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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71화 (71/231)

71화

“리쿠스를 데려와. 당장.”

“예, 예! 폐하!”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카르낙은 무서운 기세로 아까 루이스를 몰아넣었던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저러다 누구 하나 경을 치는 것이 아닌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로리아나를 함께 태운 채 질주하던 루이스의 말이 성문을 지나자 속도를 늦추었다. 로리아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루이스에게 물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나를 캘던성의 자문관으로 임명하는 건 어때?”

절반은 농담이고 절반은 진담이었다. 며칠 새에 이렇게 오라 가라 할 거면 차라리 그편이 낫지 않겠나 싶었다. 어처구니없으나 실용적인 방법이 떠오른 것뿐이다.

“원한다면 책을 한 권 써 줄 수도 있고 말이야. 야화를 끝내주게 잘 그리는 화가도 알고 있거든. 어때? 솔깃하지 않아?”

“전혀.”

루이스는 덤덤히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로리아나는 예쁘장한 미간을 구기며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고는 시를 읊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계집들에게 인기가 없는 거란다, 루이스.”

“무슨 소리야! 계집들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발끈하여 소리를 지른 루이스는 익숙하게 로리아나의 허리를 안아 말에서 사뿐히 내려 주었다. 부나비 최고의 창부답게 낭창한 허리는 부드럽고 부러질 듯 가녀렸다. 로리아나는 루이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으며 코웃음을 쳤다.

“네가 아니라 네 허리에 찬 돈주머니를 좋아하는 거겠지. 아직도 그걸 구분 못 한단 말이야? 딱하게도?”

“내 허리 아래의 다른 것을 좋아하는 거야.”

“네 허리 아래에 다른 것이 뭐가 있니? 하나같이 볼품없는 것뿐인데. 내가 봐서 알지.”

로리아나의 도발에 루이스는 ‘익’ 하는 소리를 내며 어금니를 물었다. 어쨌든 로리아나는 자신의 동정을 가져간 사람. 그 앞에서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 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더 비웃음만 살 뿐이다.

로리아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나른하게 부채를 펴 들고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손목에 주렁주렁 걸린 보석들이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어디, 그 잘난 발투만 왕의 실물을 좀 보자고. 과연 성벽에 걸린 그림처럼 생겼는지 말이야.”

“따라와.”

루이스는 씩씩거리며 앞장섰다. 로리아나의 웃음기 가득한 눈이 집요하게 그의 뒤통수를 따랐다. 하여간 놀려 먹는 재미가 있는 놈이었다.

둘은 시끌벅적한 연회장을 지나 좀 더 성안 깊숙이 들어갔다. 로리아나는 지난번 파니릴리를 만나러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참 재미있었지. 대화도 정말 즐거웠다. 다시 뵐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은 했지만 자신 같은 창부가 왕비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남녀 간의 성애에 무지한 사람들도 어찌 되었건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잘만 살고 있으니, 로리아나처럼 쾌락이 곧 밥벌이인 창부가 아닌 다음에야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닐 테고 말이다. 그런데 또 부른다… 라. 그것도 캘던의 사창가는 물론 제 수족들이 모두 여자를 품으러 아랫도리를 세우고 돌아다닐 때 여인의 그림자도 보지 않았다던 그 석상 같은 사내가 말이다.

릴리는 학구열이 높은 학생이었다. 가능하면 많은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려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려 애를 썼다. 무엇보다 남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비기를 배운다는 마음가짐이 훌륭하지 않은가.

로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파니릴리라면 필시 별 탈 없이 남편을 만족시켜 줬을 터였다. 그런데 뭐가 그토록 급해서 이 야밤에 루이스를 질주하게 만들었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계단을 올라 막 계단에 들어섰을 때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근위병 하나가 루이스를 발견하고는 냅다 뛰어왔다.

“루이스 경!”

루이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찌나 다급한지 자칫 애절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급하게 찾으셨습니다.”

염병할. 어쩐지 그럴 것 같아서 서둘러 왔더니…. 어디 캘던 사창가가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인 줄 아나,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려도 한 시간은 너끈히 걸렸다. 거기에 또 말에서 내려 부나비에 들어가, 로리아나를 찾아서 사정을 설명하고, 또 말에 태우기까지의 시간까지 계산하자면 거기에 한 시간 정도는 더 더해야 한단 말이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니, 그나저나 왜 자꾸 신방에서 나오는 거야? 가르쳐 줄 건 다 가르쳐 줬다. 대체 남녀가 떡을 치는데 무슨 메커니즘이 더 필요하냐고. 그냥 대충 박고 싸면 끝인데!

이럴 때 핀이 있었더라면. 그가 있었다면 애초에 자신이 카르낙에게 시달릴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는 어딜 갔단 말인가. 그래서 대체 언제 오는 건데! 루이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로리아나도 제 치맛단을 붙들고 그를 바지런히 따랐다. 그러며 물었다.

“미리 내가 알아야 할 것 있어? 예를 들면 발투만 왕이 남들과는 좀 다른 취향이라던가, 아니면 어딘가 기형이라거나.”

“난들 어떻게 알겠어? 같이 떡을 쳐 봤어야 뭘 알지. 당신도 어쩌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폐하께서는….”

혀를 차며 대답하다가 루이스는 잠시 망설였다. 이걸 이야기해도 될까. 짐짓 알고는 있겠지만 말해도 되는 건가. 카르낙 발투만의 체신을 깎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어차피 불러온 거. 왕이 이 방면에는 아주 무지렁이라는 것을 로리아나도 알 필요가 있었다.

“폐하께서는 동정이셔.”

“뭐?”

로리아나가 다시 묻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니, 결벽적이란 건 알지만, 여자를 멀리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몇 번 지껄이기는 했었지만. 말이 씨가 된 건가? 동정이라고? 왕이? 엘버그의 왕이? 그 몸에 그 얼굴로?

차라리 남색을 한다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우리라. 그러나 실내가 환히 보이자 로리아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얼굴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인상을 펴고 벌렸던 입을 다물고 최대한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부드럽고 푹신한 고급 양탄자가 발에 밟혔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이제야 정말로 왕의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폐….”

루이스는 카르낙에게 로리아나를 소개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방 안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가 들어와 있었다.

“…리쿠스…?”

맞아, 리쿠스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리쿠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목이 달아날 듯 잔뜩 겁을 먹은 모습은 분명 치료사 리쿠스였다.

“…리쿠스가 왜….”

“내가 불렀다.”

대답하는 카르낙의 목소리를 따라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가 루이스는 왜 리쿠스가 저렇게 떠는지 곧바로 알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밤 배경을 뒤로하고 화려한 비단 의자에 앉은 카르낙의 한 손에는 분명 검이 들려 있었다. 그건 마치 지팡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뾰족한 끝이 양탄자를 뚫고 바닥에 박혀 있다는 것이 달랐다. 카르낙은 어금니를 꽉 문 채 말했다.

“짐은 지금 몹시 기분이 좋지 않다.”

“…….”

그래서 누구 하나 멱이라도 따려는 건가. 현기증이 나 루이스는 잠시 몸을 휘청했다. 아니, 기쁜 결혼식 날에 사제의 목을 땄으면 됐지, 뭐가 또 모자라서….

로리아나는 카르낙을 보자마자 다물었던 입을 다시 벌렸다. 기골이 장대한 것이 고작 얇은 실크 가운으로는 그의 몸을 가릴 수 없었다. 근육질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날카로운 콧날에 저 퇴폐적인 눈동자는 또 어떤가.

동정? 동정이라고? 생긴 것은 한 번에 열댓 여자를 상대해도 모자랄 판으로 생겼는데? 투로들이 아무리 엘버그인들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하다 하더라도 카르낙 발투만의 경우는 특별했다.

로리아나는 투로를 포함해 자신이 만나 본 엘버그의 모든 남자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이와 비슷한 사내를 본 일이 없었다. 엘버그를 통틀어 가장 미남자인가는 몰라도 엘버그를 통틀어 가장 야하게 생겼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정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손만 까닥해도 여자들이 치마를 벗고 달려들게 생겼고만.

“…몹… 몹시 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저는 여인도 보살피기는 하나 사내의 몸으로 한계가 있어… 자…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뭘 모른단 거지? 루이스는 인상을 구기고 다시 카르낙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불만과 짜증과 분노가 가득했다.

“설마….”

루이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또 실패하신 건….”

“…….”

카르낙이 눈꺼풀을 한번 무겁게 내렸다 치떴다. 루이스는 그 행동에 담긴 대답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오, 신이시여. 시발.

“또요? 또? 이게 무슨 흰 눈 속에서 이빨 찾기입니까?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예요? 에? 아니, 이게 무슨 연금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복잡할 게 하나도 없는데 대체, 아니… 무슨… 폐하 혹시 시력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그래. 나불거릴 수 있을 때 맘껏 나불거려. 곧 네놈의 세 치 혀를 지져 버릴 테니까!”

카르낙이 이를 갈며 언성을 높였다. 이젠 왕이고 뭐고 잊었다. 카르낙은 왕이 되기 전 반란군의 우두머리 카르낙 발투만으로 돌아가 있었고, 루이스는 그의 동료였던 용병 루이스로 돌아가 있었다.

보통 핀과 카르낙이 이런 식으로 으르렁거렸고 루이스는 그 사이에서 진력을 내며 말리는 역할을 맡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오늘은 핀이 없었고 카르낙은 루이스를 향해 성을 내고 있었다.

“너야말로 사창가 드나들며 계집들을 안았다는 건 순 구라 아니야? 대충 침 발라 박고 싸면 끝이라고? 뭐랑 한 거냐! 나무토막이랑 뒹굴었냐! 아니면 개돼지랑 뒹굴다 온 거냐!”

“…뭐, 뭐라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야말로 벌써 노안이 온 거 아닙니까! 아니면 좆이 바늘만 해서 들어가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예?”

“자타공인 창놈은 무슨! 그래! 창놈은 창놈이겠지! 사내새끼들한테 후장이나 대주는 창놈!”

“으아니! 이제 막 가자는 겁니까!”

그러자 카르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땅에 박혔던 검을 번쩍 들었다.

“네놈이야말로 지금 하극상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저처럼 충직한 놈이 어딨습니까! 떡치는 법도 알려 줘! 그것도 모자라 창녀도 데려와 줘! 공을 치하해도 모자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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