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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57화 (57/231)

57화

“그렇게 튼튼하다면 차라리 검이나 방패를 만들 것이지. 쓸데없는 잔 따위를 만들다니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멍청하군.”

카르낙이 심드렁한 태도로 투덜거렸으나 디셋은 종교인답게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잔 안에 적빛 포도주를 담았다.

“그것에는 종교적인 이유가 있답니다, 폐하. 검이나 방패는 무엇을 담기에는 적절치 않지요. 그러나 잔은 무엇이든 담아내는 그릇이지 않겠습니까? 마치 그것은 아이를 품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배 속과 같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아마네스 여신님을 상징하기 적당한 물건이 어디 있을까요?”

디셋은 깨끗한 비단으로 잔을 감싸고 제 이마 위로 들어 올리며 의식을 행했다. 여신을 위한 찬양문을 읇더니 잔을 경건하게 실크로 문지른 다음 그것을 카르낙에게 건넸다.

“아마네스 님을 대신하여 이 잔에 카르낙 발투만을 향한 축복을 담습니다. 그대의 가문은 쇠처럼 강하고 그대의 아내는 물처럼 유연하며 그대의 자손은 땅 위에 흩어지는 눈처럼 번성할지니, 누구든 나의 생명이 든 이 잔을 들라. 하면 내가 축복하는 것과 같이 나의 자손이 너를 축복하리라.”

“…….”

카르낙은 잔을 받는 대신 시를 읊는 디셋을 의아한 눈으로 빤히 바라만 보았다. 아마도 신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투로는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리라 짐작하며 그는 한 번 더 잔을 건넸다.

“이 포도주를 들이켜십시오, 폐하. 아마네스 님의 축복이 폐하의 앞날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신의 사도인 제가 폐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자 존경의 표시랍니다.”

“정말 내게 이 잔을 주는 건가? 엘버그에서 가장 고귀한 성물을?”

“물론입니다, 폐하. 이것이야말로 엘버그의 왕에게 가장 합당한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폐하께서 가지셔야 한답니다.”

카르낙은 그에게서 잔을 받았다. 상아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잔에 담긴 포도주의 붉은빛이 선명하였다.

“이것은 엘버그 혼례의 전통인가? 전날 밤 예비 신랑에게 축복을 건네는 것?”

디셋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것은 본디 엘버그 국왕의 대관식에 행해지던 전통입니다. 폐하께서 왕좌에 올라 관을 쓰시기 전에 사제에게 이 잔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폐하는 대관식 없이 왕좌에 오르셨으니 이제라도 마땅히 드려야 할 축복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리오에 보급품을 보내기 때문인가?”

“예?”

카르낙은 포도주를 빙빙 돌리며 다시 물었다.

“내가 너의 고향에 자비를 보였기 때문에 주는 것이냔 말이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제가 폐하께 이 잔을 드리는 것은 제가 폐하의 자비를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폐하께서도 연민과 자비가 있음을 기꺼이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이지요. 폐하께서는 그로써 엘버그의 왕이 되실 자격을 갖추셨습니다. 폐하께서는 그것을 리오를 도우며 입증하셨답니다. 그렇기에 드리는 것입니다.”

“차용증을 썼는데도? 그 모든 보급품에 이자를 쳐서 돌려받겠다 해도 말이냐?”

“폐하.”

디셋은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비록 사제이오나 저 역시 여러 역사와 학서를 읽은 지식인이랍니다. 군주의 덕목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진 왕과 어리석은 머저리가 한 끝 차이라는 것도요. 대가 없이 자비를 베푸는 국왕이란 당장은 칭송받을지 몰라도 반드시 머지않아 자멸하겠지요.”

“내가 너에게 캘던성에 머물기를 권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

디셋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당황한 빛이 스쳤다. 캘던성에 머물며 왕의 고문이 되는 것은 성전의 애나가 되는 것 다음으로 영예로운 일. 신을 모시는 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영예롭기 이를 데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은 리오를 돌보기 위해 떠나기를 택하겠습니다. 아직 리오의 신전에는 고통받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 있으니까요.”

“그대야말로 자비롭다, 디셋.”

카르낙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삐딱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신의 축복이 너에게도 깃들기를.”

“감사합니다, 폐하.”

디셋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카르낙은 호기롭게 잔에 든 포도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디셋은 그가 잔을 깨끗이 비운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마네스 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평안한 밤 되십시오.”

“평안한 밤 되시오, 디셋 사제.”

카르낙 역시 온화한 음성으로 답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밤이었다. 디셋은 왕의 침실을 나서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부제를 바라보았다. 어린 부제도 그에게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밤이구나, 얘야.”

“예. 사제님.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도 잠자리에 들자꾸나.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길 고대하면서.”

“예, 사제님.

부제는 성실히 대답했다. 디셋은 그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캐슬란은 어둡고 좁은 성벽 사이에 숨어 왕의 창가에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횃불을 든 경비병들이 주기적으로 제 앞을 어슬렁거렸으나 은신이 어려울 정도로 정밀한 경비는 아니었다.

캐슬란은 눈 아래로 검은 천을 둘러 밤 그림자 안으로 제 얼굴까지 모두 감춘 뒤 숨을 죽였다. 그러며 다시 한번 왕을 죽이는 순서를 상기시켰다. 불이 꺼진 후 왕이 완전히 잠에 들 때까지 기다린다.

그 후 달이 구름에 가려지고 경비병들의 교대 시간이 되면 재빠르게 벽을 타고 왕의 발코니까지 올라간다. 그 이후 조용히 문을 열고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왕의 목에 단도를 꽂아 넣으면 되는 것이다.

이미 사저에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았으니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손쉽게 모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 성을 빠져나가면 반스가 준 갤랑을 환전하여 그라타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돌아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놀아야지. 지금껏 사람을 죽인 돈으로 그랬던 것처럼. 아니, 이번엔 훨씬 더 큰 건수이니 더 오랫동안 먹고 마시고 놀 수 있으리라.

마침내 방의 불이 꺼졌다. 캐슬란은 몸을 웅크리고 왕이 깊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 기다렸다. 적당한 때에 급습하는 것이 중요했다. 너무 오래 지체했다간 작은 소리에 깰 만큼 얕은 잠이 찾아오리라.

마침내 경비병이 교대하는 자정이 되었다. 구름이 달빛을 희미하게 가렸다. 캐슬란은 몸을 숙이고 발꿈치를 든 채 재빠르게 성벽 사이에서 빠져나와 도마뱀처럼 성채 돌벽에 붙었다. 그는 벽돌의 틈새와 틈새를 딛으며 능란하게 성채에 올랐다.

눈 깜짝할 새에 왕의 테라스에 도착한 그는 다시금 몸을 낮추었다. 횃불이 방금 그가 가로질러 온 성벽의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캐슬란은 품에 지니고 있던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확실한 처리를 위해 칼의 끝에 치명적인 독약도 발라 둔 터였다.

이제 왕의 숨을 앗아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캐슬란은 프로답게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아주 천천히 테라스의 문을 밀었다. 제 몸이 들어갈 정도로만 사이를 벌리고 조심스레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침내 침실에 당도한 이후에 그는 호흡마저 멈추었다. 가장 긴장되고, 또한 가장 흥분되며, 가장 짜릿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화려한 양탄자와 야수의 가죽이 그의 발소리를 가려 주었다. 캐슬란은 손에 꼭 맞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아주 조심스레 침대의 휘장을 젖혔다.

왕은 세상모른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모로 누워 이불에 파묻힌 그는 움직임조차 없었다. 계획대로였다. 그는 번개 같은 속도로 침대에 뛰어들어 왕의 몸을 짓누른 채 이불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옆얼굴에 칼을 꽂아 넣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그가 몸을 튕겼다. 캐슬란은 비명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 전에 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짓눌렀다.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육신은 몇 번이고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됐어. 죽였다. 드디어 죽였어. 캐슬란은 그제야 두건을 벗었다. 참아 왔던 숨을 간신히 몇 번 토해 내며 그 찰나의 희열을 만끽했다. 아직 단검에는 뜨거운 핏물이 흘렀다. 그는 그것을 보며 쾌감에 몸을 떨고는 아무렇게나 단검을 던져 버렸다.

살인의 증거겠지만 저 볼품없는 단검에서는 그 어떤 범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왕의 시체를 찾기도 전에 저는 반스의 도움으로 이미 캘던에서 멀리 달아나 있을 테니 말이다.

캐슬란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고 다시 두건을 썼다. 그러며 사지가 늘어진 고깃덩어리가 된 왕의 시체에게 작별을 고했다.

“잘 가시게. 엘버그의 왕이여.”

“어딜 가려고?”

그때였다. 난데없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캐슬란은 열어 둔 테라스로 빠져나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가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에 비친 것은 커다란 손이었다. 캐슬란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였다. 길고 가느다란 빛이 예리했다. 검. 분명 검이다. 함정인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침대에 누운 이는 대체….

캐슬란은 재빠르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손을 더듬어 제가 던져 버린 단검을 찾아 쥐고는 피로 물든 시트를 젖혔다.

“확인해 봐.”

“…….”

그가 말했다.

“어서.”

“…….”

독촉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캐슬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피에 절은 사람의 형체를 살폈다. 아무래도 어두워 잘 보이지가 않았다.

“아. 휘장 때문이군.”

목소리의 주인이 기다란 검을 뻗어 휘장을 완전하게 젖혀 주었다. 마침내 구름에서 벗어난 달빛이 테라스의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빛을 드리웠다. 그 빛은 검의 칼날에 반사되어 죽은이 의 안면을 드러냈다.

“…파, 파울러!”

침대 위에 사지를 늘어드리고 있는 자는 반스 이드위너의 몸종 파울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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