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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53화 (53/231)

53화

울퍼의 차례가 끝나자 다음은 이국적이고 화려한 옷차림에 깃털이 달린 특이한 모자를 쓴 자가 나섰다.

“폐하, 리오에서 온 상인 길드장, 반스 이드위너입니다.”

사내는 서기관의 호명에 맞춰 왕에게 절을 하고는 엎드려 말했다.

“폐하,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폐하께서 보내 주신 식료품 덕분에 리오의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하고 도시를 재건할 힘을 얻었나이다. 폐하야말로 아마네스 님이 이 땅에 내려 준 진정한 축복입니다.”

만일 릴리가 옆에 있었다면 이런 낯 간지러운 찬사에도 품위 있게 화답했을 터였다. 인자하게 웃으며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다든가, 다행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몇 명째인지도 모를 영주들을 거쳐 울퍼, 그다음 반스 이드위너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찬사에 카르낙은 슬슬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언제까지 이런 고루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가.

“…고맙다.”

카르낙은 팔걸이를 두드리며 한참 만에 대답했다.

“신부 될 아가씨의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아름답고 상냥하여 폐하께 더없이 훌륭한 배필이라고요.”

“아아….”

“실은 오늘 폐하를 뵈러 올 때 함께 뵙는 것은 아닌가 기대를 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계시지 않을까 하고요.”

이도 저도 아닌 소리의 대꾸에도 반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인 특유의 뻔뻔함일까. 카르낙은 마른세수를 하며 답했다.

“신부는 식장에서 볼 수 있을 거다, 이드위너. 아주 먼 발치에서 말이야.”

“그마저도 과분한 영광이지요, 폐하.”

이드위너는 다시 한번 입바른 소리를 하며 절을 하고는 물러났다. 이어서 몇 사람이 더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쯤 카르낙은 일일이 대꾸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곧 서기관이 지방의 영주들이 보내온 서신을 꺼내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그만.”

카르낙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에이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소곤거렸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서신들은 모두 폐하의 동맹들이 보내온 것이니 이곳에 온 손님들과 같은 대우를 해 주셔야 합니다.”

겨우 종이 쪼가리들이다. 사람의 인사를 받는 것도 지겨운데 하물며 저 많은 서신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추임새를 넣어야 하는 것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어차피 내게 대접받으려고 보낸 서신이 아니야. 보내지 않으면 혹여 제 목이 달아날까 두려워서 보낸 거지. 어차피 적혀 있는 말들도 뻔할 텐데 시간 버려 가며 그걸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말이라도 타는 게 나아.”

“또….”

또 말을 타러 나가는 거냐는 물음을 다 듣지도 않고 카르낙은 저벅저벅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아직 알현실 밖에서 대기 중인 손님들이 그의 등장에 머리를 조아렸다. 카르낙은 그들을 한 번 빙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다들 와 줘서 고맙다. 그러나 네놈들이 나를 알현한다 하여도 나는 너희들의 얼굴조차 기억 못 할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예의 따윈 집어치우고 다들 캘던성의 곳간이나 털도록 해. 술이며 음식이며 맘껏 먹어라. 그게 싫으면 발 닦고 잠이나 자든가.”

그게 끝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환영사를 마친 후 카르낙은 쏜살같이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제 그만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에이가는 카르낙이 이럴 때마다 낯빛이 바랬다. 결국 그녀를 다독여야 하는 것은 로로였다.

“애초에 폐하께서 알현실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실 거란 걸 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로로의 말에 에이가는 어금니를 사리물고 속삭였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고작 반나절도 못 견디신단 말인가요? 엉덩이에 뿔이라도 나셨답니까?”

“이미 뿔은 오래전에 나셨답니다. 갓난아이일 때부터 가만히 누워 있는 걸 못 봤으니까요.”

에이가는 한숨을 쉬며 로로를 쳐다보았다. 그런 카르낙을 주워 기른 로로에 대한 동정심이 그녀의 눈빛에 가득해서 로로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수습을 하러 가 봅시다.”

에이가는 단념한 듯 로로를 따라나섰다. 이 늙고 온화한 투로가 없었다면 저 혼자 어떻게 저 뿔난 망아지를 견뎠을지 모르겠다.

***

콜록콜록 세일린이 잔기침을 했다. 릴리는 서둘러 방의 창문을 닫았다. 얼마 전 새로 달아 놓은 유리창에 벌써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릴리는 눈물을 훔치는 세일린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이만 들어가 쉬는 게 어때요? 몸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요.”

세일린은 손사래를 쳤다.

“폭풍 때문이에요. 그 이후로 먼지가 너무 많아졌어요.”

릴리가 다가와 그녀에게 찻잔을 건넸다. 세일린이 릴리를 위해 가져다 둔 것이었다.

“아가씨 이건….”

“잔말 말고 마셔요. 지금 차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세일린이잖아요.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저는 누가 돌봐 줘요?”

마지막 문장이 방점을 찍었다. 세일린은 찻잔을 들고 릴리가 향긋한 꽃잎으로 우린 찻물을 따를 동안 얌전히 기다렸다. 릴리는 세일린을 의자에 앉히고 저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더니 세일린이 찻물을 한 모금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입을 뗐다.

“난 우리가 친구였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저는 늘 아가씨 편이에요.”

세일린은 성실하게 답했다. 그러자 릴리는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거 말고요, 세일린. 주인과 하인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친구 말이에요. 같이 이렇게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사이요.”

하지만 지금도 담소를 나누고 산책을 한다. 또 이렇게 마주 앉아 차도 마시고 있다. 이것 이외에 또 어떤 것을 함께할 수 있을까.

“서로 농담도 하고 또 고민이 생기면 털어놓기도 하고 슬플 땐 같이 울어 주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같은 방을 쓰는 캐시처럼 대하란 말인가. 거리낌 없이 옷을 벗고 드러누워 농담 따 먹기를 하고 서로를 놀리고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자신이 릴리 아가씨의 근심과 걱정을 들어 주고 그녀의 슬픔에 함께 눈물은 흘릴지언정 자신의 고민과 슬픔을 그녀와 나눌 수는 없다.

그런 관계는 들어 본 적도 없고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나 높고 자신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였다. 땅과 하늘이 같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솔방울과 금이 같지 않듯, 다이아몬드와 조약돌이 같지 않듯.

릴리와 자신의 사이 역시 그렇다. 그러나 릴리에게 감히 그럴 수 없다,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해서 릴리가 낙담한 낯빛을 하면 그 역시 제 탓 같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일린은 침을 한 번 삼키고 겸손히 말했다.

“저는 언제까지나 아가씨의 충실한 친구일 겁니다. 염려 놓으세요.”

그러자 릴리도 찻잔을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세일린이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인지 알리는 음성대신 문 밑으로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의아한 일이었다. 세일린은 문가로 가 종이를 살폈다. 아무런 문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 일어난 릴리가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고 세일린은 그것을 건네며 수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런 표시가 없어요. 괜찮은 걸까요?”

“글쎄요.”

겉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으니 펴 보는 수밖에 없다. 혹시 방 주인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심쩍기도 하지만.

꾹꾹 눌러 접어 놓은 것을 반듯하게 펴 들었다. 갈기듯 써 놓은 필기체는 밝은 곳에서도 좀처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릴리는 미간을 구기고 활자에 집중했다.

아마네스 님의 유일한 아이이자 알기어스 왕의 유일한 혈육, 파니릴리 알기어스 양. 오랫동안 우리는 당신을 염원하였습니다. 고귀하신 분께 신의 축복을!

우리 형제들은 당신의 자유를 위해 검을 빼 듭니다. 피로써 한 맹세를 지켜 신에게 당신의 종임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홀로 계십시오. 그때가 어느 때이든 당신을 찾겠나이다.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이자 신봉자 올림.

릴리의 낯빛이 굳자 세일린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

괜찮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내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검을 빼 든다고? 활자들이 지렁이처럼 보였다. 현기증이 인 릴리는 세일린이 읽을 수 있도록 밀지를 건네주었다. 마지막 마침표까지 다 읽은 세일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이게 무슨 뜻인가요? 무슨 말이죠?”

“…모르겠어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나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니. 무슨 자유? 내가 갇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릴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카르낙 발투만이 저를 강제로 납치해 와 탑에 감금했다고.

그리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얼마의 자의가 섞였든 상관없었다. 만일 저와 카르낙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감정 없이 기록해야 한다면 분명 그렇게 기록될 터였다. 카르낙 발투만이 그라타에서 알기어스의 사생아를 데려와 1년 동안 성탑에 감금시킨 후 성혼식을 올렸다, 라고. 내부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자들 역시 분명 그렇게 알고 있을 터였다.

“추종자들일 거예요. 나를 염원했다고 하니 알기어스의 핏줄을 지키려는 자들일 테죠. 그들은 내가 카르낙 발투만에게 붙들려 강제로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자유를 들먹이겠죠.”

“성혼식을 방해하려는 걸까요? 반란을 모의하는 중일까요? 이자들이… 이자들이 지금 성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잖아요.”

언뜻 보면 모호한 듯하지만 쓰인 단어들은 정확했다. 신, 알기어스의 혈육, 맹세, 염원, 자유. 이런 자들이 카르낙에게 호의적일 리가 없다. 잠자코 결혼이 성사되는 것을 지켜볼 리도 없다. 카르낙을 죽이든, 아니면 저를 캘던성에서 빼내든 해서 어떻게든 결혼을 못 하도록 만들 것이다.

카르낙은 통치자로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이들을 제거하는 데 썼다. 반란을 잠재우고, 반역자의 목을 치고, 세를 늘리고. 그러면서 캘던성을 지켜 온 것이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관료를 줄이고 예배당과 회의소까지 비워 가면서.

결혼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급박한 시간, 멀지 않은 곳의 믿을 만한 이들만 확인하여 성안으로 들였다. 그럼에도, 그토록 철저하였음에도 수상한 그림자가 숨어들었다. 저를 신봉하는, 그리하여 반역일 수밖에 없는 자들 말이다.

“아가씨. 어쩌면 좋죠? 이 사실을 폐하께 알려야 할까요?”

물론 그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들이 제거하고 싶어 하는 자가 바로 카르낙 발투만일 테니. 그러나 카르낙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그러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무자비하게 모두를 죽이려 하지는 않을까. 무작정 쪽지를 들고 달려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았다.

“세일린.”

“네, 아가씨.”

“조용히 로로를 데려와 주겠어요?”

“네, 아가씨.”

세일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침실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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