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검은색 코이프 모자를 머리에 쓴 그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또한 손과 발이 모두 단단한 밧줄로 묶인 채였다.
“어… 어떻게….”
이제 사내는 완연히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밤의 어둠보다 더 짙은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악귀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자. 커다란 검을 마치 깃털처럼 한 손에 든 채 얇은 슈미즈만을 걸친 그는 본디 죽였어야 하는 사냥감, 카르낙 발투만이었다.
캐슬란은 몇 번이고 입만 뻥긋거렸다. 안 그래도 짧은 엘버그어가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파울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카르낙 발투만에게 애초에 모든 계획을 들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카르낙을 죽이려고 결정한 것은 바로 오늘 오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자신도 그 계획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카르낙 발투만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고 미리 파울러를 재물로 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단 말인가.
“걱정 마라. 급습은 실패했지만 아직 네놈이 날 죽일 기회는 남았으니까 말이야.”
카르낙이 검을 들고 이죽거렸다. 상대는 검을 든 무장. 그것도 견고한 캘던성을 함락시킨 맹장이다. 그러나 그는 얇은 슈미즈 차림이다. 자신이 가진 것은 작은 단도 하나지만 독이 묻어 있으니 칼끝만 스쳐도 치명상이었다.
그러니 카르낙의 말처럼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캐슬러는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원래 받아야 할 값의 절반은 고객의 죽음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이제는 제 생명을 부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살아서 나가야 했다. 남은 돈이라도 펑펑 쓰려면 말이다. 캐슬러는 단도를 손에 쥔 채 쏜살같이 카르낙에게 달려들었다.
***
특별한 아침이었다. 디셋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경건한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곧 부제가 맑은 세숫물을 가져왔다.
“바람이 부는구나.”
디셋이 창밖을 보며 부제에게 말을 걸었다. 소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은 징조 같습니다.”
비록 날은 여전히 후덥지근하지만 바람이 불었다. 참 긴 시간 동안 바람 한 점 없는 더위가 지속되었는데 말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마네스 님이 이 특별한 날을 축복하시는 게 분명해.”
“예, 디셋 님. 분명 그런 것 같습니다.”
디셋은 흡족한 마음으로 몸을 씻고 금빛 수가 화려하게 놓여 있는 하얀 의관을 정제하였다.
같은 시간 릴리도 새벽부터 일어나 몸단장을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욕제를 넣은 미지근한 물에 담가 깨끗이 닦고 손톱과 발톱을 손질했으며, 새하얀 살결이 더욱 돋보이도록 얼굴과 상체에 꼼꼼히 분칠을 했다.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질하고 윤기를 더하기 위해 향유를 발랐다. 입술과 볼에는 구근과 염소 기름으로 만든 크림을 발라 장밋빛이 돌도록 했다.
슈미즈 위에 제단사가 공들여 만든 새하얀 새틴 드레스를 입었다. 가슴팍과 치마의 끝단, 그리고 길고 풍성하게 늘어진 소매에는 모두 은빛 진주와 실로 만든 화려하고 우아한 자수가 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허리에 은과 보석을 박아 만든 허리띠를 하고 여러 겹의 진주와 눈부신 다이아몬드로 세공된 목걸이를 목에 둘렀다.
보조 시녀 노라가 광택이 나는 나무 상자를 열어 보였다. 적색 비단에 싸인 하얀 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바스탠 님께서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 하셨어요.”
“세바스탠이요?”
얇은 가죽을 여러 번 덧대어 단단하게 만든 밑창에는 징 대신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발등과 발목을 휘감는 끈은 가죽이 아닌 보드랍고 두터운 실크로 제작되었다. 릴리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무두질에도 능한 사내인 줄은 몰랐다.
“언제 이것을….”
“제가 아가씨께서 그려 두신 도면을 가져다 드렸답니다.”
세일린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세바스탠 님이 그것을 보고 아가씨를 위해 열심히 만드셨어요.”
제가 그린 엉성한 그림을 보고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 과연 스코크가 아낄 만큼 다재다능한 사내였다. 노라가 조심스레 그것을 릴리의 발에 신기고 새틴을 그의 발목에서부터 종아리까지 돌돌 감아 매듭지었다. 새틴의 감촉이 보드랍고도 시원하여 릴리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 편해요. 무척 아름답고요. 스탠에게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어요.”
“아가씨, 이제 서두르셔야 합니다. 곧 종탑이 울릴 거예요.”
“네.”
릴리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샌들의 밑창을 딛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에이가가 다시 한번 릴리의 옷맵시를 손질해 주고는 그녀의 어깨와 머리 위에 얇은 시폰 망토를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감격에 겨운 듯 제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제 생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신부는 볼 수 없을 거예요.”
세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에이가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파니릴리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이었다. 그나마 붉은 볼과 입술이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릴리는 꼭 자신이 도자기로 만든 밀랍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창백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객들은 모두 예배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더운 날씨에 부채질을 해 가면서도 아름다운 신부를 볼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들뜨고 흥분되기는 디셋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재단 위에 경건하게 서서 예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흐뭇한 마음으로 하객들을 살펴보는데 리오에서 온 반스 이드위너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몸종 파울러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예식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예배당에 오지 않았단 말인가.
잠시 후 의복을 제대로 차려입지도 못한 반스가 헐레벌떡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디셋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반스는 숨을 헐떡이며 모자를 쓰고 더블릿 단추를 여미며 예배당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왔다.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디셋은 그에게 몸을 기울여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이런 중요한 날에 지각이라니, 늦잠이라도 잔 겐가?”
“…파울러가 어젯밤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파울러가?”
“예.”
몸종이 깨우지 않아 늦잠을 잔 것인지, 아니면 저를 도와줄 이가 없어 의복을 정제할 시간이 없는 것인지. 심히 당황한 듯한 반스를 보고 있자니 꼭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디셋은 심신이 모두 불편하고 불안하였다.
댕, 댕, 하고 마침 탑의 종이 울렸다. 하던 이야기를 끝맺지 못한 채 반스는 하객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디셋도 다시 연단으로 올라가 자세를 바로 했다. 이미 식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곧 나타날 신랑과 신부를 위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짝 열린 예배당의 문 안으로 정오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카르낙은 성의 안뜰에서 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빛이 눈부셨고 다소 뜨거운 바람은 딱 머리카락이 간지러울 정도로만 넘실댔다. 그는 화려한 금빛 자수가 놓인 검은 색 튜닉 위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허리에 검을 찬 채였다.
결혼식장에 발가벗고 나타나겠다는 농담을 전날까지 했지만 무엇 하나 격식에 어긋나는 것 없는 차림새였다. 그도 릴리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목욕을 했으며 손톱과 발톱을 정리해 묵은 때를 벗겨 냈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빗질을 했다.
그 비단처럼 새까만 머리 위에는 휘황찬란한 왕관이 자리했다. 카르낙 발투만을 상징하는 블랙 다이아몬드가 큼지막이 박힌 왕관은 카르낙의 보라색 눈동자와 어우러져 압도적인 위압감을 드러냈다.
릴리는 에이가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다 마침내 완연하게 드러나자 회랑을 빙 둘러 그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감탄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루이스마저 무장을 한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새삼 저 골치 아픈 아가씨가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깨닫고 말았다.
제 신부를 바라보는 카르낙은 침착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릴리가 제게 다가오는 것을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미소가 어린 눈매와 입가에 상냥함이 스며있었다.
“릴리.”
카른낙이 속삭이듯 그녀의 이름을 읇조렸다. 그 음성이 너무 감미로워 구경을 하던 몇몇 여인들이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릴리는 그가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어째서 여기까지 나와 계시나요?”
원래대로라면 예배당의 앞에서 만나야 했다. 종이 울리면 카르낙이 문밖으로 나와 그녀를 예배당 안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본래의 식순이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 예배당의 근처에는 아직 가지도 않았다.
준비를 끝내자마자 이곳에서 릴리를 기다렸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릴리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몸단장을 한 그녀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였고 또 가능한 한 빨리 그녀와 나란히 걷고 싶었다.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 애정이었다. 처음 이 뜰을 지나 예배당에서 그녀를 만났을 땐 분명 예견하지 못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계집, 적당히 허울만 갖춘 장식품으로 쓰려 했다.
설마 자신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언제라도 같이 있고 싶다고, 누구보다 그녀의 조언을 간절히 듣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둠으로 가득한 저의 세계에 릴리는 한 줄기 빛인지도 몰랐다.
이 작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의지하며 카르낙은 무엇이든 두려움 없이 내디디고 싶었다. 함께, 무엇이든 함께하자고. 지난밤 카르낙은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며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