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녀가 주고 싶은 행복은 훨씬 더 깊고 크고 넓었다. 단 한 순간 그를 웃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 그를 웃게 하는 것이었다.
“충분치 않아요. 폐하께선 더 많은 행복을 가질 자격이 있으십니다.”
카르낙은 잠시 동안 릴리의 말을 곱씹었다. 무용한 기억을 헤집고 단어를 음미하다가 그는 마침내 말하였다.
“너뿐이야, 릴리. 내게 그렇게 말해 준 이는.”
모두가 나의 불행을 원하는데. 모두가 나의 행복을 불안해하는데. 누구도 내게 행복이란 단어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내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뿐이다. 그러나 너만은 릴리, 너만은 나의 행복을 원한다고.
거짓을 고할 줄 모르는 입으로 참으로 순수하고도 허망한 것을 이야기한다. 네가 있어야 내가 행복하다 말하면 그러면 너는 어쩌겠는가.
그럼 너는 기꺼이 내 곁에 있어 줄 텐가. 그라타로 돌아가길 원하는 너의 간절한 소원은 단념하고? 그 정도로 너는 나의 행복을 염원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소원보다 죽음이 무서울진대, 눈앞의 여인은 저를 위해 기꺼이 죽을지언정 저를 위해 신념을 꺾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릴리, 나의 행복이 아니라 내가 너의 삶보다, 너의 신념보다, 너의 바람보다 더 크고 깊은 존재가 되는 거다.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너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내 곁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묻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가까이 둘 수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외면하며 너를 곁에 두련다. 이기적일지라도 그것이 지금 카르낙 발투만이 원하는 모든 것이다.
“내가 행복해지길 원한다면, 릴리,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 줘.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잘 모르시겠지만… 폐하께선 가끔 난봉꾼 같은 말을 하세요.”
“난봉꾼?”
“그러니까 여인이 들으면 대단히….”
“대단히?”
“마음이 동할 것 같은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르낙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 뜻을 반추해 보려 골몰했다.
“…그러니까 그게 좋은 뜻이야, 아니면 나쁜 뜻이야?”
“저에겐 좋지만 다른 이들에겐 나쁜 뜻이지요.”
“…….”
“그냥 그렇게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뭐야, 싱겁긴. 카르낙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하객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괜찮을까요?”
릴리가 타들어 가는 시트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모두 다 돌아갔을 거야. 죽고 싶은 놈들만 빼고.”
“예?”
혼잣말을 하듯 그런 게 있어, 하고 중얼거리더니 카르낙은 탁자로 가 포도주가 담긴 잔을 단번에 비웠다. 그러고는 거기에 서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릴리를 바라보았다. 난잡하게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 아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뽀얀 살결이 눈부셨다.
하반신에 다시 피가 몰렸다. 카르낙은 부러 잔을 채우는 척 아내에게서 눈을 돌렸다. 안 된다. 일을 치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릴리는 피까지 흘렸다고. 아파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사람을 보며 그게 서냐? 짐승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벌레 놈 주제에 양심마저 개미 똥구멍만 한 건가. 눈치를 좀 챙겨라, 눈치를, 사악한 분신아.
“그럼 오늘은 계속 함께 있는 건가요?”
갑작스레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렸다. 움찔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알몸의 릴리가 바로 제 뒤에 서 있었다.
“깜짝이야!”
카르낙이 질겁을 해 소리를 질렀다. 릴리도 덩달아 가슴을 쓸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카르낙은 어색한 동작으로 얼른 가운을 더 여몄다.
“아니, 갑자기 뒤에 서 있어서.”
“죄송해요. 기척이 없는 건 양탄자 때문이지, 고의는 아니었어요.”
“물론이지. 나도 알아. 그냥 놀란 거야. 사과할 필요는 없….”
어, 하고 말을 끝마치려다 릴리가 탁자 위의 청포도 한 알을 집어 작고 도톰한 입술 안에 넣어 탐스러운 혀로 굴리는 모습 때문에 소리를 허공으로 날려 버리고 말았다. 심란하다, 심란해. 몹시도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 장면이로다.
차라리 추접하게 입 안에 청포도를 마구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어 다오. 그러다가 막 달고 시원한 과즙이 입술을 타고 질질 흘러내리면… 그러면 그걸 내가 혀로… 안 돼! 카르낙은 저 혼자 도리질을 쳤다. 생각이 거기로 흘러가면 안 돼!
“칼.”
“예?”
아니.
“어?”
“답을 안 해 주셔서요. 오늘 계속 함께 있는 건가요?”
“…….”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함께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릴리의 숨소리조차도 위험하게 느껴졌다. 한번 회포를 푼 저의 분신은 맛이 들었는지 눈치도 없이 기립해 닦달을 해 댔다. 한 번 더! 한 번 더!
릴리의 새하얀 젖가슴이 보였다. 시선을 주고 싶지 않아도 시선이 갔고 시선을 회피하고 있을 때도 멋대로 그것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칼?”
릴리의 고개가 의아하다는 듯 한쪽으로 기울었다. 카르낙은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이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될지 모르겠어.”
“어째서요?”
묻는 눈이 참으로 무구했다. 그는 품위 있는 신사도 아니고 우아한 귀족도 아니어서 이런 경우 고관대작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때에 어떤 말로 여인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심신을 설명해야 하는지 배워 본 적도 없는 바, 카르낙은 그저 저답게 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낙은 릴리의 손을 잡아 제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릴리의 손길이 닿자 놈이 열렬히 반응했다. 아까의 상태가 기립이었다면 이젠 아주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는 격이다.
“아.”
하고 작게 감탄사를 내뱉더니 릴리는 곤란한 얼굴의 카르낙을 올려다보았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꽤 난처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
놀라긴 했다. 건장한 사내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할 수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회복된다는 이야기는 로리아나로부터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삽입은 처음이었어도 그에겐 세 번째 사정이 아니던가.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던데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이었다.
엘버그에서 사내아이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코 밑에 수염이 날 때쯤이 되면 동정을 뗀다고 들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러지 못한 채 오랫동안 참아 왔으니 어쩌면 이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영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괜찮습니다.”
릴리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것을 쥐었다. 그러자 아흑, 하고 카르낙이 허리를 굽혔다.
***
장대 같은 비 덕분에 말이 발을 구를 때마다 질척한 진흙이 튀어 올랐다. 속도를 높일수록 뭉쳐진 말의 갈퀴가 그의 손등을 때렸다. 푹 젖은 망토는 비를 막아 주긴커녕 그의 몸을 더 무겁게만 했다.
그는 캘던성의 도개교를 지나 무리 없이 성안으로 들어섰다. 벌써 성체의 입구에는 로로가 서 있었다. 핀은 머리까지 덮어쓴 망토 모자를 벗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적하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인 성내 분위기가 의아했다. 핀은 말에서 내리며 곧바로 로로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게? 벌써 결혼 잔치가 끝난 거예요?”
결혼 잔치는 젼야제를 포함해 적어도 3일은 이어지는 것이 관례라 들었다. 핀이 성으로 돌아온 것은 결혼식 바로 다음 날 아직 동이 터 오기 전의 어두운 새벽, 아직까지 질펀한 술자리가 이어져야 마땅하건만, 환하게 밝아야 할 대연회장은 물론 성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성벽에 걸린 횃불들뿐, 술에 취한 사람들도, 왁자지껄한 소음도, 내부에 진동해야 할 술 내음도 없었다. 결혼에, 마른하늘에 단비까지 내렸다면 그야말로 기쁨에 겨워 광기의 축제를 벌여야 하는 것 아닌가.
“폐하께서 모두 돌려보내셨습니다.”
로로의 대답이 더욱 핀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카르낙이? 왜요?”
“엘버그의 결혼 관습 때문이지요.”
결혼 관습? 엘버그의 결혼 관습에 뭐가 있더라? 그냥 서로 반지나 나누어 끼고 신방에 들어가 떡 치는 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그가 아는 관습이라고는 신랑 신부가 뜨거운 밤을 보낼 동안 하객들은 술에 절여져 아무 곳에나 소변을 보고 그 위에 쓰러져 잠드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카르낙은 하객들이 저의 결혼식에서 추태 부리는 것을 못 봐주겠단 말인가? 저는 그동안 남의 결혼식은 물론이요, 남의 장례식에서도 온갖 추태를 부려 놓고?
핀은 혀를 차며 성채에 들어섰다.
“그래서 지금 폐하는 어디에 있나요?”
“신방에 계십니다.”
핀은 흘깃 창밖을 보았다. 동이 트려면 아직 서너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이것은 카르낙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고, 곧 엘버그에서 가장 중대한 일이 될 터였다.
“당장 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폐하의 서재에서 잠시….”
“그럴 시간 없어요, 로로.”
핀은 힘주어 거절하고 탑의 계단을 두세 개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젊은이의 속도를 따르기에 관절염이 온 로로의 무릎은 한계가 있었다.
“기다려요, 핀. 폐하께서는 지금 결혼 첫날밤을 보내는 중이십니다.”
“폐하 성격에 지금쯤 떡은 칠 만큼 쳤을 테니 아마 괜찮을 거예요. 쳐 자빠져 자고 있다는 데에 내 명예를 걸죠.”
“…….”
거침없는 언변에 로로는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쏜살같이 사라지는 그를 따라 종종거렸다.
“핀! 기다리세요! 절대 벌컥 열고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기다리세요, 핀! 제가 먼저 폐하를, 폐하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