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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79화 (79/231)

79화

세일린은 동이 틀 무렵부터 침실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본래대로라면 잔칫상을 새로 차리고 술을 내가고 어질러진 연회장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을 결혼식 이튿날의 아침이 카르낙의 불호령에 빗줄기에 젖은 흙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모두가 쫓기듯 성을 비운 것은 발투만 왕이 왕가의 첫 합방과 관습대로 그 증거를 기다리던 하객들에게 왕비의 피를 보려거든 먼저 그들의 피부터 보아야 할 것이라는 으름장 때문이라고 캐시에게 전해 들었다.

왕의 방식에 세일린은 무척 놀랐다. 엘버그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에게 첫날밤을 보낸 아내의 처녀성을 증명하는 관습은 여성의 명예를 드높여 주는 행위라 생각해 왔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순수하게 지켜 왔다는 증거를 내보여야만 모두에게 칭송받는 고귀한 부인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발투만 왕은 그것을 거부했다. 몇몇은 왕이 그것을 거부한 것이 혹시 파니릴리가 일찍이 처녀성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제 주인을 욕하는 것은 곧 자신을 욕하는 것과 같아서 세일린은 지난밤부터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딸깍, 하고 침실의 문이 열리고 크고 기다란 실루엣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왕의 것이었다. 세일린은 냉큼 허리를 굽혔다.

카르낙은 대충 지난밤에 벗어 던져둔 블리오와 바지를 걸친 채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흐트러진 차림새가 지난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옷이 내내 구겨진 채 방치되었음을 말해 주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제 앞에 조아리고 있는 어린 계집을 내려다보았다. 이 시녀의 이름이 뭐였더라…?

“…폐… 폐하.”

세일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자주 마주치는데 이름조차 묻지 않았던 것 같았다.

“네 주인을 기다리는 거야?”

“…예, 폐하.”

“그녀는 아직 곤히 자고 있다. 종일 피곤했을 테니 깨우지 않았으면 하는데.”

“예, 그렇다면… 여기서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여전히 세일린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대답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좀처럼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왕비의 거처를 내 침실로 옮기도록 해.”

그제야 세일린이 저도 모르게 벌컥 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요한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다시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침실을 함께 쓰는 부부라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잘 자리가 마땅치 않고 방이 부족한 하층민들이야 부부뿐 아니라 온 가족이 다 한 침대에서 부대껴 잔다지만 방이 넘쳐 나고 계급이 높을수록 이는 어불성설이었다. 남편과 아내의 공간이 각각 존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다 때를 정해 한방에서 동침을 했다. 대부분 아이를 갖기 위한 절차로서 후계자를 원하는 만큼 생성하면 그 이후엔 다시 자연히 본인의 공간에서만 생활했다.

캘던성에 넘쳐 나는 것이 방이건만 왕은 사는 것이 옹색한 하층민들처럼 아내와 한곳에서 부대끼며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일린은 토를 달 수 없었다. 상대는 왕이었고 저는 천하디천한 시녀였다.

왕의 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릴리가 왕과 한방을 쓴다면 자신은 아침저녁,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왕과 마주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네 이름을 모르는데 말이야.”

아, 하며 세일린은 더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마치 크게 잘못이라도 한 듯.

“셰일린이라고 합니다, 폐하. 송구합니다.”

“네가 송구할 건 또 뭐야. 이름을 몰라 물어보는 것뿐인데.”

“송… 송구….”

“나이는?”

“아, 나이…. 나이는 올해 열여덟입니다. 폐하.”

열여덟. 어리다. 뽀얀 얼굴에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볼이 통통했다. 그러나 그녀는 알기어스 왕이 생존했을 때부터 이 성에 있던 시녀였다. 카르낙보다도 이 성에 더 익숙하며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여긴 몇 살에 들어온 거야?”

“열다섯입니다, 폐하.”

열다섯. 카르낙이 그녀의 답을 곱씹으며 저의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열다섯에 그는 무엇을 했더라. 먹을 것을 찾아 뜨거운 사막을 정처 없이 거닐었던가. 그러다 해가 질 때쯤 부락으로 돌아와 죽은 이들의 시체를 무덤가로 옮겼던 것 같다.

그것이 아니면 하게너의 병사들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놈들은 늘 부락에 쳐들어와 노예로 부릴 만한 사내와 계집들을 소, 돼지를 묶듯 목에 올무를 걸어 잡아가곤 했다. 죽임을 당하거나, 죽음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거기서 도망가거나.

카르낙의 일생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참으로 서글픈 추억이다. 그러나 세일린의 인생도 그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열다섯에 이 성에 들어와 알기어스의 폭정을 겪고 하루하루 쌓여 가는 동료들의 시체를 보며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전전긍긍한 채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며 살아오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은 신의 자식을 죽인 투로의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한때는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혐오스러웠던 이에게 말이다.

“네가 릴리에게 지극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세일린이 호들갑스럽게 대답하였다. 그 반응이 웃겨 그는 피식 웃고 세일린의 작은 머리통을 두드리듯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내 아내를 성심껏 아껴 다오.”

“…….”

여부가 있겠느냐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대답해야 했다. 그러나 세일린의 머릿속은 그 순간 백지장처럼 하얗게 바랬다. 왕의 커다란 손이 제 머리를 톡톡, 가볍게 두드려 주었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니 빙그르르 세상천지가 뒤집혔다.

“무료할 테니 심부름 하나만 해 주겠어? 근위 대장을 찾아내 서재로 오라고 해.”

“…예….”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카르낙은 세일린을 지나쳐 갔다. 서재로 향하는 왕의 뒷모습을 보며 세일린은 홀린 듯 대답을 마쳤다.

“…폐하….”

릴리는 정오가 다 되어 갈 때쯤 잠에서 깼다. 카르낙이 휘장을 쳐 놓은 탓에 내내 침대는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고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휘장을 걷어 낼 때쯤에는 이미 눈이 따가울 정도로 햇살이 눈부신 시각이었다.

전날의 후유증 때문인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가 땅겼고 자세를 바꿀 때마다 아랫도리가 쓰라렸다. 도저히 혼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무언가를 할 자신이 없어 침대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은 채 말했다.

“밖에 누구 없어요?”

주인의 고함에 세일린이 쏜살같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휘장을 걷고 발가벗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릴리가 보이자 세일린의 낯빛이 잔뜩 굳었다.

“전하.”

“세일린.”

“괜찮으세요?”

겁을 집어먹은 세일린에게 괜찮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괜찮지가 않아 릴리는 제 입술을 한 번 질끈 물었다가 최대한 안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슈미즈를 좀 입혀 줄래요?”

릴리의 말에 세일린은 휘장을 모두 걷어 기둥에 단단히 묶고 슈미즈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침대 밑으로 반쯤 들어간 슈미즈를 발견하고 재빨리 구겨진 옷가지를 탁탁 털었다.

“왕비님, 리쿠스를 부를까요?”

세일린은 릴리의 머리에 슈미즈를 씌우고 소매에 팔을 끼우는 것을 도우며 물었다. 릴리는 나머지 팔 한쪽도 슈미즈에 끼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과연 그럴까. 알기어스 왕을 모실 때에도, 노서스 백작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할 때에도 잠자리 뒤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귀부인을 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난봉꾼이었던 알기어스 왕의 그 수많은 연인들 중에서도 없었다.

“…배가 고파요.”

슈미즈를 무릎까지 끌어 내려주는데 릴리가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일린은 릴리의 등 뒤에 베개와 쿠션을 겹쳐 편히 기댈 수 있도록 한 다음 그녀의 하반신을 누비로 덮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전하. 제가 맛있는 음식을 잔뜩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폐하는 어디 계세요?”

“폐하는….”

어쩐지 목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세일린은 꿀꺽 침을 한 번 삼켰다.

“폐하는 아침 일찍 기침하셔서 정무를 보러 가셨습니다. 지금은 관료분들과 함께 알현실에서 회의 중이십니다.”

사내들은 모두 그토록 체력이 좋은가. 로리아나가 첫 경험은 힘들 거라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카르낙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한다니. 저는 날이 밝는 줄도 모른 채 곯아떨어졌는데…. 벌써부터 캘던성의 안주인으로서 실격인가 싶어 멍하게 해가 중천에 뜬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일린은 밖으로 나가 전하가 드실 식사를 챙겨 오라고 시킨 뒤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창밖을 바라보는 릴리의 하얀 얼굴이 유난히 파리해 보였다. 어쩐지 축 처져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폐하께서 전하가 곤히 주무시는 것 같으니 깨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친절하시네요, 하고 혼잣말을 하며 릴리는 고개를 돌려 세일린을 보았다. 차분한 눈빛이었으나 좀 전보다는 생기가 돌았다.

“지금이 몇 시쯤일까요?”

“정오가 조금 지났습니다. 전하.”

“이렇게 늦잠을 잔 건 처음이에요.”

“어제 하루 종일 고단하셨으니까요. 원래 결혼이란 것 자체가 여인에게는 큰일이라 들었는데 하물며 전하께는 더하지요. 게다가 워낙… 워낙,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그래, 많은 일이 있었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어쩐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결혼을 했다. ‘전하’라는 생소한 호칭이 새삼스레 그것을 자각하게 해 준다. 릴리는 전날의 일을 곰곰이 떠올렸다. 디셋 사제의 죽음과 카르낙에게 전해 들은 반스와 에나에 대한 이야기와 계획들.

그리고 마침내 내려 준 단비. 한결 시원해진 공기와 건조하지 않은 바람을 느껴 보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희극과 비극이 하루 사이에 참으로 촘촘하게도 벌어졌다.

릴리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골몰했다. 단지 카르낙과 몸을 섞고 그의 장자를 낳아 주는 것 말고, 그 외에 자신이 그를 위해 해야 할 일들. 엘버그의 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일단은 지난밤 카르낙의 불호령 때문에 쫓겨나듯 도망간 하객들의 일부터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릴리는 아내의 피를 만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카르낙의 심정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고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나 고맙고 감사한 일일 뿐.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격인 엘버그의 영주들에겐 그렇지 않으리라. 에나와도 척을 진 마당에 유사시 군대를 파견해 줄 동맹들과의 사이에 균열을 일으킬 순 없었다.

카르낙이 잘하는 것은 화를 내는 것이고 자신이 잘하는 것은 입바른 소리로 감사와 사과를 표하는 일이니 아무래도 이 일은 자신이 맡아야 할 것 같았다.

“세일린, 펜과 종이를 좀 가져다주겠어요?”

“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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