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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64화 (64/231)

64화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서자 더운 기운과 자극적인 미향이 확 끼쳤다. 붉고 노란 벽난로의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그 안에 릴리가 있었다. 자신이 씌워 준 왕관을 쓰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침대 위에 앉아 있던 그녀는 카르낙을 보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카르낙은 그녀의 표정을 잘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표정은 너무도 잘 읽히리라. 풋내기같이 덜떨어진 얼굴을 말이다.

쿵, 하고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에 카르낙의 심장도 함께 쿵, 하고 바닥으로 낙하하였다. 술기운이 이제야 퍼지는 듯 눈앞이 핑 돌았다. 땅에 발이 붙은 듯, 박아 놓은 말뚝처럼 서 있는데도 몸이 휘청이는 것 같았다.

장작과 과실의 향이 혼탁하게 섞여 있는 방 안은 그렇게 한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얼어붙은 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다가 어떻게든 먼저 정신을 차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먼저 입을 연 것은 릴리였다.

“포도주를 한 잔…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뱉고 나니 아차 싶어 정정했다.

“줘.”

“예?”

이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헷갈리게. 첫마디부터 틀려먹은 자신이 한심해 카르낙은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대답했다.

“그러니까… 포도주 말이야. 먹고 싶다는 말이었어.”

“아, 네.”

릴리가 반가운 기색으로 몸을 움직였다. 두 개의 잔에 모두 술을 채우고 한 손에 하나씩 들었다. 릴리는 그중 하나를 다가오는 카르낙에게 내밀었다. 딱 손을 뻗어 닿을 만큼만 거리가 좁혀졌다.

“고마워.”

“비가 오니 날씨가 선선해졌습니다. 폐하.”

“…….”

“덕분에 디셋의 죽음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다지 비극적으로 남지 않을 거예요. 우리로선 정말 다행이지요. 때마침 내려 준 비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비가 네 근심을 씻어 간 모양이야.”

“저의 근심이요?”

“그래.”

“어떤 근심을 말씀하시는지요?”

“난 디셋의 죽음이 너를 괴롭히진 않을까 내내 걱정되었거든.”

그래서 다른 방법도 고민해 보았다. 일단 식은 무사히 치른 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를 처단해 버려도 좋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그렇게 하면 본보기가 되지 못할 터였다. 이 일을 조용히 넘어간다면 또 누군가 그 같은 계략을 꾸며 캘던에 숨어들지도 모른다.

카르낙은 그 싹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그것이 아주 냉혹하고 비정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카르낙은 엘버그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디셋을 릴리의 앞에서 죽이나, 뒤에서 죽이나 어차피 죽는 것은 매한가지.

분명 파니릴리도 자신에게 반스의 편지를 들고 왔을 때 그것을 감수했을 거라 생각했다. 모든 반역의 말로가 그렇듯이 결국 그들의 말로가 죽음임을 그녀도 분명 알고 있었으리라.

“어렴풋이 그일 거라 짐작은 했었습니다. 다만 확신이 없어 말하지 않았을 뿐. 연단에 그의 피가 흐르자 확신했지요. 반스 이드위너에겐 디셋이 있고… 그리고 디셋에겐 아마… 아마도 에나가 있을 거라고요.”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릴리를 보며 카르낙은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이 봐. 그렇게 무른 여자가 아니라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여쭈어보아도 될는지요?”

릴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반스는 고이 리오로 돌려보낼 생각이야.”

“살려서요?”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 손으로 둘을 죽였으니 자비라는 것을 좀 보여 주려고.”

“반스는 차라리 캘던에서 죽길 바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공감했다. 리오 상인 길드의 길드장인 그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제와 손잡고 카르낙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마 반스는 광장에 묶여 죽을 때까지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렇게 수치스럽게 죽느니 차라리 캘던의 단두대에 오르는 것이 더 나으리라.

“그러니 자비지, 릴리. 리오의 자유민들에게 하사하는 나의 자비.”

리오의 자유민들은 카르낙과 척을 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도시의 자유를 보장해 준 유일한 왕이 아닌가. 그를 끌어내리고 다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들의 소모품이 되기는 곧 죽어도 싫을 것이다. 그러니 분명 반스를 아주 잔인하게 처단하리라. 그렇게 처단하여 다시 카르낙의 마음을 얻으려 할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다.

“폐하의 손에 굳이 피를 더 묻히지 않고 얻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얻으시겠군요. 정말 현명하십니다, 폐하.”

“칼이라고 불러.”

“…….”

칼?

“아내에게까지 딱딱한 호칭을 듣고 싶진 않아. 그러니 칼이라고 불러. 내가 널 릴리라 부르듯이.”

애칭임이 분명하다. 에이가는 한 번도 카르낙을 칼이라 부른 적이 없을 것이다. 로로는 어떨까. 카르낙이 왕좌에 오르기 전까지 그는 카르낙을 칼이라 불렀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지금도 종종 그는 카르낙을 칼이라고 부를까. 단둘이 있을 때가 되면 그럴까.

그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내가 그를 애칭으로 부르는 유일한 사람일까. 어쩐지 목이 타고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아 릴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입을 뗐다.

“…칼.”

릴리는 어색한 듯 그의 이름을 한 번 불러 보았다. 발음하기 편하고 내뱉기도 쉬웠다. 다만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 분명 언젠가 익숙해질 거다.

제 이름을 부르는 릴리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명확하고 다정했다.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불리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듣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그립고 아련한 기분이 되었다.

“칼, 언젠가 우리가 부부가 된 첫날 밤이 되면 제가 당신에게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는지 저에게 묻겠다 하셨지요?”

사전 경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것이 그녀의 특기다. 준비할 틈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오니 매번 당황하는 것은 카르낙이었다. 그는 포도주를 들이켜다 사레가 들려 코로 뿜을 뻔했지만 참았다. 속으로 기침을 삼키느라 입가에 흐른 것은 손등으로 무심히 훔쳐 냈다.

“쭉 생각했습니다. 오늘이 되면 꼭 그 질문에 답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그것은 그러니까 일종의 방패 같은 것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할지 자신도 모르겠으니 네가 선을 그어 달란 말이었다. 부디 나약하고 어리석은 짐승인 저에게서 먼저 물러나 달란 한심한 청원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대답을 듣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를 좀 헤아려 달란 것이었다. 본디 너는 나보다 늘 영특했으니까.

“그렇게 서둘러 대답할 필요는 없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게다가 아직 묻지도 않았잖아. 그러니 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이제 와 그것을 들먹이며 답해 주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기에 방은 너무 좁았고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카르낙은 분위기를 바꾸어 볼 요량으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은 밤인 듯 난롯가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마치 전우처럼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까, 하여.

릴리는 손에 들린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저는 가능하면….”

그러고는 약간 뜸을 들였다. 그쪽은 찰나겠지만 이쪽은 억겁의 시간이다. 카르낙은 서둘러 제 빈 잔을 채워 한 번 더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가능하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드리고 싶습니다.”

푸우웁, 하고 카르낙은 결국 사레가 들려 마시던 것을 뿜었다. 당혹스러움에 얼굴에 피가 몰리는데 릴리는 얌전히 눈꺼풀만 내린 채 제 앞에서 제 남편이 말라 죽어 가건 폭탄을 맞아 터져 가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서 있었다.

파니릴리는 대부분 순종적이고 침착하나 어느 순간 뒤통수를 치듯 그를 도발한다. 얌전하고 정숙하다 생각할 만하면 대범한 소리를 지껄이고, 지나치게 조용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생각하면 어디선가 파안대소를 하고 있다. 대체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원래 여인들은 이런가. 이렇게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려운 것이 여자인가.

“아무것도 몰라 무턱대고 뱉는 말이라 생각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도 나름대로 이것저것 알아보았습니다. 본래 궁금한 것은 꼭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그래서 로리아나에게 물었지. 사내가 여인에게 기쁨을 준다면 반대로 여인이 사내에게 기쁨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로리아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세일린은 정말로 그런 짓을 하느냐며 연신 되묻곤 했지만 릴리는 무척 진지한 태도로 열중했다. 대체로 그려 볼 수가 없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지만 일단은 모든 것을 꼼꼼히 듣긴 하였다. 고맙게도 로리아나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비기들을 선뜻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자신의 장사 밑천일 텐데 말이다.

릴리는 실행에 옮기기에 앞서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용기를 내려면 술기운이 조금 더 필요했다. 잔을 싹 비운 뒤 릴리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내려놓고 카르낙의 앞에 섰다. 그는 몸을 조금 뒤로 물린 자세로 앉아 파니릴리를 올려다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릴리는 로리아나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우선, 남자의 가슴팍을 천천히 어루만지세요. 아주 부드럽게요.”

가슴팍을 부드럽게.

“중요한 건 시선이에요. 사내들은 여자가 자신을 지배한다는 느낌을 싫어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줘야 해요.”

봉사하는 느낌. 봉사하는 느낌을 주려면 일단 그보다 아래에서 시선을 맞춰야겠지. 릴리는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붉은 카펫 위에 하얀 수련이 내려앉은 듯한 모양새였다. 카르낙은 릴리가 뭘 하려는 것인지 몰라 연거푸 눈만 깜빡였다. 릴리는 먼저 자신의 왕관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카르낙이 그녀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제가 폐하의 왕관을 벗겨도 될는지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대범한 모양새가 궁금하여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분명 술기운이 돌아 허락했노라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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