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에나는 카르낙을 제거하려 하는 거다. 만나자는 서신을 보낸 이후일까, 아니면 그 전일까. 카르낙을 에인힐즈로 부른 이유가 이것일까, 아니면 카르낙이 결국 에인힐즈를 뒤로하고 돌아왔기에 그를 죽이려고 작정한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카르낙을 향해 칼을 빼 들었다. 이젠 전면전이다. 돌이킬 수가 없다. 이젠 모두가, 모두가 적이다.
엄숙하고 성스러운 예배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몇몇은 디셋의 핏물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며 기절했고 몇몇은 기절 직전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모든 문은 근위대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카르낙은 제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고 검을 휘둘러 디셋의 머리를 그의 몸에서 잘라 내었다. 그러느라 다시 얼굴에 핏물이 튀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하객들을 향해 소리쳤다.
“잘 들어! 엘버그의 아둔한 돼지들아! 누구든 내게 반역을 꿈꾸는 자는!”
그러고는 디셋의 머리를 들어 보였다. 사람들이 다시금 비명과 신음을 토했다.
“이 꼴이 될 것이다. 그가 자유민이건! 농노이건! 공작이건! 충신이건! 아니면 신의 대리자이건! 상관없이 모두가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릴리는 피에 절은 카르낙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육신과 면부에 살의가 들끓었다. 릴리는 카르낙의 광기 어린 모습에 넋을 잃었다. 카르낙은 힘주어 덧붙였다.
“설령 그것이 아마네스 그 자신이라 하여도 내 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가씨!”
에이가가 비명을 지르며 다가와 릴리의 상체를 감쌌다. 가엾은 에이가는 영문도 모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네.”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대체 이게 어떻게….”
가엾은 에이가.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어쩌면 결혼식이 피에 젖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사제가 당신을 배반하리라는 말도요.
어쩌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어쩌면 모든 것이 아주 손쉽게 끝나 평안하고 순조로운 결혼식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 약간의 희망에 에이가를 걸었다. 모든 것이 잘되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지면 에이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그녀를 위해 좋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그러나 틀렸다. 결혼식에서는 피비린내가 났고 왕의 암살을 돕던 디셋은 죽었고 그것을 사주한 반스는 붙잡혔다. 아마도 그것을 기획했을 에나 역시 같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고통과 죽음.
눈앞에 번쩍하는 섬광이 지나가더니 갑작스레 쾅! 하는 굉음이 났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드득, 하고 무언가가 예배당의 창문을 때렸다. 깨진 장미창 안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릴리의 손등을 때렸다.
디셋의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축축한 풀 내음이 섞였다. 릴리는 제 손등의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예요. 에이가.”
“…예?”
비다. 비가 내리고 있다. 번개가 지나가니 천둥이 치고 그다음엔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릴리는 피에 젖은 드레스를 손으로 치켜들고 연단 아래로 뛰쳐 내려갔다.
“문을 열어! 문을 열어요! 어서!”
릴리가 다급하게 명령하자 근위병들이 왕비의 명령에 따라 예배당의 문 한쪽을 열었다. 그녀는 품위도 잊고, 무거운 드레스 자락이나 그 아래 드러나는 하얀 피부 따위도 잊고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도 잊고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 마침내 안뜰에 다다랐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며 사정없이 비를 뿌려 댔다. 디셋의 핏물 위로 빗물이 배어들어 검붉은 핏물이 점점 다홍빛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비야. 비다. 드디어. 드디어 비가 내리고 있다. 그 기쁨이 모든 고뇌를 앗아 갔다. 엘버그의 땅에 드디어 비가 내리고 있다. 릴리는 제 발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을 마음껏 만끽했다. 제 얼굴을 두드리고 제 입 안으로 들어가는 차가운 액체를 기꺼이 받아먹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생명을 얻을 것이다. 꽃도, 나무도, 풀도, 짐승도, 가축도, 사람도.
카르낙은 잠시 후 안뜰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 나왔던 사람들도 안뜰에 들이치는 빗물에 공포를 잊었다. 그 아래 접시꽃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릴리의 모습을 그저 황홀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릴리.”
어느새 카르낙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릴리는 천진하게 안뜰을 누비다가 그를 보며 외쳤다.
“비가 와요, 폐하! 드디어 비가!”
“알아.”
빗물이 그의 몸도 적셨다. 검은 머리가 축축하게 달라붙었고 구릿빛 피부 위에 방울져 흘러내렸다. 간지럽게 두드리고 뜨거운 몸을 차갑게 식혔다.
“이걸 두고 갔어.”
카르낙은 예배당에서 가져온 왕관을 들어 릴리의 머리 위에 씌웠다. 원래대로라면 디셋의 집전이 끝난 후 자신이 릴리의 머리에 씌워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셋은 집전을 끝낸 후 제 손에 죽었고 연단은 피에 젖었고 이곳은 예배당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하늘 아래, 쏟아지는 빗물 아래에서 그녀의 머리에 씌워 주는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이것이야말로 발투만다웠다. 투로다웠으며 그가 원하는 세상에 더 어울렸다.
카르낙은 왕관을 씌우고, 그녀의 얼굴에 붙어 있는 젖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부드럽게 떼어 낸 뒤 기쁨으로 물든 뺨을 감쌌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해, 릴리.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릴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 가는 와중에도 연인의 입술만은 뜨거웠다. 카르낙은 혹여 릴리가 오한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제 망토를 들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그 안에 갇혔다.
“신의 축복이야.”
누군가 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모두가 확신할 수 있었다.
신이 택한 자가 누구인지를.
화려하고 시끄러운 연회장의 뒤편, 아치형 기둥 뒤에 숨어 에이가는 로로를 책망했다.
"어째서 미리 언질을 주지 않으셨나요?"
로로는 낡은 블리오 천을 매만지며 겸연쩍게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에이가. 왕비님의 뜻이 너무 굳건하셔서….”
에이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배당의 단상이 피로 젖어 기겁을 한 저와는 달리 릴리는 유독 침착했더랬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이라도 성스러운 혼인의 날, 사제의 머리가 달아나면 동요하기 마련이거늘 릴리는 그 흔한 비명 한 번 지르지를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모든 것을 알고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행여나 독실한 에이가의 신앙에 상처를 줄까 염려되어 그랬습니다.”
“저의 독실한 신앙이 방해가 될까 그런 게 아니고요?”
“그럴 리가 있나요. 폐하에 대한 에이가의 충정이야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지요.”
아니. 아니야. 카르낙에 대한 충정은 보기 좋은 껍데기였다. 도구였을 뿐이다. 파니릴리가 일깨워 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그를 도구로 쓰고 있었을 거다.
“디셋의 반역은… 확실한가요?”
에이가가 물었다. 로로는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예. 지난밤 그가 폐하의 침실에 들어와 약을 탄 술을 건넸지요. 다행히 폐하께서는 삼키는 시늉만 하시고 모두 뱉어 내셨답니다. 리쿠스에게 물어보니 사지를 마비시키고 정신을 잃게 하는 약이라더군요. 그러니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어떻게 신을 모시는 사제가 되어 그런 비열한 술수를….”
에이가는 믿기지 않아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디셋 혼자 꾸몄을 리가 없어요. 상인인 반스 이드위너야 대가로 작위를 하사받는다 치더라도 디셋 같은 자는 마땅한 명분 없이 움직이는 자가 아니지요.”
더구나 사제다. 아무리 자유 도시의 사제라지만 그의 뿌리는 아마네스 여신의 모성과 헌신. 어떤 이유로도 이런 반역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다만 단 하나, 에나의 지시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에나로군요.”
“…….”
사정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짐작 가능하다. 에나의 배반은 이미 여러 번 예고되었다. 이것이 그의 수라면 그는 테이먼 테르조도, 카르낙 발투만도 아닌, 본인을 택한 것이다. 엘버그의 주인으로 말이다.
“도저히,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네요.”
에이가는 분을 못 이겨 눈물까지 흘렸다.
“어떻게 에나가 감히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나요? 신의 뜻을 따라 사랑과 자비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자가 어떻게 감히 왕을 제거하고 어떻게 감히 알기어스의 핏줄을….”
“폐하를 제거하고 왕비님을 국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던 겁니다. 에나로서는 명분도 얻고 실리도 얻을 수 있는 아주 현명한 방법이죠.”
“감히 어떻게 파니릴리 아가씨를 꼭두각시로 부릴 생각을 해요! 대체 파니릴리 아가씨를 뭘로 보고!”
로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패착이지요. 왕비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것이요.”
에나는 아마도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아둔하리라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아비가 그렇듯, 그 핏줄도 당연히 그러리라 단정 지은 것이 그 계획의 가장 큰 실수요, 유일한 잘못이었다.
만일 그가 파니릴리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제대로 조사했다면 그녀가 자신의 아비와는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거다. 파니릴리 알기어스는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비상하다. 남들이 나무를 볼 때 그녀는 숲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
비록 알기어스의 피를 타고 태어났으나 그녀가 자라 온 환경은 그동안의 알기어스와 완전히 달랐다.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아마 그것들에 있으리라. 그녀가 살아오며 보고 듣고 겪어 온 것, 고귀한 혈통에 현명한 자들을 스승으로 두어 많은 것을 배웠으니 에나가 기획한 그런 얕은수가 통할 리가 없다.
에이가는 로레인을 떠올렸다. 막 낳은 핏덩이를 올라의 품에 안겨 주며 로레인은 이런 미래를 꿈꾸었던 걸까. 어쩌면 그녀는 이런 일을 내다보고 그 고귀한 생명을 이방인에게 맡긴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분명 그것은 모정이겠지요. 로레인, 당신의 딸이 엘버그의 억압에서 벗어나 강하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자라길 염원하던 사랑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모하던 주인이 사라진 땅에서 여전히 에이가는 그녀의 뜻과 온기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니 어찌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살아서 미래를 지켜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함께 쌓아 온 과거가 거름이 되어 비로소 피어날 꽃과 열매를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당장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두려움을 감추고 인내로 걸어야 하는 고행길이다.
“이제… 전쟁인가요?”
에나의 배신이 발각되었다.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균형과 견제가 완전히 깨졌으니 남은 것은 전면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