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제나저제나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세일린은 문이 열리자 마침내 안도하였다. 그녀는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하고는 파니릴리의 안색을 살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릴리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조금만 더 늦게 오셨다면 저는 아마 로로 님께 뛰어갔을 겁니다.”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릴리의 낯빛이 자못 복잡해 보였다. 그녀는 탁상 위에 촛대와 함께 인장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새까만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세일린은 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녀가 탁상 위에 내려놓은 물건을 살폈다. 좀 더 자세히 보려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숙였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폈다.
“아, 아가씨 이건!”
“…….”
릴리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세일린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기에 대꾸하지 않은 것이었다. 틀림없이 릴리가 들고 온 것은 알기어스 가문을 상징하는 인장 반지였다. 만일 알기어스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왕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을.
파니릴리가 만나고 온 누군가가 이것을 전해 주었음이 틀림없다. 신에게 피로 맹세를 했다더니 분명 알기어스 왕가를 받드는 자들임이 분명했다.
세일린은 정세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카르낙이 알기어스의 충실한 심복들을 모두 제거했다는 것은 안다. 카르낙의 손에 살아남은 이들은 성안의 힘없는 노역자들과 일찌감치 변절한 스코크 정도였다.
그런 서슬 퍼런 카르낙 발투만의 눈을 피해 목숨을 부지한 알기어스의 충신들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들이 다시 제 발로 캘던성안에 들어온 것은 더 놀라웠다.
“이것을 준 사람이 누군가요?”
세일린이 놀라움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릴리는 한참 만에 느리게 답했다.
“보지 못했어요.”
“보지 못하셨다고요?”
“네, 내내 등 뒤에 숨어 이야기를 하더군요.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했어요. 저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평이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친 듯한 어조였다. 까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세일린은 가슴이 쓰렸다.
“아가씨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굴더니 정작 제 주군에게 정체를 드러낼 용기는 없다니… 신뢰할 수 없는 이가 분명해요. 그자의 목적이 뭐라던가요? 정말로 성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계획이라던가요? 아가씨를 이곳에서 탈출시키겠다 하던가요?”
세일린이 그녀의 짐을 덜어 주고 싶어 질문했다. 함께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보면 혼자 앓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릴리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세일린은 기꺼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가씨, 심려치 마세요. 제가 아가씨의 곁에 있겠습니다. 아가씨를 돕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세일린”
릴리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지만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모두 물리진 못했다.
“내게 포도주를 조금만 가져다주겠어요?”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세일린은 자신이 힘을 내면 그것이 릴리에게 전달될 것처럼 그녀의 손을 잡은 제 두 손에 한 번 힘을 꾹 주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제가 어서 질 좋은 포도주를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고는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서둘러 침실을 나서며 방문을 닫았다. 릴리는 혼자 남아 탁자 위의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부친이 죽어서도 끼고 있던 것이다. 릴리는 그것을 들어 제 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검지에도, 중지에도, 심지어 엄지에도 맞지 않았다. 당신은 손이 무척 컸군요, 하고 릴리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다시 반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침잠된 눈동자가 깊은 밤의 어둠보다도 무거웠다.
“오늘 밤이야.”
반스는 열심히 양피지 위에 펜을 놀리며 자신의 충실한 부하 파울러에게 일렀다. 부스스하게 엉킨 다갈색 곱슬머리를 긁으며 파울러는 연신 불안해 보이는 모습을 했다.
“발투만의 병사들이 과연 얌전히 투항하려 할까요?”
파울러의 물음에 반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놈들은 본디 용병이었어, 파울러. 그들은 신념이 아니라 돈에 따라 움직이지. 그러니 리오의 군사들과 다를 바가 없어. 겔링을 산더미처럼 쌓아 건네주면, 돼지 새끼에게라도 충성을 맹세할걸. 게다가 발투만의 오른팔인 용병 대장 핀도 자리를 비웠으니 지금이야말로 투로 놈을 칠 적기지.”
핀이 없다면 근위대 놈들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우왕좌왕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성벽을 지키는 일에 익숙해져 전장을 누비던 때보다 굼뜨게 움직일 것도 자명했다.
반스는 일부러 리오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결혼 선물을 싣고 왔다. 그래야 짐꾼으로 위장시킨 군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성안에 들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을 틈타 투로 놈만 죽이면 돼. 그놈을 죽이면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따를 거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테니 말이야.”
엘버그 최초의 여왕, 파니릴리 알기어스. 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수식어인가. 그리고 그녀를 엘버그 최초의 여왕으로 옹립한 것은 바로 자신, 반스 이드위너가 될 것이다. 야만족 발투만 왕을 죽이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은 엘버그의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이름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영혼이 되어 대대손손 엘버그의 땅에 전해지리라. 리오의 상인 반스 이드위너가 아닌 엘버그의 영웅 반스 이드위너 공이 되는 것이다.
“암살자의 실력은 분명 믿을 만하겠지?”
“물론입니다, 주인님. 뒤탈이 없게 멀리 카스티 제도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자로 데려왔습니다.”
“그래. 너만 믿겠다, 파울러. 뒤탈이 없도록 반드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해.”
“예, 그렇게 될 겁니다.”
캐슬란 슈가르는 카스티 제도의 악명 높은 암살자였다. 이스닐 에르르부 역시 그랬다. 프리커스도, 오팃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카스티 제도에서 이름을 날리는 암살자였으며 은신과 변장에 능하여 누구도 그들을 특정하지 못함은 물론이요, 누구도 그들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모든 암살자의 이름이 단 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사실도 말이다.
“오늘 밤이오, 캐슬란.”
짐꾼으로 변장하여 캘던에 입성한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캐슬란 역시 마구간 한편에 자리를 잡고 돌멩이처럼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빵을 포도주에 적셔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파울러가 은밀히 다가와 속삭였다.
“장소는 미리 알아 두었겠지?”
캐슬란은 빵을 씹으며 서툴게 엘버그어를 구사했다.
“목표 확실히 한다. 나. 캐슬란. 완벽하게 준비.”
파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계획을 위해 지불한 돈이 얼마인데. 자그마치 엘버그의 왕조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돈도 돈이지만 이 거사를 위해 저도, 저의 주인도 그 외의 수많은 병사들도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실패할 시 당신에게 치른 값은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요.”
“실패 없다. 한 번도. 늘 완벽하다.”
서투른 말투에도 확신이 묻어났다. 파울러는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캐슬란은 오목한 잔 안에 담긴 포도주를 남김없이 입에 털어 넣고는 제 옆구리를 확인했다. 날을 잘 벼린 예리한 단도의 모양이 뚜렷하게 만져졌다.
캘던성에 들어오는 하객들은 무장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짐꾼들도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문루를 지나오기 전 빠짐없이 몸수색을 당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수레 가득 쌓인 왕을 위한 선물 단지에는 감히 손도 대지 못했다.
그리하여 캐슬란은 선물 함 바닥에 단검을 붙여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상자들을 창고로 옮기며 슬쩍 제 품 안에 감추면 되는 일이었다. 왕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 역시 대단히 쉬웠다.
성안으로 초대된 수많은 하객과 그들의 시종들 사이에 껴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면 됐다. 분주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닐수록 그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더욱 많았다.
카르낙 발투만은 캘던성안에서는 무장을 하지 않는다. 늘 움직이기 편한 얇고 질 좋은 블리오에 바지를 걸치는 것이 전부다. 또한 그의 곁에 늘 붙어 다니던 근위 대장은 아직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평소 신뢰하지 않는 자는 곁에 두지 않는 왕의 의심 많은 성격 덕분에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로로와 에이가라는 두 늙은이뿐이다.
근위대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과 그 이후의 피로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며칠 동안 내내 나태했으며 발투만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몰려든 지방의 영주들로 꽉 찬 성안은 평소보다 산만하고 시끄러워 큰 소란이 일어나도 즉시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그야말로 사람을 죽이고 은신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와 장소였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늦은 밤까지 결혼 전야제로 시끌벅적할 성안에 웅크린 채 어둠이 내리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후 파울러가 알려 준 왕의 침실로 숨어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둔한 왕은 분명 잠에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듯 말이다.
카르낙은 각 지방의 영주들과 저녁 식사를 한 후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왕의 결혼 전야제답게 성 곳곳을 초로 밝히고 악사와 광대를 불러 흥을 돋우었다. 풍성한 식사와 음주에 안 그래도 흥겨운 분위기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몇몇 사내들은 테이블 위에 드러눕거나 그 위에 올라가 뛰어다니기도 했다.
대대손손 귀족이었던 자들은 신흥 영주들의 기행에 입을 벌리며 기함하였다. 그러나 본디 배운 것 없이 카르낙에 의해 벼락출세한 이들에게는 그런 기행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카르낙은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그들의 기행을 기꺼이 즐겼다.
카르낙은 발코니로 나가 안뜰에서부터 붉게 새어 나오는 환한 빛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이 왕과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일 동안 여인들은 안뜰에 앉아 인형극을 즐긴다고 하였다. 다른 이들에겐 어떨지 몰라도 릴리에겐 분명 신기하고 재미난 광경일 터였다.
그래서 카르낙은 그녀가 진심으로 인형극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광대의 재롱에도 악사의 연주에도 별다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저와는 다르길 바랐다.
카르낙이 릴리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였다.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리더니 “폐하.” 하고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디셋 사제의 음성이었다. 카르낙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디셋이 어린 부제와 함께 침실에 들어섰다. 부제의 손에 들린 깨끗한 쟁반 위에는 새하얀 천에 덮인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디셋, 다른 치들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줄 알았는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신을 섬기는 종자인지라 술과 노래가 있는 여흥은 영 달갑지가 않답니다.”
“사제가 끼기엔 지나치게 경박한 자리이긴 했지. 이해해.”
카르낙은 테이블 위를 네발로 기어 다니던 울퍼를 떠올리며 저 혼자 웃었다.
“대신 폐하와 함께 귀한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디셋은 그렇게 말하며 부제가 들고 있던 쟁반 위에서 천을 거두었다. 구리 쟁반 위에 눈처럼 하얀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깨끗하고 유려하긴 하나 섬세하게 빚어낸 것은 아니었다. 하얗지만 않았다면 엘버그의 시장 한 귀퉁이에서 파는 나무잔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엘버그의 전설을 아십니까?”
“아니, 몰라.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오, 폐하. 하지만 이 성물을 위해 꼭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답니다. 바로 라미레스가 낳은 첫 번째 아이에 대한 전설이지요.”
“그놈이 눈 똥이 눈처럼 새하얗기라도 하대? 저 잔처럼?”
비아냥거리려 한 농담에도 디셋은 껄껄 웃었다. 정말 태평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소리였다.
“아니요, 폐하. 인류가 낳은 최초의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백룡이었답니다! 이 잔은 바로 그 백룡 알기어스 라미레스가 지상에 내려와 잠든 이후 그의 갈비뼈로 만든 것이지요.”
“…….”
그러니까 저 새하얀 것이 뒈진 백룡의 갈비뼈란 말인가. 디셋은 경건한 태도로 그 잔을 들어 보였다.
“이 잔은 그 어떤 불길로도 녹이지 못한답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도 이것만은 녹일 수가 없지요.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왕좌로 가 확인을 해 보아도 좋습니다.”
“…….”
왕좌의 끝에 걸린 그 시퍼런 불길 말이지. 그 안에 잔을 집어넣기도 전에 살과 뼈부터 녹아 버리겠지. 애초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솜씨 좋게 그 안으로 던져 넣는다면 그나마 가능할는지도.
“이것은 엘버그의 제일가는 성물. 저 디셋과 리오가 폐하께 드리는 결혼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