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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60화 (60/231)

60화

꽤 늦은 밤이었다. 그날은 식을 올리기 이틀 전이었으며 루안에서 온 전령을 읽은 날이었고 카르낙은 밤늦게까지 홀로 집무실에 앉아 씁쓸히 술잔을 기울이던 날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 둔 릴리의 공예품을 손끝으로 한 번 톡 치고는 막 비운 술잔 위에 다시 포도주를 채웠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손길이 사뭇 연약하고 머뭇거리는 듯 하여 카르낙은 필시 그것이 누구든 안 좋은 소식을 가져온 이의 것이리라 예감했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조심스레 열린 문밖에서 늘씬한 실루엣이 방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카르낙은 그것을 보고 놀라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저의 약혼녀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릴리.”

릴리는 집게손가락을 세우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비밀스러운 제스처에 그는 행동을 멈추었다. 릴리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을 아무도 몰라야 합니다.”

“…….”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였으나 일단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의 행동과 말투는 은밀하며 신중했다. 카르낙은 그러한 분위기를 읽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릴리도 그것을 알기에 세일린을 따돌리고 그를 찾아왔다.

“세일린은 술심부름을 보냈어요.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이야기하겠습니다.”

카르낙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릴리는 품에서 반지를 꺼내 건넸다. 카르낙은 넘긴 것을 받아 들어 촛불에 비추어 보았다. 인장을 알아본 눈매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릴리는 뜸들이지 않고 이야기했다.

“하객들 중 반역자가 있어요.”

“…….”

“그가 저에게 그 반지를 건넸죠.”

반역자라. 카르낙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물었다.

“테이먼 테르조의 군견인가?”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는 폐하의 봉신도 아니고 테이먼 테르조의 사람도 아니에요. 그는 그저 탐욕에 눈이 먼 장사꾼일 뿐이죠.”

“…반스 이드위너.”

카르낙은 릴리가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쉽게 맞혔다. 탐욕에 눈이 먼 장사꾼이라면 누구든 리오에서 온 반스를 가장 먼저 떠올리리라.

“확실해?”

릴리는 저가 받은 편지도 그에게 건넸다. 카르낙은 그것을 재빠르게 훑었다.

“정원에서 만났어요. 얼굴은 보여 주지 않았지만 손등엔 다갈색 털이 있었고 아주 두툼했죠. 그리고 바다와 사향 냄새가 났어요.”

리오는 항구 도시였고 반스는 다갈색 머리털을 가진 자였다. 게다가 매우 부유한 상인인 그는 언제나 고급 사향을 몸에 뿌렸다. 냄새에 민감한 릴리가 그것을 놓쳤을 리 없다. 그녀의 후각이 맞다면 분명 그자는 반스 이드위너일 수밖에 없다. 반스, 네놈의 간땡이가 이렇게 클 줄이야. 카르낙은 편지를 다시 릴리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자만의 탈주인지, 아니면 리오의 상인들 모두의 탈주인지 확인해 봐야 해.”

“반스 이드위너뿐이에요.”

릴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명예예요.”

“…….”

“저의 충신이 되고 싶다더군요. 그는 탐욕을 겸손으로 위장하는 것에 능숙했어요. 그러나 숨기는 것엔 서툴고요. 그는 제 옆에 서 있고 싶어 했어요. 그 말은 적어도 백작, 어쩌면 공작 지위를 원하고 있다는 소리죠. 그런 그가 리오의 상인들과 함께 그 작위를 나누려 할까요? 저 혼자 갖기에도 어려운 것을요?”

그는 충신이 되고 싶다고 했다. 피를 토하듯 알기어스의 핏줄을 다시 세워 왕국을 재건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카르낙에 의해 살해당한 제 아비의 시체는 방치했다. 그토록 사모하던 왕의 손에서 인장을 빼 올 수는 있었을지언정, 그를 사모하던 충신으로서 주군의 시체를 돌볼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애정으로 볼 수 있는가. 그저 어리석은 아이를 꾀어내려는 간사한 사탕발림일 뿐이다.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을 아둔한 어린아이로 본 것이다.

카르낙은 헛웃음을 켜며 제 어금니를 씹었다. 그의 손에 편지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불쌍해서 구해 준 개새끼한테 손을 물린 격이군.”

“그리고 제가 폐하와 반목하려 한다고 믿고 있죠.”

그 말에 카르낙은 릴리를 바라보았다. 촛불이 아른거리는 얼굴은 청정하고 반듯하여 무해하였다. 릴리의 회색 눈동자 안에 불꽃이 보였다. 이럴 때면 저 얌전하고 여린 여인의 안에 어떤 상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차갑고 온유한 달의 아이로 태어난 너에게 어째서 종종 이토록 뜨거운 불길을 발견하게 되는 걸까.

“어때? 너는 나를 밟고 왕좌를 되찾고 싶은가?”

그는 물었다. 깨끗하여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매는 날카롭고도 공격적이었다. 그 아래에는 확신할 수 없는 고통과 비정하여 불안한 연약함을 숨긴 채였다.

“아니요, 폐하.”

릴리가 답했다.

“그것을 원했다면 찾아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내가 확언을 원한다는 것을 너 역시 알지.”

“…….”

“대답해, 릴리. 너는 정당한 너의 자리를 찾고 싶은가?”

“…저의 정당한 자리는 폐하의 옆입니다. 왕의 자리가 아니라요.”

카르낙이 길게 한숨을 토했다. 어쩐지 다리에 힘이 빠져 그는 책상을 집고 몸을 기댔다. 웃기는 일이지. 당장 제 손을 문 개새끼보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릴리의 마음을 원한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다.

그가 이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은 저를 향한 그녀의 충심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 되었어.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그동안 했던 대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카르낙은 반쯤 채운 잔을 가득 채워 릴리에게 건넸다.

“이제 되었다. 나머진 나에게 맡기고 넌 모두 잊어.”

“반스에겐 패거리가 있어요.”

릴리가 서둘러 덧붙였다.

“편지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혼자 이 일을 꾸미지 않았어요. 멍청한 척하며 더 이야길 꺼내 보려 했지만 경계심이 많더군요. 하지만 분명 성안에는 그의….”

카르낙이 그녀의 손을 끌어 잔을 쥐여 주는 바람에 릴리의 말이 끊겼다.

“그쯤은 나도 알아. 반스에겐 엄청난 돈이 있지. 그것으로 용병이나 암살자를 사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쉬울 거야. 그가 내게 주는 선물은 많은 제물이 아니라 그 많은 제물을 싣고 온 용병들이겠지. 모두 아주 건장하고 날렵해 보이는 청년들이더군.”

“그는 내게 결혼식이 아니라 대관식이 될 거라 했어요. 그러니 일이 벌어진다면 하룻밤 새가 될 거예요.”

“명심해 둘게.”

카르낙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그녀의 입가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 이제 그만 미간 좀 풀어.”

아, 하고 릴리는 제 미간을 매만졌다. 걱정으로 저도 모르게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릴리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그가 건넨 술을 한 모금 꿀꺽 들이켰다. 미쳐 다 삼키지 못한 붉은 액체가 입가에 흘렀다. 릴리는 손등으로 그것을 문질러 닦고 다시 걱정스레 말했다.

“조심하세요, 폐하. 모든 것에요.”

카르낙은 엄지손가락으로 릴리의 입가에서 미처 다 닦아 내지 못한 포도주 자국을 부드럽게 쓸어 내며 말했다.

“난 투로야, 릴리. 어떤 지옥 불에서도 살아남지. 게다가 네 덕에 그들의 계획도 알아챘으니 그들은 내 털끝도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러고는 인장 반지를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은 네 거야.”

“이젠 필요 없는 반지예요.”

“하지만 네 부친의 유품이지. 너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

“그리고 내 신뢰에 대한 증거이기도 해.”

카르낙은 잔을 빼앗고 빈손에 반지를 억지로 들려 주었다.

“난 이제 너를 믿는다. 릴리, 더는 너를 시험하거나 흔들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것은 네가 갖고 있어. 언젠가 너를 위해 쓸 날이 있을 거야. 아니면 나를 위해서거나.”

“…….”

“고마워, 파니릴리. 너는 내게 과분한 신부다. 언젠가 네게 진 빚은 반드시 갚으마.”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릴리는 처음으로 그의 진심을 보았다. 그 진심 안에 그토록 원하던 그의 신뢰와 믿음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기뻐 릴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잔뜩 상기된 웃음에는 진실한 기쁨이 묻어 있었다.

“남은 날들을 즐겨. 우리가 결혼을 하는 날이 되면 모든 것이 뒤바뀔 테니까.”

카르낙은 그렇게 힘주어 말했다. 그전까지 저변에 깔려 있는 불안은 무시하고 평온을 즐겨, 릴리. 그 이후로는 다시 피의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반스 이드위너의 행적을 좇고 성안의 모든 눈과 귀가 그를 향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하여 반스 이드위너의 속내를 간파하고 그에 걸맞는 처벌을 내리리라.

***

릴리가 다녀간 그날 밤부터 카르낙은 반스 이드위너의 행적을 추적했다. 반스뿐 아니라 파울러와 그 패거리들을 감시하는 수많은 눈들이 로로를 통하여 저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카르낙에게 알렸다. 욕심과 열망은 강하나 그만큼 현명하지 못한 자는 결국 그에 걸맞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 전야, 파울러는 자신이 고용한 암살자에 의해 왕의 침대에서 왕 대신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암살자는 카르낙에게 죽음을 간청할 만큼 잔인하게 고문당하다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디셋. 캐슬란의 암살을 돕기 위해 놈이 습격하기 바로 직전 신의 이름과 축복을 들먹이며 약을 탄 술잔을 건넨 그는 신전에서 카르낙에 의해 숨이 멎어 가고 있었다. 캘던에 머물며 왕의 고문관이 되지 않겠냐는 제의를 거절한 것은 이타심이나 선의가 아니었음을 진작 깨달은 자로 인하여 말이다.

“마지막 유언은 없는가?”

카르낙의 말에 디셋이 입을 뻐끔거렸다.

“없다니 아쉽군.”

카르낙은 디셋의 배에서 칼을 뽑아냈다. 디셋은 울컥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릴리는 제 발치에 묻은 디셋의 핏물과 고통 속에 하얗게 질려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언뜻 생각하기도 했다.

반스가 인장 반지를 건네며 사제를 들먹일 때, 혹시나 디셋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확신이 없었다. 확신이 없어서 카르낙에게 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신의 대리인.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 왕의 자비를 간청하는 이타심 많은 종교인이었다. 반스 같은 물욕이나 명예욕 같은 건 없는 이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왜. 대체 왜.

“에나….”

릴리가 중얼거렸다. 그다. 그가 배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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