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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55화 (55/231)

55화

릴리는 저를 향한 걱정에 잔뜩 굳어 버린 세일린의 손을 잡아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난 무사할 거예요. 이 성안에는 로로도 있고 세일린도 있고 또 폐하도 있고 그의 충직한 근위대도 있잖아요. 바보가 아니라면 함부로 절 어찌하진 못할 거예요.”

로로는 고심하다가 말을 꺼냈다.

“몇몇 병사에게 근처에 매복해 있도록 지시해 두면 어떨까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닌 거 같았다. 상대방에게 들킨다면 그땐 반역자가 누구인지, 그의 계획이 무언지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파니릴리의 안위. 행여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것 역시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되고 만다. 릴리는 그 점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키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대신 절대로 들키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한 치의 실수도 없게끔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로로. 이제 세일린도 한숨 돌릴 거예요.”

릴리는 세일린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세일린도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결코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성안으로 검은 망토를 두른 이를 태운 갈색 말이 뛰어들어 왔다. 전령은 진입하자마자 말에서 내려 곧바로 본성으로 들어갔다. 카르낙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그가 안뜰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다. 잔에 와인을 채우고 몇 모금 마셨을까. 똑똑똑. 누군가 은밀히 문을 두드리고 몇 초 후 이렇다 할 대답이 없음에도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카르낙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곧바로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건넸다.

“루안에서 오는 길입니다. 폐하.”

루안이라면 북쪽 성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수고했다. 쉬어라. 곧 다시 부르겠다.”

카르낙은 먼저 전령을 내보냈다. 그가 조심조심 물러서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본 이후에야 밀지를 펼쳤다. 기대한 바와 같이 멋대로 휘갈겨 쓴 악필이 종이를 빼곡하게 채웠다. 읽기 위해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갔다.

위대한 왕 카르낙 발투만.

루안에서 상황을 전한다. 모래 폭풍은 이곳에 당도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망할 놈의 성전은 여전히 저 높은 곳에서 얼음처럼 시린 자태를 뽐내고 있다.

테이먼 테르조의 군대는 여전히 굳건하며 네가 바람맞힌 에나는 아직 루안 땅에 당도하지 않았으나 그의 행적을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다. 부디 그가 곧바로 테이먼 테르조를 찾아가지 않았기를 기도해라.

너의 충실한 종, 핀이.

다 읽은 후 카르낙은 곧바로 양피지의 끝을 촛불에 댔다. 불길이 화르륵 옮겨붙은 종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만 재로 변해 버렸다. 그는 와인 잔을 채워 다시 창가에 섰다.

모래 폭풍에 피해를 입은 것은 오로지 아군뿐이다. 놈들은 어디 하나 손해 본 것이 없다. 역시 신이 보살피는 땅과 핏줄이라 이건가. 그는 술을 들이켜며 토막 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뒷맛이 못내 씁쓸하였다.

어두운 밤 릴리는 홀로 촛대를 들고 숲으로 향했다. 그녀는 일부러 아주 느린 걸음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정원을 가로질렀다. 누구라도 그녀의 뒤를 쉽게 쫓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러고는 오래된 주목 아래에서 발을 멈추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건조한 모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릴리는 가느다랗게 떠 있는 그믐달을 바라보았다. 그 자태가 아련하면서도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릴리는 문득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아마네스가 자신의 어머니라면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자신이 그녀의 아이라면 갑작스러운 위험에 처했을 때 마법을 부려 자신을 지켜 주진 않을까. 그러다가 픽 웃어 버렸다.

그 건국 신화가 사실이라면 애초에 카르낙의 손에 제 아비가 죽진 않았으리라. 아니 애초에 알기어스 왕이 광증에 미친 폭군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신의 축복을 받은 그의 자손이라면 말이다.

그랬다면 알기어스가 제 모친을 그렇게 유린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럼 아마 자신이 태어날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모든 것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진 거짓에 거짓을 보탠 거짓일 거다.

세상에는 결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곤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절대적이고 우월한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각기 다른 운명과 사연과 현상들의 인과 관계가 섞여 나타나는 결과일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아마네스를 믿지도 않는 자신이 신의 아이로 추앙받으며 엘버그에서 원치 않는 호사를 누리는 것도 그런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릴리는 이 실타래를 아주 잘 풀어 모든 것이 있어야 마땅할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얽히고 끊어지고 망가져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하나씩 하나씩 신중하게.

“알기어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파니릴리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하마터면 손에 든 촛대를 놓칠 뻔하였다. 온몸에 털이 삐쭉 곤두서서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릴리는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 그녀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두리번거렸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알기어스 양.”

그러자 낮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릴리는 행동을 멈추고 턱을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자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들리는 목소리로 짐작하건대 사내임이 틀림없었다. 릴리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누군지 알려 주세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가씨의 안위를 위해서 모르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그러나 부디 두려워 마십시오. 저는 아가씨의 충실한 종입니다.”

릴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혼자… 혼자 나왔어요.”

“예, 압니다. 제가 알려 드린 대로 홀로 계셨지요. 그리하여 제가 아가씨를 찾아왔나이다.”

“보내 준 밀지를 읽어 보았지만 무슨 뜻인지 한 번에 파악하기는 힘들더군요. 그래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았어요. 내게… 내게 자유를 준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아가씨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답니다. 아마네스 여신의 축복을 받아 선하고 더없이 기품이 넘치며 누구보다 상냥한 분이시라지요. 카르낙 발투만에게는 과분한 분입니다.”

“그러나 전 그와 약혼을 한 몸이에요. 곧 그의 아내가 될 거고요.”

“원치 않으신다면 아가씨, 제가 기꺼이 도울 수 있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어요. 곧 식이 열릴 거고 그것을 위해 하객들도 도착했잖아요. 이제 와 그것을 어떻게 물리겠어요?”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가 웃었다. 그마저도 낮고 음산하여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더 멋진 장면을 보여 주면 어떨지요?”

더 멋진 장면?

“대관식은 어떨까요, 아가씨?”

“대관식?”

릴리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예, 선왕의 적통을 잇는 파니릴리 알기어스의 대관식 말입니다.”

“…….”

릴리는 충격에 벌어지려는 입술을 짓씹으며 신음을 삼켰다.

“…어째서… 제가… 제가 왕이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카르낙 발투만은 물론이고 테이먼 테르조 역시 엄밀히 따지면 난잡한 혼혈인입니다. 아마네스 님의 피를 이어받은 순혈은 오로지 파니릴리 알기어스, 당신뿐이지요. 그러니 누군가가 왕좌에 앉아야 한다면 당연히 그 자리는 아가씨의 것이지 않겠습니까?”

“하… 하지만 저는 여인입니다. 여인이 군주가 되는 일은 저는, 저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아가씨가 최초의 여왕이 되는 겁니다. 아마네스 여신의 축복을 받은 그의 유일한 딸이 어머니의 피를 이어 가는 것이지요. 참으로 근사한 일이 아닙니까? 아가씨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여왕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최초의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

역시 이자는 알기어스 왕의 신봉자다. 그가 원하는 것은 카르낙의 패배도, 테이먼 테르조의 왕위 찬탈도 아니다. 오직 알기어스가 다시 왕위에 오르는 것. 그의 목적은 그가 적어 보낸 그대로였다.

릴리의 뒤에서 불쑥 손이 나왔다. 두툼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지나 튀어나왔다.

“자, 이것을 받으세요.”

흠칫 놀라 엉거주춤하다 릴리는 그의 손이 떨구려는 것을 건네받았다. 사내의 손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게 뭐죠?”

릴리가 제 손바닥에 있는 작고 묵직한 구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왕의 인장이랍니다.”

인장? 릴리는 그것을 들어 촛대 가까이 비춰 보았다. 달과 용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음각된 무겁고 두꺼운 반지. 누가 보아도 알기어스의 상징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이걸 어디서 구했어요?”

“돌아가신 선왕 폐하의 손가락에서 직접 빼 왔지요. 카르낙 발투만이 그의 시신을 처리하기 전에 말입니다.”

“…전, 전 한 번도 가문의 인장을 본 적이 없어요.”

엘버그에 있는 동안은 내내 올라와 함께 성안에 갇혀 살았고 그 이후에는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 있었다. 알기어스 왕가의 인장 따위를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걸 보여 주셔도… 전 아무것도 모르는걸요.”

“인장이 기록되어 있는 책을 찾아보십시오. 그것이 어렵다면 왕의 인장을 알아볼 만한 자에게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

왕의 인장을 알 만한 자라. 세일린이라면 왕의 인장을 알아차릴 것이다. 제 부친 때부터 성에서 일했으니.

“하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인장이 아가씨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을 카르낙 발투만이 알아서는 안 되니까요.”

“…그렇다면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하죠?”

“비밀을 알아도 반드시 침묵해야 하는 자가 좋지 않겠습니까?”

비밀을 알아도 반드시 침묵해야 하는 자라면 결혼식을 위해 머무르는 디셋 사제 정도였다. 그라면 알기어스 왕의 인장을 몰라볼 리가 없다.

“내게 바라는 건 뭔가요?”

릴리가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답했다.

“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저는 언젠가 왕좌에 앉은 아가씨의 옆에 충직한 당신의 신하로서 곁을 지키고자 하는 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다인가요?”

“예, 아가씨. 오로지 그뿐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당장 하루 뒤면 결혼식인데….”

“하루면 충분합니다, 폐하.”

릴리를 부르는 그의 호칭이 달라졌다.

“부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예배당에 드십시오. 하루 뒤면 폐하는 카르낙 발투만의 옆자리가 아닌 바로 그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릴리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저와 새까만 어둠 속에 첨탑처럼 솟아 있는 주목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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