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지. 혼자 가기엔 심심해서.”
카르낙은 그녀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깨끗하게 손질된 새하얀 손이 카르낙의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포개어 잡고 제 팔짱을 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제는 그녀가 덥썩 저의 손을 잡는다고 당황하는 대신 마치 올바른 곳에 알맞은 것을 둔 듯 익숙해질 것이다. 때론 지팡이가 때론 등받이가 때론 팔걸이가 되는 것이다.
릴리는 한 손으로는 제 치맛자락을 붙잡고 카르낙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감격한 에이가와 세일린 그리고 무장한 근위병이 따랐다. 둘은 예배당으로 향하는 내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따르는 이들에게조차 들리지 않는 둘만의 소곤거림. 에이가는 그것을 보다가 황급히 세일린의 손을 붙잡았다.
“에이가 님.”
세일린은 행여 에이가가 어지럼증이라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어 퍼뜩 그녀의 팔을 붙잡고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에이가의 안색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눈가는 촉촉했고 바르르 떨리는 입술은 손수건으로 누른 채였다.
세일린은 에이가의 시선을 따라 정답게 걸어가는 왕과 그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에이가에게는 평생의 소원 같은 장면이리라. 감히 이루어질지 확신할 수 없으나 평생을 걸쳐 간절히 바라 왔던 염원.
세일린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든든하게 지탱했다. 에이가만큼 저의 가슴도 어쩐지 뭉클해졌다.
마침내, 열두 번의 종소리가 끝났다. 디셋은 연단에 서서 커다란 예배당의 아치형 입구를 바라보며 모아 잡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빛을 등져 흐릿하던 실루엣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장엄한 오르간 연주가 시작되었다. 빛을 등진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라 둘. 카르낙 발투만의 실루엣을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반스 이드위너였다. 어디 하나 흠집조차 나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 카르낙의 등장에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렸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모두가 두 사람의 모습에 탄성을 내지를 때 이드위너는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를 디셋은 여러 번 곁눈질했다. 반스의 불안함은 어느새 디셋에게도 옮겨붙고 말았다.
“정말이야. 정말 은빛 머리카락이야!”
반스의 곁에 선 누군가가 호들갑스럽게 속삭였다.
“알기어스의 핏줄임에 틀림없어. 세상에 저 새하얀 눈 같은 모습을 좀 봐.”
탄성을 내지르는 여인에게 곁에 선 이가 일갈했다.
“그래 보았자 몰락한 왕조 아니겠어? 우리가 잘 봐 두어야 할 사람은 그 옆에 선 남자라고. 카르낙 발투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꾸며 놓으니 제법 왕 같잖아?”
투덜대며 부채질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은 집요하게 카르낙을 좇았다. 제법 왕 같은 정도가 아니라 누구보다 강건해 보이는 왕이었다. 시선은 어느새 카르낙의 목선을 핥고 있었다. 부채를 든 손이 더 소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가야 해. 도망가야 한다. 반스의 머릿속에는 이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카르낙이 멀쩡히 살아 두 다리로 예배당에 걸어 들어온다는 것은 곧 파울러가 고용한 암살자가 실패했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파울러조차 행방불명이다.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가 없다. 저의 계획이 모두 들통났다는 결론만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정확한 답이었다. 반스는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헤집었다. 일단 이 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 이후에 살 길을 도모하리라.
“어디 가십니까, 이드위너?”
한껏 몸을 움츠리고 군중 속에서 빠져나왔지만 다시 벽이 세워졌다. 판금으로 무장한 카르낙의 근위병들이 그가 빠져나가려는 길목을 막았다.
“나… 난….”
이드위너가 입을 뻐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디셋의 시야에 자꾸만 그 모습이 들어왔다. 무장을 한 군인들에 둘러싸여 새파랗게 질린 반스 이드위너는 다른 군중들에게는 보이지 않을지언정 연단에 서 있는 그에게는 매우 잘 보였다.
그것이 신경 쓰여 이제 와 식을 중단할 수 없다. 이미 카르낙과 릴리는 제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반스 이드위너가 경비병에게 붙잡혔다. 근위대는 반스의 양팔을 붙잡아 달아나지 못하도록 했다. 가지 않고 버티려는 반스의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그는 내내 머리를 흔들며 무어라 소리를 질렀지만 오르간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았다. 카르낙과 릴리가 연단에 올랐다. 맞잡은 두 손은 굳건해 보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은 침착하고도 정확했다. 디셋은 그들과 끌려가는 반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큰일이 난 것이 분명해. 큰일이 나고 만 것이다.
마침내 웅장하던 오르간의 연주가 끝났다. 카르낙과 릴리가 신의 대리인 앞에 무릎을 꿇자 모든 하객이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 이후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엄숙하고 비장한 침묵이었다.
“디셋.”
멍하니, 아주 멍하니 끌려가는 반스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던 사제의 이름을 카르낙이 불렀다. 디셋이 퍼뜩 놀라며 제 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아래 반듯하고 잘생긴 이마가 보이고, 눈썹 아래 깊게 파인 눈매에 보라색 불길이 일었다. 일순 사방의 모든 것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디셋은 몸을 휘청이지 않으려 애썼다.
“뭐 해? 식을 진행해야지.”
“…….”
디셋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반스가 붙들려 간 예배당의 쪽문을 몇 번이고 곁눈질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르낙이 릴리와 맞잡은 손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어서. 해.”
“…….”
디셋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지만 붉은 새틴으로 맞잡은 남녀의 손을 감는 손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카르낙의 눈길이 집요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럴수록 디셋의 숨결은 더욱 가빠졌다. 식을 진행하지 않으면 곧장 저를 죽일 것만 같은 낯빛.
“엘… 엘버그의 구원자이시며, 만물의 어머니이신 아마네스 님의… 이… 이름을 빌어 발투만의 아들 카, 카르낙과… 알기어스의 딸 파니릴리의 성스러운 혼인을 증… 증명하노니….”
디셋은 더듬더듬 예문을 읊었다. 하객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디셋의 기도문에 따라 그와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카르낙에게도 릴리에게도 마냥 낯설기만 한 장면이 이 두 사람을 위해 진행되는 것이다.
“여… 여기…이 강인한 사내와 온유한 여인을 묶은 운명의 실이 굳건하도록 하시고 그들의 자손들이 번성케 하소서.”
들러리들이 비단에 싸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고 왔다. 카르낙은 그것을 마주잡은 릴리의 손에, 릴리는 카르낙의 손에 끼웠다. 디셋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맞잡은 손 위에 저의 손을 얹었다. 노인의 다리가 전례 없이 후들거렸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신의 언약을 담은 두 개의 반지로 증명하도다. 이제 둘의 영혼은 하나요. 그 생명 또한 하나이니 신을 받드는 것과 같이 남편을 섬기고, 왕을 섬기는 것같이 그의 아내를 섬기리라. 이제 당신은 신의 아이요, 그의 자손이니… 엘버그의 모든 이들이 당신들이 당신의 신하요, 일꾼이며, 종이라. 영원하소서. 엘버그의 왕, 카르낙 발투만.”
그가 둘의 손을 묶은 끈을 풀며 선창하자 모두가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따라 외쳤다. 영원하소서. 엘버그의 왕, 카르낙 발투만.
“영원하소서…. 엘버그의 비, 파니릴리 발투만.”
영원하소서. 엘버그의 비, 파니릴리 발투만.
디셋은 아마네스에게 하듯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모두가 그를 따라 머리를 조아렸다. 카르낙과 릴리는 절차에 따라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원하소서.”
디셋이 둘을 향해 다시 한번 선창했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라했다. 카르낙은 예배당을 꽉 채운 군중들을 훑어보았다. 무장을 한 근위병 역시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허여멀건 머리를 조아리고 침묵하는 모습에 카르낙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하찮고 악한 아마네스의 자손들. 조악한 왕에게 머리를 숙일 때마다 구부린 허리 아래 주먹을 쥐고 있을 것이다. 입술에 피가 날 때까지 깨물고 치욕을 감내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카르낙은 그것에 흡족함을 느꼈다. 비겁하고 어리석은 이들에게 걸맞는 훌륭한 결혼식이 될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포함해서.
“일어서라, 디셋.”
카르낙의 말에 디셋이 몸을 일으켰다. 카르낙은 릴리의 손을 놓고 제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그것이 디셋의 옆구리를 찌른 것은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억!”
비명과 함께 디셋의 몸이 위로 펄쩍 튀어 올랐다가 이내 아래로 무너졌다. 쇠꼬챙이처럼 날카로운 검에 뚫린 채 무너져가는 디셋을 받치는 카르낙의 손을 타고 그의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왕이 속삭였다.
“가서 네놈의 신에게 전해라, 디셋. 네년의 종은 투로보다도 더 사악하고 비열하며 뱀보다 더 간교하다고 말이야.”
디셋은 창백하게 질려 갔고 군중들은 비명을 질렀다. 신의 성전에서 그의 대리자가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신의 자식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지아비에게. 릴리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제 발치을 바라보았다. 디셋의 피로 치맛단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