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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80화 (80/231)

80화

“디셋은 오늘 아침 리오로 떠났습니다. 정예병을 붙여 수송 중이니 사나흘이면 리오에 도착할 겁니다. 크흠.”

“잘 됐네. 또?”

“콜록. 그리고… 울퍼의 폭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페하. 콜록.”

어두운 회의소에 로로의 마른기침이 웅웅거렸다.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던 비가 그치자 며칠째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시사철 더운 곳에서만 살아왔던 로로에게는 처음 겪는 냉랭한 날씨였으리라. 그는 서둘러 와인 한 잔을 마셨다.

“죄송합니다, 폐하.”

“감기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근래 들어 잔병치레가 많아진 것 같아, 로로.”

에이가가 그런 로로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리쿠스에겐 다녀오셨어요?”

“그저 흔한 감기인데요.”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로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작은 병이라도 조심해야 한답니다.”

“에이가의 말대로 해. 리쿠스를 찾아가 진료를 받도록 해.”

카르낙은 그렇게 종용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콜록. 폐하, 어디 가시게요?”

“나머지는 당신의 감기가 나아지면 하자고. 옮긴 싫거든.”

“하지만….”

로로와 에이가를 스쳐 지나가는 발길이 유난히 가볍게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덧붙였다.

“그리고 울퍼는 내버려 둬. 어차피 그러라고 그 자리에 앉힌 놈인데.”

“폐하, 그냥 두고 보기에는 영지민들의 반감이 심각합니다.”

에이가는 카르낙이 완전히 회의소를 벗어나기 전에 서둘러 조언했다. 그러자 로로도 말을 보탰다.

“그러다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그것은 울퍼뿐 아니라 폐하에 대한 반란으로도 번질 수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되짚어 보실 필요가 있어요.”

카르낙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로로는 더 진중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게 해선 안 돼요.”

“…….”

카르낙은 그의 말을 들으며 잠자코 있다가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가롭고 나태하던 낯빛에 희미하게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자신들이 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받을 뿐이야.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은 진작에 지났어. 놈들이 반란을 하든, 울퍼가 놈들 손에 뒈지든 내가 손해 보는 건 없어. 아니, 오히려 이득이지. 그걸 빌미로 멀루아 놈들을 모조리 태워 죽일 수 있으니까!”

점점 더 힘이 들어가던 목소리는 마지막 단락이 되어서는 거의 고함처럼 변하고 말았다. 할 말을 다 쏟아 낸 카르낙은 증오를 털어 내듯 후우,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후에는 다시 덤덤하고 산뜻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모두 건강에 유의하도록 해.”

낮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 왕은 흐르는 듯 유연한 몸짓으로 회의소를 나갔다. 로로와 에이가는 쿵, 하고 닫히는 나무문의 둔탁한 소리를 들은 이후에도 한동안 멍하게 왕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

에이가가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좀 유해지셨나 했습니다만… 이런 것은 참으로 바뀌질 않으시네요.”

“그 성질머리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타고난 것이니 바뀔 리가 없지요.”

“그래도 성혼식과 때마침 내려준 비 덕분에 폐하에 대한 적개심이 다소 누그러졌고…. 정말 좋은 기회인데….”

“언제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분이셨나요. 그저 구색만 갖추면 된다 생각하시는 분이잖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어쩌겠습니까. 그런 분이 왕인 것을.”

둘은 동시에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카르낙이 알현실을 나오자 어린 시녀와 시시덕거리던 핀이 곧장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가시게요, 폐하?”

“네 볼일 봐, 핀. 너는 쓸모없는 일이니까.”

“사랑하는 왕비님께 가시려고요?”

“…….”

“안 그래도 성안에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불과 반나절 만에 말입니다.”

소문? 카르낙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문? 핀이 피식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났나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저런 얼굴을 하면 꼭 더러운 이야길 하는데….

“폐하께서 거친 들판을 달리는… 종마라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설마… 여자 잡는 금수일 줄은 몰랐습니다그려.”

“…….”

카르낙이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그게?”

핀은 이죽거리며 그의 팔을 툭 쳤다. 짜아식, 이라는 추임새를 넣지도 않았는데 들리는 것 같았다.

“신방에 리쿠스가 다녀갔다던데? 파니릴리 왕비님께서 거동조차 못 하실 지경이란 말에 시녀들이 난리도 아니야.”

“…….”

카르낙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치 지가 그런 게 아닌 것처럼. 아이쿠. 이놈의 눈이 이렇게 컸던가. 간악한 고양이같이 생긴 놈이 제법 크고 똥그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군그래. 핀은 격정적으로 말을 더했다.

“그런 분인 줄도 모르고 제가 감히 경거망동을 했나이다, 폐하. 당신은 진정한 엘버그의 제왕이십니다, 카르낙 발투만.”

크으, 하며 핀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의 행동에 맞장구를 쳐 줄 기분이 아니었다. 신방에 리쿠스가 다녀가? 릴리가 거동을 못 해? 왜? 카르낙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 낯빛이 얼마나 하얀지 핀도 덩달아 당황하고야 말았다. 뭐야. 진짜 놀랐어?

보통 이럴 땐 ‘내가 말이야! 하도 보채기에 어젯밤에 우리 마누라를 곤죽으로 만들었지! 하하하! 당분간 제대로 걷지도 못할걸.’ 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사내들의 반응일 텐데 카르낙은 달랐다.

그쯤 되니 핀도 더는 농담이 나오지 않았다. 이젠 이 덩치 큰 멍청이가 대체 첫날밤에 제 아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십여 년 넘게 참아 온 성욕을 하룻밤 만에 다 폭발시켰나….

“…대체 어젯밤에 무슨… 야, 카르, 아니 폐하!”

그러나 카르낙은 핀의 물음을 다 듣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거의 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 곧장 신방으로 향했다. 마침 문 앞에 시녀와 이야기중인 리쿠스가 보였다.

“리쿠스!”

카르낙이 성마른 음성으로 부르자 리쿠스는 재빨리 몸을 숙여 그를 맞이했다.

“폐하.”

서둘러 오느라 흐트러진 카르낙의 검은 머리가 그의 가쁜 숨소리처럼 나풀거렸다.

“무슨 일이야? 릴리가 어디가 아픈 거야?”

어…. 리쿠스는 우물거렸다. 제 입술을 몇 번 씹고 뒤따라온 핀의 눈치를 살피고는 매우 곤란하고 난처하며 민망한 듯 그러나 반드시 고해야 할 일이니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성심껏 대답했다.

“그것이… 거동이 불편하시고 몸의 여기저기가 아프신 것은 분명하온데… 그렇다고 열이 있거나 두통이나 복통 같은 것은 없는지라…. 제가 보기엔 새… 새색시 병이 아닌가….”

“뭔 병?”

카르낙이 못 먹을 것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것은 뒤에 서 있던 핀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그런 병이 있어?”

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리쿠스는 곧바로 고했다.

“저도 얼핏 들어본 적은 있으나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데? 치료하면 나을 순 있는 거야?”

카르낙은 리쿠스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무슨 병이든 알 게 뭐야, 세상에 이름 없는 병이 얼마나 많은데. 중요한 건 고칠 수 있는지, 나아질 수 있는지 오직 그것뿐이었다.

“저도 사내인지라…. 송구합니다, 폐하. 이쪽에 대해서는 저도 무지하여 방금 시종에게 로리아나를 데려오라 명해 두었습니다.”

“대체 캘던성에 있는 사내들은 아는 게 뭐야! 너는 캘던성의 치료사면서 사창가에 사는 창부보다도 지식이 없단 말이야!? 이럴 바엔 아예 성안에 사창가를 차리자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들락거리는 시종이나! 말이나! 창부나 그게 모두에게 이롭겠다!”

카르낙이 참지 못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성을 잃은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려 댔다. 소리에 놀란 시종들이 지나가다 말고 슬그머니 복도의 기둥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왕의 진노에 모두가 놀랐겠지만, 누구보다 놀란 것은 리쿠스였다. 그는 곧 죽을 것같이 파리한 얼굴로 진땀을 흘려 댔다. 다시금 왕이 장검을 꺼내 들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소… 송구… 송구하옵니다, 폐하….”

더듬거리며 몸을 떠는 것이 툭 치면 쓰러질 환자의 모양새였다.

지가 릴리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누구한테 성을 내. 보다 못한 핀이 나섰다.

“로리아나를 찾으러 가는 거라면 그녀는 부나비에 없어.”

“예?”

이제 리쿠스의 얼굴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망자나 다름없는 빛깔이었다. 카르낙이 미간을 구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 하나 잡아 죽여야 성이 찰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할 말이 있다면 서둘러 해야 했다. 정말로 누구 하나 잡아 죽이기 전에 말이다.

“로리아나는 내 방에 있어. 아직 보내지 않았거든.”

“…….”

갑작스러운 침묵에 핀이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부르는 게 값인 여자야. 그 고생을 해서 얻은 하사품을 고작 하룻밤만 보낼 수 있어?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좀 더 즐기려고 그랬지.”

“…….”

“어쨌든 잘됐잖아. 사창가보다 가까운 데 있고. 안 그래?”

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르낙은 그런 핀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데려와, 당장.”

예. 예. 어련하시려고요. 핀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아주 점잖게 대답했다.

“예, 폐하.”

번개 같은 속도로 데려오겠나이다.

***

“…….”

로리아나는 발투만 왕가의 침실에서 할 말을 잃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이게 그렇게 다급하게 저를 찾을 만큼 큰일인가 싶은 황당함이 하나, 그러니까 좀 적당히 하지 싶은 원망이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는… 결국 루이스에게 소리를 지르고 만 것과 같은 이유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급료를 주지그래!’

뻑 하면 저를 오라 가라 하는 작태. 만일 그자가 엘버그의 왕이 아니었다면 일말의 여지도 없이 단칼에 거부했을 거다. 그러나 상대는 왕이고 자신은 창녀였다. 엘버그에 사는 이라면 그 누구도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왜 하필 왕은 동정인가, 왜 동정이면서 생긴 건 저렇게 생겼나, 왜 저렇게 생겨서 잔인한가, 왜 하필 잔인한 자가 엘버그의 왕이 되었나 그리고 왜 나는 하필 이들 사이에 엮였나. 저는 창부이지 의사도 아니요, 산파도 아니며, 왕족의 성교육 교사도 아니다.

그저 몸을 주고 그것으로 값을 받는, 믿는 것이라고는 제 몸뚱이 하나뿐인 장사치일 뿐인데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지…? 오고 가는 시간까지 쳐서 정당하고 온전한 값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데…?

“미안해요, 로리아나. 사실 서신을 보내려 했는데….”

그러다가 릴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침대 머리맡에 쿠션을 베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릴리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로리아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전하. 다시 뵙게 되어 기쁠 뿐입니다. 서신보다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전하께서도 더 편하실 겁니다.”

“…그렇긴 한데….”

하며 릴리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리쿠스, 세일린, 카르낙 발투만, 거기에 흥미진진한 눈을 하고 있는 기사단장 핀까지. 관객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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