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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91화 (91/231)

91화

카르낙이 침실로 들어선 것은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이었다. 여종의 출산을 축하하러 간다던 릴리는 아직 귀가하지 않은 듯했다.

성내 사람들은 부부가 내내 한 침실을 사용하는 것을 여전히 기이하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카르낙은 제 아내를 보기 위해 일부러 그녀를 찾아가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 좋았다. 또 굳이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따로 알아보지 않을 수 있어 좋았다.

번잡하게 흐트러진 책상 위의 양피지를 살펴보자면 그녀는 요새 온갖 풀에 대해 기록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풀의 종류부터 어디에 써야 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까지 깨알 같은 글씨로 과하다 싶도록 자세하게 적어 놓은 것이 영 자신과는 맞지 않아 제대로 살피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쩝 입맛을 다시며 양피지를 책상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카르낙은 릴리가 내내 앉아 있었을 의자에 앉아 시종이 가져온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가 아내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사이 시종들은 익숙한 손길로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넘어간 후에야 간신히 릴리가 침실로 들어왔다. 세일린이 카르낙을 보고 흠칫 놀랐다가 주인을 따라 방에 들어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카르낙은 아내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르낙이 묻기 전에 그의 표정을 읽은 릴리가 먼저 답했다.

“정원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연못을 파내느라 정신이 없어요. 또 비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 전에 만들어 놔야 한다더라고요. 그래야 연못이 차오를 테니까요.”

세일린은 릴리가 곧바로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그릇에 물을 받았다. 릴리는 돼지기름을 섞어 만든 비누로 손을 비벼 닦은 뒤 물로 씻어 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정원에 가기 전에 출산한 여종을 축하해 주러 다녀왔어요. 아주 건장한 사내아이를 낳았더군요. 눈동자가 아주 밝은 푸른색이었어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런데 산모의 낯빛이 창백해 좀 걱정이에요. 진통이 길어서 몸이 많이 망가졌대요. 고기가 좋다기에 질 좋은 부위로 선별해서 가져다주라고 일러두긴 했는데…. 무탈하길 바랄 수밖에요.”

릴리는 세일린에게 받은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아 내며 쉼 없이 재잘댔다. 카르낙은 대개 그녀의 말을 신중하게 들었지만 어떤 대목은 곱씹어 봐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가령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말이다.

“여종의 출산이 왕비가 직접 챙겨야 할 정도로 중대한 일인가?”

벌 떼처럼 날아다니며 아이를 만들어 대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사막이든 어디든 버려 대는 곳이 바로 엘버그다. 이 땅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아무렇게나 방치해서 아무렇게나 키우고 그러다 죽어 버려도 운명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면서 또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낳는다. 발정이 와 임신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짐승들보다도 못했다. 적어도 짐승들은 제가 낳은 새끼는 살뜰히 보살피지 않나.

“아이를 낳다 죽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순산하는 것만도 큰 축복이죠.”

세일린이 먼지 묻은 릴리의 드레스 자락을 풀기 시작하자 카르낙이 잔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내가 하지.”

왕의 뜻에 따라 세일린은 끈을 놓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카르낙은 릴리의 등 뒤에 서서 능숙하게 여밈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 앞으론 축하해 줄 생각이에요. 그라타에서처럼 아이를 순산한 집 대문에는 뭔가를 걸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갓난아이를 돌보는 산모가 있으니 함부로 방문하거나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요. 그라타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집 앞에 나팔꽃 한 다발을 묶어 두곤 했어요. 오랜 전통이었거든요. 엘버그에선…. 상징적인 의미로 하얀색 꽃 같은 것이 어떨까 해요.”

끈이 다 풀어진 드레스 자락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목화는 어때?”

릴리가 발을 빼내며 제 남편을 돌아보았다. 세일린은 곧바로 릴리의 슈미즈 위에 실크 가운을 걸쳐 주었다.

“목화요?”

“하얀색이잖아. 딱히 시들 일도 없고. 성에서 구하기도 쉽고.”

“그리고 아주 탐스럽죠. 감사해요. 정말 좋은 조언이에요.”

“별말씀을. 그보다….”

카르낙이 몸을 숙여 릴리의 드레스 자락을 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켜켜이 쌓인 먼지가 피어올랐다.

“여종은 출산을 먼지 구덩이에서 했나? 어렴풋이 사막에서 뒹굴던 때가 생각나는데 말이야.”

“아, 그건 아니에요. 정원을 보러 간 김에 이것저것 풀을 캤거든요.”

여전히 맥락을 이해할 수 없어 카르낙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왜?”

“로로의 감기에 좋은 약재가 있을까 해서요. 그라타에선 산엽초라고 불렀는데…. 여기선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요, 키가 작고 새끼손톱만 한 노란 꽃이 달렸거든요.”

“그래서 찾았어?”

카르낙은 세일린에게 릴리의 드레스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릴리의 드레스를 받고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아니요, 못 찾았어요. 아무래도 건조한 지역에선 자라지 않는 건가 봐요.”

얼핏 산엽초란 낱말에 기시감이 들었다. 카르낙은 아까 전 릴리가 쓰다 만 양피지를 도로 챙겨 들었다. 거기엔 산엽초의 효능과 생김새가 적혀 있었다. 엉성하나 제법 자세한 그림도 첨부되었다. 썩… 그림에 재능이 있진 않네. 만에 하나 산엽초가 이 그림과 완전 똑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면 그 약초는 정말 더럽게 못생긴 약초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해 두는 거야? 까먹을까 봐?”

아, 하며 알아차린 듯 짧은 소리를 내고 릴리는 방그레 웃으며 카르낙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뺏어 들었다.

“리쿠스에게 보탬이 될까 해서요. 이래 봬도 그라타에 있는 동안 스승님께 배워 약이 될 풀이나 열매 같은 것은 제법 알거든요.”

“...이건 뭐야? 사내아이의 소변?”

카르낙이 다른 양피지에 적힌 문장을 읽으며 진심이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피부병에 좋아요.”

“…피부 좀 좋아지자고 사내새끼 오줌을 얼굴에 바르라고?”

농담이라 해도 지나치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지 카르낙이 진저리를 쳤다.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듣기로 수분이 부족해 탈수 상태에 빠지면 자기 소변이라도 먹는다고 하던데요. 폐하께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에 계셨으니 이 부분에 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카르낙은 양피지를 내려놓으며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땀을 핥아 먹겠어. 아니면 피를 빨아 먹고 말지. 물이 부족하긴 했지만, 누군가 지린 오줌을 먹을 만큼은 아니었어. 어떻게든 죽지 않을 만큼의 물은 구했으니까. 무척 짧은 밤이었어도 삽시간에 추워져서 새벽녘이면 여기저기 이슬이 맺혔거든.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이지. 게으른 자는 어떻게든 뒈지는 법이고.”

“그러고 보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릴리가 침대에 앉아 슈미즈를 허벅지까지 끌어 올렸다. 하얀 스타킹을 묶어 둔 연분홍빛 리본을 풀며 그녀는 제 뽀얀 허벅지를 쳐다보고 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폐하의 검은 누가 만들어 준 건가요?”

“내 검?”

카르낙이 다시 와인 잔을 잡았다.

“네. 스탠이 말하길 스코크도 칼자루를 빼고는 손도 대지 못한다고 하던데요.”

스탠? 그 보기에도 느끼하게 생긴 세바스탠이란 놈을 아직도 스탠이라고 부르네? 거기에다 이젠 그놈과 그런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사이인가 보지? 카르낙은 단번에 잔을 비웠다. 잔을 쥔 악력에 손가락 끝이 하얗게 바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놈을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어차피 파니릴리는 저와 결혼식까지 치렀고, 이제 그녀가 발투만의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엘버그 땅에 사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마당에? 게다가 파니릴리는 누구보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충실하지 않은가.

그러니 그 세바스탠이란 놈이 감히 왕비를 상대로 무슨 수작을 걸든 릴리가 넘어갈 리는 없다. 하지만 그놈이 무슨 수작을 벌일 거란 생각만으로도 울컥한단 말이야. 내가 그놈을 이렇게 신경 쓰는 것은 그놈이 그냥 좀 볼만하게 생겨서가 아니다.

릴리가 그놈을 스탠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짜증이 나 견딜 수가 없다. 엘버그에서 파니릴리를 릴리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칼’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도 릴리뿐이다.

그러니까 릴리가 애먼 잡놈을 애칭으로 부르는 것이 싫었다. 이름을 부를 때부터 정겨워지는 것이 싫었다. 마냥 사람에게 다정하기만 한 파니릴리는 이런 기분 따위는 모를 것이다. 그 자식이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다. 스댕으로 하든가 자댕으로 하든가 씨댕으로 하든가…. 부르기 쉬운 개똥 같은 이름으로 바꾸란 말이다!

아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유치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런 일로 씩씩거리다니… 정말 꼴불견이다.

“칼?”

“어?”

자괴감을 넘어서 거의 절망의 상태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릴리의 음성에 카르낙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답하시기 곤란한가요?”

“어떤 게?”

다는 아니고 한 절반 정도.

“폐하의 검이요.”

아, 그거. 그러니까… 내 검을 누가 만들었는지 물었던가?

“그거… 주웠어.”

“....”

릴리가 눈만 깜빡거렸다. 못 들었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먹을 걸 찾으러 다니다가 움막으로 돌아갈 때였던가…? 아무튼, 그때 주웠어.”

검을 주웠다고? 사막에서? 그렇게 크고 무겁고 번쩍거리는 것을? 보통 그런 것을 그렇게 실수로 흘릴 수도 있는 건가? 단검도 아니고 부엌칼도 아니고 그렇게 큰 검을?

“사막에 그렇게 큰 검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단 말이에요?”

괴상한 이야기이긴 하다. 척박하여 잡초조차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는 마른 땅 위에 웬 장검 하나가 덩그러니 떨어져 있더란 이야기. 그러나 사실이었다. 정말로 검은 사막 한가운데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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