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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54화 (54/231)

54화

로로는 릴리의 밀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도 릴리와 세일린이 그랬듯 몇 번이고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방어에 철저했건만 대체 어떻게 반역자가 숨어들었단 말인가.

“성에 초대된 영주들은 모두 폐하께서 영지를 하사한 자들이거나 그것이 아니면 폐하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폐하를 돕던 자들입니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면 카르낙은 무자비하게 그를 처단했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의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제왕적 태도 때문이다.

“일련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 중 폐하를 배신할 만한 자들은 없어요. 감히 그럴 용기가 없을 겁니다.”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선 안 될지도 모르겠어요. 명분보다 실익을 취하는 자들이라면 얼마든지 편을 바꿀 수 있겠죠.”

“실익이라니요?”

“글쎄요. 카르낙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저의 존재가 마음을 바꾸게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편이 더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로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익에 따라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자라면….

“리오에서 온 상인….”

“뭐라고요? 로로?”

“리오에서 온 상인이 있습니다. 반스 이드위너란 자로 무역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지요. 그자라면 누구보다 실익을 중시할 만하지요. 하지만 그는 리오 상인 길드의 우두머리입니다. 유사시 폐하를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분명 맹세를 하였는데….”

“장사치의 맹세는 믿어서는 안 돼요. 그자들은 거짓말을 잘하거든요.”

세일린이 나서서 로로의 말에 반박했다.

“성안에 드나드는 상인들조차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요. 성안에 산다고 바깥세상에 무지한 줄 안다니까요. 이 안에 입과 귀가 몇 갠데…. 어떻게든 등쳐 먹을 생각만 한단 말이죠.”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 릴리는 그런 자들과 가깝게 지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부유하고 힘 있고 욕심 많은 장사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하지만 세일린의 말이 맞을 것이다. 적어도 이 셋 중에 상인들을 가장 많이 겪은 이는 그녀일 테니 그녀의 말을 믿는 것이 좋을 터였다. 그러나 로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스 이드위너를 겪어 본 자라면 분명 그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반스가 어째서 아가씨와 폐하의 성혼을 방해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왕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보아서 알아요. 그 누구보다 알기어스 왕의 치세로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일 텐데 아가씨를 염원해 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요.”

“그 말도 거짓일지도 모르잖아요.”

세일린이 반박했다.

“형제니 뭐니 하는 것도 다 새빨간 거짓말일지도 몰라요. 아가씨를 떠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아가씨가 폐하와 반목하도록 조장하려는 것일지 누가 알겠어요?”

두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로로는 직접 반스를 겪어 본 자로서 일련의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고 세일린은 상인이란 그의 신분을 의심스러워했다. 로로의 말대로 반스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세일린의 말처럼 모든 게 거짓일 수도 있다.

“그자는 어디 출신이죠? 리오에서 나고 자랐나요?”

“네, 그자가 그렇게 답했습니다. 따로 확인해 보진 않았습니다만.”

로로는 확신 없이 답했다. 릴리는 로로에게서 밀지를 건네받아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했다.

“제가 이자를 따로 만나 봐야겠어요.”

“이자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밀지를 쓴 사람이요. 리오에서 온 이드위너인지 아니면 다른 이인지 확인을 해 봐야지요.”

세일린이 기겁해 손을 저었다.

“안 되어요, 아가씨. 그놈이 누군지 알고 만나 보신단 말씀이세요? 게다가 혼자만 나오라니, 너무 위험해요!”

“내게 해코지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위험을 감수하고 이런 밀지를 전하러 오지 않았을 거예요.”

“차라리 이 밀지를 폐하께 드리세요. 어차피 아셔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면 폐하께서 조치를 취해 주시지 않겠어요?”

카르낙에게? 릴리는 로로를 쳐다보았다. 노인의 눈빛은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제가 이 밀지를 폐하께 드리면 그분은 어떻게 하실까요?”

그는 잠시 후 아주 무겁게 입을 뗐다.

“아마도… 아마도 모조리 베어 버리실 겁니다.”

세일린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모조리 베어?

“누구를 베어 버린다는 말씀이신가요? 설마 하객들 전부를요?”

자신이 말하면서도 영 터무니없는 소리라 여긴 탓에 세일린의 입가에 웃음이 베어 나왔다. 그러나 이어지는 로로의 대답에 세일린은 낯빛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예, 전부요.”

“…….”

“폐하께서 임명하셨으나 어차피 대부분은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 봉신들입니다. 폐하껜 그다지 아까운 목숨들이 아니지요. 대체할 자들은 어디에나 널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성혼식은 경사스러운 일인데 어떻게….”

세일린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더듬댔다. 그러나 릴리는 카르낙의 생각과 태도를 쉽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게 결혼은 그저 보여 주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아요. 구색 맞추기일 뿐이니 결혼 하객 같은 건 있어도 없어도 별로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없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죠.”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예식이다.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엘버그식으로 치러지는 결혼식은 그에게도 저에게도 불편하고 어색할 뿐인데도 형식을 따라 정통성을 갖기 위해 따르는 것뿐이다. 애초에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이것저것 따지며 어렵게 진행하지도 않았으리라.

“아무리 폐하께서 잔인한 분이라고 하셔도 그래도 당신의 결혼식에 앞서 피를 보려 하실까요?”

세일린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천박하고 미개한 왕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인데 자신의 잔치에 피를 뿌리려 할까? 그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캘던성의 근위대가 사람들을 죽이는 걸 본 적이 있나요, 세일린?”

릴리가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며 물었다.

“아니요, 아가씨.”

“전 본 적이 있어요, 그라타에서요. 겨우 세 명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봤던 그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들에게는 그것이 잔치였다. 진수성찬이 차려진 잔칫상을 대하듯 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베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동료까지도 필요에 따라 베었다. 오랜 전쟁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릴리는 그때 처음으로 목격했다. 카르낙의 아래에서 그들이 지나온 길이 어떠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피는 불결하고 더럽고 처참한 게 아니에요. 평생 그것과 뒹굴면서 살았으니 제 옷처럼 편안할 거예요. 폐하께서는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셨어요. 왕좌에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권력과 명예를 얻으셨죠. 그분은 왕이기 전에 군인이세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실 거예요.”

게다가 카르낙이 얼마나 엘버그를 혐오하는지를 안다면 오히려 그가 쾌재를 부르며 성문을 걸어 잠글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리라. 오히려 그에겐 그것이 더 잔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로로가 그 말에 방점을 찍었다.

“폐하께서 언제나 우선으로 두는 것은 희망이란 싹을 자르시는 겁니다. 엘버그 왕국이 당신에게서 해방되리란 희망을 없애는 것이 바로 그분의 가장 큰 뜻이지요.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실 겁니다.”

그게 그분의 뜻이라니. 세일린은 당황하고 말았다. 물론 카르낙이 세상에 대한 분노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왕위를 찬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왕이 될 만한 자는 그만한 큰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자 하는 열망과 그에 대한 계획이나 꿈 따위의 희망적 시각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우선시하는 것이 희망이란 싹을 자르는 것이라니. 희망이 없는 엘버그라니.

충격적이었다. 가슴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사모하던 정인에게 버림받은 여인처럼. 허망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저는 이토록 시리고 슬프고 아픈데 릴리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아가씨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던 걸까. 카르낙 발투만의 생각과 바람을 모두 다 알면서도 곁을 지키고 있는 걸까.

“저는 가능하다면 피를 보지 않고 일을 끝내고 싶어요. 만일 피를 묻히게 되더라도 가능한 한 덜 묻히고 싶고요. 그러니 폐하께 알리는 것은 최후의 방법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밀지를 건넨 자를 만난 후에는요?”

로로가 물었다. 그러자 릴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궁금한 것을 물어야죠.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목적이 뭔지, 뭐 하는 자인지.”

“이야기한다 해도 과연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적혀 있는 대로라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거짓말을 한다면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테고요. 그걸 알아보려면 어쨌든 제가 만나 보아야 해요.”

“이제 성혼식까지 겨우 하루 정도의 말미뿐인데…. 이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할까요?”

“어찌 되든 뭐라도 해 보아야죠. 이대로 예식을 치를 순 없잖아요. 그 전에 해결할 수 있다면 노력해 봐야죠.”

그 말과 함께 릴리는 밀지를 접어 제 소매 안에 넣었다.

“오늘 밤에 혼자 나가겠어요. 만일 내가 한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세일린이 로로를 찾아갈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근위병에게 제 행방을 알려 주세요. 제가 파니릴리의 정원으로 향했다고요.”

“…아가씨 설마 그 절벽… 절벽으로 가실 건 아니죠?”

세일린은 주목이 서 있던 정원의 끝, 깊고 가파른 절벽을 떠올렸다. 릴리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설마, 거긴 성벽도 없는 곳이잖아요. 혹여 거기서 해코지라도 당하시면….”

그놈이 수가 틀려 아가씨를 절벽으로 밀어 버리면 어쩌려고 이러시는가. 그 까마득한 절벽에서 떨어지면 절대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릴리가 떠올릴 수 있는 은밀하고 조용한 장소는 그곳뿐이라는 것을 세일린도 잘 알고 있다. 그곳이 적당한 장소라는 것도 말이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무슨 짓을 당해도 금세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곳이다

“왜 내가 당할 거라고 생각해요, 세일린? 내가 그자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릴 수도 있잖아요.”

“아가씨, 그걸 말이라고….”

대체 어딜 봐서 당신이 누군가를 해코지하리라 여기겠는가. 오히려 해코지를 해도 기꺼이 당해 줄 이라 생각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릴리 대신 자신이 나가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녀와 닮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얼마든지 그녀인 척 행세하며 위험을 대신 무릅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파니릴리의 외형은 너무나 특별하다. 특히나 달빛 아래에서도 빛나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신의 축복이자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런 때에는 불행이었다. 그라타에서 제 머리를 모두 밀 수밖에 없었던 주인의 심정을 세일린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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