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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81화 (81/231)

81화

“죄송하지만 전하와 편히 이야기할 수 있게 다들 나가 주시겠어요?”

“그럼 이야기를 마친 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당부해 줄 수 있을까요?”

세일린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녀는 릴리의 가장 가까운 신하이고 심복이니 사실 있어도 그리 큰 상관은 없을 터였다. 문제는 나머지인데….

“저는 치료사이니 있어야겠습니다. 도움도 될 테고요.”

리쿠스가 학구열로 불타는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나는 폐하를 보호할 임무가 있는 사람이야. 폐하가 있는 한 나도 안 나가.”

핀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리아나의 눈동자는 자연히 카르낙에게 쏠렸다. 카르낙은 팔짱을 끼고 서서 어떻게든 방 안에 남아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들으려는 두 사내를 향해 또박또박 명령했다.

“다 나가, 모두 다.”

염병할, 카르낙 발투만. 궁금해 죽겠는데. 도움이 안 되네, 정말. 핀이 씨근덕거리며 리쿠스의 뒷덜미를 잡았다.

“나가자고, 치료사 양반.”

“하. 하지만….”

“나가라고 할 때 제 발로 나가는 게 좋아. 아니면 송장으로 끌려 나가게 될 테니까.”

그건 싫었다. 리쿠스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핀의 손에 끌려 나갔다.

세일린도 눈치를 보다 릴리에게 필요하면 불러 달라는 당부를 마친 뒤 방에서 빠져나갔다. 카르낙은 아예 의자를 끌어다 자리를 잡았다. 로리아나는 왕을 내보내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불가능할 게 뻔하니 굳이 왕을 자극해 험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하기를 택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물론이에요.”

대답하다가 릴리는 기가 막힌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

“세일린이 호들갑을 떨어 일이 커졌어요. 사실 어디가 막 심하게 불편한 건 아니에요. 그저…조금….”

릴리가 마땅한 단어를 찾기 위해 말을 흐렸다.

“조금 몸이 무거운 것뿐이에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요?”

“…음….”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더 알맞은 단어를 찾으려 골몰했다.

“혹시 무릎이 후들거리시던가요?”

“…약간요.”

알 만하다, 알 만해.

“잠은 푹 주무셨어요?”

“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피곤하네요.”

그럼 푹 잔 게 아니지. 지쳐서 곯아떨어졌다가 근육통에 다시 깬 거지.

“거동이 불편하신 것 말고 다른 것은 없으시고요?”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에 릴리가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쓰라려요. 물론 전에 이야기해 줘서 알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아파요. 뭐라고 표현을 못 하겠어요.”

“잠시만 실례할게요.”

하고 로리아나가 릴리의 한쪽 허벅지를 꽉 쥐어 보았다. 그러자 ‘아야’ 하며 릴리가 몸을 움찔했다. 이내 끙 하며 눈을 감았다.

“분명 근육통이네요. 익숙하지 않은 근육을 너무 오래 쓰신 탓이죠.”

일반적인 경우 여자가 제 허벅지를 그토록 넓게 벌리고 있어야 할 일이 뭐가 있는가. 사내와 몸을 섞을 때뿐이다. 거기에 더해 지나치게 오랫동안 벌리고 있으면 근육이 뭉치고 당길 수밖에 없다. 릴리가 또 속삭였다.

“조금 쉬면 나아질 것 같은데 일이 커졌어요.”

“당황하셨겠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아픔 때문에 거동조차 못 할 정도라면 놀랄 수밖에요. 당사자도, 그걸 목격한 사람도 모두요.”

“그래도 제법 운동이 되네요. 예전엔 종일 산을 타야 이렇게 다리가 아프곤 했는데 말이죠.”

낙관적인 대답이 우스워 로리아나는 릴리와 함께 키득거렸다.

“잘 안 들려.”

그러자 카르낙이 투덜댔고, 로리아나는 휙 그를 돌아보았다. 낄 때와 빠질 때를 모르는 사건의 원흉을.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 발정난 짐승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아지긴 하는 거야?”

게다가 참을성도 없다. 로리아나는 허리 주머니에서 조개 모양의 작은 케이스를 꺼내 릴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쓰라린 곳에 이걸 바르세요. 한결 좋아질 거예요. 그리고 따듯하게 적신 수건으로 찜질을 좀 하시면 근육통도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릴리는 로리아나에게 건네받은 붉은색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크림색의 고약이 들어 있었다. 손끝에 찍어 비벼 보니 기름처럼 매끈하고 뭉근한 것이 금방 물처럼 녹아 피부 위에 매끈히 발렸다.

“저 같은 계집들은 늘 이런 것을 가지고 있지요. 몸이 재산이니 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하거든요.”

“고마워요, 로리아나.”

“그리고….”

로리아나가 릴리에게 바짝 붙어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번에 하실 땐 전하가 위에 타서 하세요.”

“네?”

“아래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덜 아프실 거예요. 왜냐하면, 뭐든 전하께서 주도하실 수 있거든요.”

게다가 보아하니 카르낙은 아직 그런 걸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지 않았고, 설사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보통의 사내와는 다른 것 같으니…. 릴리가 은밀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좀 더 자세히 알려 줄래요?”

그러자 로리아나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사내를 아래에 깔고…. 릴리는 놀랐다가, 얼굴을 붉혔다가, 성실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했다.

“좀 더 덧붙이자면, 짐승처럼 굴면 사지를 묶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릴리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그…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전하.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답니다.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은 있어도요.”

로리아나는 흥미로워 눈을 빛내는 릴리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날뛰는 짐승은 모름지기 묶어 다스려야 하는 것. 파니릴리는 똑똑한 여인이니 능히 그것을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잘 안 들려.”

카르낙이 다시 한번 투덜거렸다. 거참, 불편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겠네. 로리아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침대 가에서 일어섰다.

“전하께서는 괜찮아지실 겁니다, 폐하. 하루 이틀쯤은 푹 쉬세요. 늘 몸을 따듯하게 해 주시고 마사지도 자주 받으시면 될 것 같네요.”

“그게 다야? 그것만 하면 된다고?”

“네. 애초에… 쉬면 괜찮아질 문제였답니다.”

이렇게 호들갑 떨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과하게 호들갑을 떨어서 카르낙 발투만이 얼마나 짐승 같은 사내인가만 성안에 너얼리 퍼지게 되었다. 하긴 사내들은 그런 것을 자랑스레 여기긴 한다만. 과연 카르낙이 그것을 자랑으로 삼을 것인가는 잘 모르겠다.

“새색시 병이란 게 뭐야? 리쿠스가 그렇게 말하던데.”

“어머나. 참으로 귀여운 병명이네요.”

로리아나는 약간 웃음을 흘리고 말을 이었다.

“아주 늦은 나이에 첫 경험을 하거나, 몸이 허약한데 사내를 받거나, 아니면 너무 거칠고 무리한 행위를 하면 생기는 병이에요. 가볍게는 하루 이틀 거동하기 불편한 정도이나 심하면 요의를 못 느끼기도 하지요.”

“…그게 무슨 소리야?”

“감각을 못 느낀다는 이야기입니다, 폐하. 반신불수처럼요.”

히익 소리를 내며 카르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경악한 왕의 모습을 다른 이들은 본 적이 있을까. 분명 생경한 표정이겠지.

“…뭐… 그… 그럼… 심각하면 거, 걷지도 못한단 말이야?”

“반신불수처럼 감각을 못 느낀다 했지, 반신불수가 된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폐하.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호전되는 병이에요. 사실 병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처음부터 너무 격렬한 행위를 하면 으레 여인들이 겪는 아주… 약간의 불편함 정도랄까요.”

로리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창부들에겐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돈을 더 벌 욕심에 너무 많은 사내들을 받으면요.”

단 하룻밤 사이에 결혼한 남편과 몸을 섞다 이러는 경우는 본 적이 없지만.

“로아나.”

“로리아나입니다, 폐하.”

“로리아나, 왕비가 괜찮아질 때까지 네가 여기 있어야겠다.”

“저는 치료사가 아닙니다, 폐하. 있어도 별 도움이 안 될 거예요.”

“릴리를 이대로 두고 보란 말이야?”

“그래서 제가 고약을 드렸잖습니까. 고약을 바르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자연히 나아집니다.”

“그럼 그것을 더 줘.”

“어떤 것이요?”

“릴리에게 건넨 거. 뭔지 모르지만 너무 적잖아. 더 가져와.”

이런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왕을 보았나. 맡겨 놓은 보따리 찾는 것도 아니고. 로리아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꿀꺽 삼키고 침착하게 말했다.

“…폐하…. 제가 가진 것을 드린 겁니다. 다시 만들어 드릴 수는 있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럼 만들어서 가져오면 되잖아.”

아니,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미안해요, 로리아나.”

릴리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신 사과했다. 뻔뻔한 왕을 보면 확 치받고 싶다가도 난처해하는 릴리의 얼굴을 보면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 주고 싶었다.

“좋습니다, 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대신 하나 약속해 주셔야겠습니다. 폐하.”

“뭔데?”

로리아나는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 서비스 정신이 깃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는 저를 찾지 마세요. 특히나 성으로 부르는 일은 없도록 해 주세요.”

카르낙은 시선을 옮겨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는 제 아내를 보았다. 로리아나가 하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다시는 부르지 않겠노라 약속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겠는데.”

그럴 줄 알았지

“그럼 전부 다 값으로 쳐주세요.”

예상 못 한 바가 아니라 로리아나는 곧바로 차선책을 내놓았다.

“고약도, 제 노동력도, 매번 오가며 버리는 시간에 그동안 받지 못한 손님에 대한 보상액까지 전부 다 합해서 제가 원하는 만큼요.”

“로라나.”

“로리아나입니다, 폐하.”

“로리아나, 나는 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진심이야.”

뻔뻔하게 연극을 하는 얼굴인건가, 아니면 진심으로 호소하는 건가, 로리아나는 낮짝도 두꺼운 왕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투로다. 나에겐 형제이며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애초에 무엇 때문에 왕이 되었던가. 더는 투로들이 부조리에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였다. 그러니 카르낙은 진심으로 로리아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또한 투로이자 여인으로서 그만한 위치에 올라간 로리아나에게 존경 비슷한,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성안에는 모두 멍청이들뿐이야. 분명 성내의 절반 이상은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고 생각할 거다. 내가 장담하지.”

본인을 포함해서겠지요, 폐하.

“저 같은 창부를 자꾸 성에 들이시면 여러모로 좋을 것이 없어요. 성안에는 눈들이 많으니 이상한 소문이 날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 재밌잖아.”

카르낙이 신이 난 듯 눈을 빛냈다.

“왕이 된 투로와 부나비의 마담이 된 투로라. 나는 별로 잃을 것이 없는데 말이야.”

진담인가, 농담인가.

“너는 잃을 것이 많은가 보지? 나와 엮이면?”

“제가 잃을 것은 없지요. 더 내려갈 바닥도 없는데요.”

“그렇다면 이제 진창을 구르는 일만 남았군. 나랑 같이.”

처음에는 그 말에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곧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토록 다른 이의 비난을 기뻐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것은 오직 왕이 된 투로만이 지닐 수 있는 비틀린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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