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부끄러워할 것 없어. 날 위해 애써 주었다니 그저 기쁠 뿐이야. 너는 참으로 좋은 아내다, 릴리. 진심이야. 그러니….”
카르낙은 릴리의 무릎을 침착하게 벌리며 말을 이어 갔다.
“나도 좋은 남편이 될 기회를 줘.”
“…….”
“응?”
왕의 애원은 그녀에게 치명적이었다. 카르낙이 아이처럼 조르면 릴리는 모든 전의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제 무릎을 기꺼이 벌려 주었다. 그것이 비록 낯 뜨거울 정도로 부끄러운 것이라 하여도 속수무책이었다.
카르낙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릴리의 사타구니를 살폈다. 카르낙의 체액으로 허벅지까지 젖어 있었고 릴리의 밀부는 모양이 조금 변해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작고 홀쭉한 구멍이 눈에 잘 보였다.
그것을 제가 무참하게 찢어 가르고 들어갔다 생각하니 무조건 제 아내에게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르낙은 정성 들여 그녀의 밀부와 허벅지를 꼼꼼히 닦았다.
불현듯 릴리가 물었다,
“…혹시 피가 묻었나요?”
카르낙은 제가 들고 있는 천 뭉치를 살펴보았다.
“조금. 아주 약간 묻었어.”
그것은 곤란했다. 릴리는 침대를 살피며 구겨진 시트 이곳저곳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마침내 제 몸에서 흘러내렸을 핏방울들을 발견하고는 ‘아’ 하고 안도했다.
“다행이에요. 설마 피가 나지 않은 건가 걱정했어요.”
릴리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엘버그의 전통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미천한 농민의 혼례에서도 첫날밤 아내의 순결은 중요하다 했다. 하물며 이 결혼은 엘버그 국왕의 결혼식이었다. 그러니 첫날밤 순결을 상징하는 핏자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증명일 터였다.
카르낙은 릴리의 사타구니를 말끔히 닦아 내고 그녀의 눈길이 닿은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짙은 붉은빛의 핏방울이 여러 점 떨어져 번져 있었다. 그는 젖은 수건을 물그릇 안으로 던져 넣고 시트를 잡아 아내의 처녀 혈이 묻은 천을 찍찍 찢어 냈다.
릴리는 엘버그의 전통에 따라 카르낙이 그것을 챙겨 밖으로 나가리라 생각했다. 혹, 나가고 싶지 않다면 로로나 루이스나, 누구든 자신의 심복에게 그것을 주어 하객들에게 증명하라 명령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것을 가지고 벽난로로 향했다. 그리고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그는 타오르는 장작더미 안으로 그것을 던져 넣었다.
“칼!”
릴 리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돌아보는 카르낙의 낯빛이 단호했다. 불길이 그의 얼굴을 날카롭게 반사해 보였다.
“어째서… 어째서 그것을….”
“누구에게도 보여 줄 생각 없어.”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왕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아내의 순결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이것이 적절하고 적법하며 이치에 맞는 결혼이라고 납득시키고 인정받아야 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 증거를 태웠다. 이젠 이 결혼의 타당성을, 도덕과 적법함을 증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저의 순결함을 증명해야 하잖아요.”
“네 순결함은 내가 알고 있어.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증거가 없으면 사람들은 폐하께서 흠이 있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생각할 거예요.”
“상관없어.”
“저는 폐하의 오점이 되고 말 거예요.”
“너는 네 처녀성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것이 도덕적인 일이라 생각해?”
“…….”
아니, 그렇지 않아. 사내들은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사창가를 드나드는데 막상 여인들에게는 순결을 강요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해 봐, 릴리. 네가 살던 그라타에서도 여인의 순결은 중요했나?”
카르낙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그라타에선 여인의 순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일생을 함께할 이가 저와 얼마나 잘 맞느냐였다. 그라타에서는 혼인을 올리기 전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남녀에게는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동안 남녀는 서로 얼마나 잘 맞는지를 열심히 탐구하곤 했다. 물론 그중에는 둘의 속궁합도 포함되었다. 그것까지 모두 알아본 뒤 제 짝이라 생각하면 혼인을 올렸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문화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엘버그에는 엘버그만의 오랜 관습과 문화가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뿌리로 질서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간다. 릴리는 최대한 그것을 존중하고자 했다. 특히 카르낙의 안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아니요. 하지만 엘버그에서는 중요한 문제잖아요.”
“이젠 중요하지 않아. 내가 따를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피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너의 처녀성은 내가 증명한다, 릴리.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죽일 거야.”
“…….”
카르낙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일말의 재고도 없다는 듯 확고했다.
“내 앞에서 감히 내 아내를 검증하려 든다면 그게 누구든, 몇이든 전부 죽이겠어.”
“…….”
릴리는 말을 잃고 말았다. 잔인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오늘부로 아내의 처녀성을 증명하는 엘버그의 관습은 사라졌어. 이후 누구든 이 관습을 따르는 자는 광장에 효수될 거야.”
오랫동안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에 영향을 끼친 관습은 그토록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란 누구든 급작스러운 변화에는 저항하는 법이다. 그러니 너무나 잔인한 처사라고,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이성적인 머리와는 다르게 릴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카르낙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런 악습 따위 다소 저항이 있더라도 단칼에 잘라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마음에도 없는 만류를 하는 것이 정말 옳은 방법일까?
그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엘버그의 악습을 그저 지켜온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걸까. 사실은 이딴 말도 안 되는 관습 따위 전부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실용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겁고 치렁치렁한 드레스, 딱딱하고 쓸모없는 구두를 비롯해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과 계급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불평등 따위들 말이다.
카르낙은 열기를 뿜어내며 천을 집어삼키는 장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불길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찰나,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난 엘버그를 파괴할 거야, 릴리.”
“…….”
“엘버그의 전부를.”
엘버그의 전부. 릴리가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엘버그를 완전한 ‘무’의 상태로 만드는 거지. 마치 사막처럼 말이야.”
“…투로들의 고향처럼 말인가요?”
릴리가 묻자 카르낙의 얼굴에 옅은 비소가 비어져 나왔다.
“맞아. 우리 모두 투로가 되는 거야.”
불길을 바라보던 카르낙이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때? 두려운가?”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어쩐지 보는 이가 슬퍼지는 웃음이었다.
“아니요.”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삶은 언제나 고행이었다. 숨이 다 하는 날까지 그것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 것과 같은 이치의 삶. 만일 그것이 겪어야 할 고난이라면 릴리는 버틸 수 있었다.
인간은 시련 앞에서야 비로소 성장한다고 부르테는 말하곤 했다.
“릴리, 보렴. 마른 땅과는 달리 젖은 땅 위를 걷는 것은 무척이나 고되지만 우리가 걷기를 포기하면 결코 그 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단다. 있는 힘껏 그것을 헤치고 나와야 비로소 안식을 취할 수 있지. 그제야 비로소 마른 땅 위를 걷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알게 되고, 비로소 젖은 땅 위를 쉽게 걸을 수 있는 방법을 골몰하게 되는 거란다. 만물의 이치는 모두 그와 같아서 대지는 늘 우리 앞에 시련을 준비해 두지. 모든 생명은 그렇게 성장하는 거란다, 릴리. 그러니 늘 삶은 고행이라 생각하렴.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면 너는 아득히 높은 곳에 있을 거야. 내가 헤쳐 온 시련만큼 높고 단단해져서 그 어떤 시련도 너를 흔들거나 꺾지 못하게 될 거야. 그렇게 우리는 신에게 다가간단다. 자비로운 어머니의 품으로 말이야.”
“저는 폐하의 백성이니 폐하께서 투로의 왕이시라면 저는 마땅히 투로입니다.”
그 말에 카르낙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엉뚱하지만 현명한 답이야, 릴리.”
릴리는 찢어진 침대 시트를 매만지다가 물었다. 뜯어진 실밥이 계속해서 풀려 나왔다.
“그 이후엔 무엇을 하실 건가요?”
“무엇을?”
“모두가 투로가 되고 엘버그 왕국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요. 그 이후엔 무엇을 하실 생각이세요?”
그 이후. 카르낙은 다시 벽난로에 시선을 주었다. 그 이후라.
“…글쎄. 그 이후. 그 이후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모호하게 답했다. 그 이후의 미래가 있긴 한가? 아무리 해도 그려지지가 않았다.
나 따위가 왕이 되는 순간부터 이 대륙은 이미 끝난 거야. 이미 구멍이 난 배와 다름없어. 그렇게 서서히 가라앉는 거다. 영영 사라져 버리는 거지. 사람들의 입에서나 전해 듣는 옛날이야기가 되는 거야. 그런 왕국에 어떤 미래가 있겠는가. 남은 것은 멸망뿐이다. 그때까지 투로가 세운 발투만 왕가는 끊임없이 싸움만 하리라.
끝내 적법한 왕이 되지 못한 채, 끝내 대륙을 통일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반란에 지쳐 가며 그렇게 몰락하겠지. 그것이 카르낙이 그린 그의 미래였다. 저에게 딱 걸맞은 미래라 그는 생각했다. 비루한 왕과 천박한 왕가에 걸맞은 처참한 최후.
그리고 릴리, 너는 가엽게도 그런 나와 같은 길을 걸으리라. 나 같은 사내와 손을 잡은 죄로 너 역시 나처럼 비참하게. 카르낙은 다가가 릴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고귀한 여인을 숭배하는 기사처럼 경건한 모양새였다.
“릴리, 너는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고 했지.”
“네, 폐하.”
카르낙이 그녀의 손을 제 뺨 위로 옮기며 말했다.
“이미 너는 나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는 카르낙의 얼굴은 전에 없이 평온하였다. 자칫 정말 그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릴리가 그에게 선사하고픈 행복은 단지 찰나의 희열이나 쾌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