폐하께요.”

에이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폐하께 가서 무엇을 하시게요? 이번 일은 세일린에게 잘못이 있어요. 설사 그녀에게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이렇게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세일린은 나 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될 해코지를 당했어요.”

“방금 못 들으셨어요? 그 아이가 먼저 무례하게 폐하께 말을 걸었다잖아요. 그 정도로 끝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폐하께선 그 문제로 화를 내신 게 아니에요. 별것도 아닌 것을 꼬투리 잡아 분풀이를 한 것뿐이라고요.”

“그게 뭐가 어때서요! 설사 분풀이를 하셨다 치더라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씀이세요! 그분은 엘버그의 왕이세요! 세일린은 그저 차고 넘치는 일개 시녀 중 하나일 뿐이고요!”

“에이가!”

릴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에이가는 그 자리에 얼어 버렸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는 있어요? 당신은 지금 발투만 왕을 알기어스 왕과 다를 바가 없게 만들고 있어요.”

릴리의 맹렬한 기세에 에이가는 말을 잃었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고 넘치는 일개 시녀에게 분풀이를 한 바로 그 지점을 나는 용납할 수 없어요. 나는 나의 남편이, 엘버그의 왕이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란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러니 나는 그에게 사과를 받아야겠어요.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지금껏 카르낙이 자신과 같은 이라 여겼다. 한쪽의 인생은 온통 충만함과 사랑뿐이고 한쪽의 인생은 고통과 결핍뿐이었을지라도 둘 모두 엘버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믿어 왔다.

그가 가진 아픔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었기에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그에게 차고 넘치는 애정을 쏟고 싶다는 절실함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엘버그의 여타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그 보다도 나빴다. 흑과 백만이 존재할 뿐, 비록 적은 있을지언정 나약하여 짓밟을 수 있는 이들은 없었던 그의 세상에 제 기분 내키는 대로 마음껏 배설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릴리로 하여금 카르낙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엘버그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도 소명도 깡그리 섬멸 시켜버리고 만 것이다.

하여 그녀는 직접 확인해야 했다. 카르낙 발투만이 그렇게 비겁한 이가 아니라는 확신을, 그는 비천하고 나약한 이들의 적이 아닌, 그들을 동료이자 구원자임을, 실수는 할지언정 변치 않는 신념이 있음을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당신은 엘버그의 다른 이들과 달라. 엘버그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겠다는,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그 빛나던 얼굴은 분명 진실했어. 그때 확신했다. 우리는 한 곳을 보고 있음을. 그러니, 그러니 당신은 실수를 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인정할 수 없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정하게 하고야 말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릴리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고 에이가는 멍하게 입을 뻐끔거리다 다시 그녀를 뒤쫓았다.

“제가 폐하와 함께 있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분의 기분이 저조하실 때 건들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절대로요. 제가 누구보다 폐하께 엄격하다는 것, 그건 전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조여야 할 때와 풀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에요.”

침실 가까이에서 뜨거운 물이 담긴 양동이와 마른 천을 든 시종들이 분주히 오갔다. 그것은 곧 왕이 지금 목욕을 시작했거나, 혹은 목욕 중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릴리는 방향을 바꾸어 욕실로 향했다. 에이가는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풀어야 할 때예요. 괜스레 자극하여 좋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아니요, 에이가. 지금은 흠씬 두들겨야 할 때예요.”

마치 양탄자를 두드려 먼지를 털어 내듯이 말이다.

“전하….

에이가는 바지런히 따라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릴리가 욕실의 문을 열었고 에이가는 감히 그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건장한 시종 하나가 카르낙의 머리 위로 따듯한 물을 쏟아부었다. 카르낙은 물에 젖어 늘어진 기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얼굴의 물기를 손으로 쓸어 냈다. 그 덕에 릴리가 욕실로 들어서는 것은 보지 못했다.

“폐하. 한 번 더 끼얹을까요?”

시종이 공손한 투로 물었다. 그때 자신을 바라보는 릴리를 발견한 카르낙은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그러자 그는 마른 수건 하나를 욕조에 걸쳐 놓고 방을 나섰다. 카르낙은 흐르는 물기를 손으로 한 번 더 쓸어 냈다. 릴리는 그때까지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꼭 누르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카르낙도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고요하고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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