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50화 (50/231)

50화

릴리는 멍하니 제 손등을 매만졌다. 그렇게 손등을 매만지다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는 것이 요즘 하루 일과였다.

“아가씨.”

그러면 바로 지금처럼 저를 부른다. 릴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매만지던 손등 위로 황급하게 다른 손을 덮었다.

“디셋 사제님이 하신 말씀 이해하셨어요?”

장소는 예배당이었다. 그래, 아침 일찍부터 예배당에서 디셋과의 만남이 있었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제와 만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에이가가 말하길, 결혼 전 신에게 고백해야 할 죄가 있다면 사제에게 대신 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절차라고 했다. 사제는 이때 신부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 과연 아내로서의 자격이 충분한지 검증한다. 만일 신부에게 문제가 드러난다면 사제는 그것을 약혼자에게 전하여 결혼을 취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신실한 신앙심의 소유자라면 이때 울며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몰래 사랑하는 사내가 있다든가 아니면 이전에 마음을 주었던 사내가 있다는 등의. 그리하여 발생하는 일방적인 파혼은 여자에게는 실이요 남자에게는 득이었다.

그렇게 파혼당한 여자는 이후 제대로 된 혼처를 찾지 못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내에게 시집을 가거나 아니면 신앙인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배를 타고 먼 이국으로 떠나곤 했다. 그만큼 식을 치르기 전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때였지만 릴리는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디셋이 뭐라 했는지도 하나도 듣지 못했다.

릴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디셋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에이가를 달랬다.

“아가씨께서 결혼을 앞두고 혼란스러우신가 봅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들이 으레 겪는 과정이니 그리 당황하실 필요 없어요.”

“…….”

디셋의 배려에 에이가의 굳은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혹여 어딘가 불편하신 건 아닌가요? 요 며칠 계속 가슴께를 짚는 거로 보아 혹여나 흉통이 있으신 건 아닌가 염려됩니다.”

“아…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에이가.”

릴리는 우물거리며 부정했다. 가슴을 자꾸 짚는 이유는 손등을 매만지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카르낙의 입술이 닿거나 손길이 닿은 곳. 소름이 돋을 정도의 기묘한 서늘함과 뒤이어 찾아오는 뜨거움이 낯설어 그 느낌의 파편이 제 머릿속에 날카롭게 박힌 탓이었다.

이마나 콧등에 그의 입술이 닿았을 때는 너무나 황홀한 느낌에 온몸이 녹는 것 같았는데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은 뾰족한 통증이 일었다. 위험을 감지한 동물이 털을 세우듯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

릴리는 내내 그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떨쳐 내려 할수록 역으로 더 깊어져서 종국엔 시름시름 앓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온몸이 굳어지며 동시에 무너질 것 같은 기분. 릴리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온종일 그가 새로이 느끼게 해 준 감각에만 골몰하는 자신이 자꾸만 부끄럽게 느껴져 사제에게도 에이가에게도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디셋은 분위기를 풀어 볼 요량으로 다시 대화를 주도했다.

“예배당에 도착해 신랑의 손을 잡을 때까지도 확신이 없어 두려워하는 신부들도 많지요. 손을 잡은 이후에도 도망갈까, 수십 번 고민한 부인도 있다고 하더군요. 혹여나 염려되는 부분이 있다면 저에게는 말씀하셔도 됩니다, 파니릴리 아가씨. 저는 신에게 침묵을 지키기로 맹세한 몸이니 어떤 고민이라도 염려 말고 털어놓아 주십시오.”

사제에게? 사제에게 그런 것을 물어도 될까? 아무리 남녀 관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경건한 자에게 묻기엔 매우 부적절한 사항이란 것은 안다. 가장 믿음직하고 현명한 에이가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을 하물며 사제에게 어떻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결혼식 날 드레스를 밟고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이에요.”

릴리는 디셋을 실망시킬 수 없어 엉뚱한 답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디셋이 사랑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예배당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내 폐하가 든든히 아가씨를 지탱해 주실 테니까요. 그분이라면 설령 아가씨가 비틀거리셔도 잘 버텨 주실 겁니다. 그러니 예배당에 들어서면 페하의 단단한 팔에 꼭 손부터 얹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원만할 겁니다.”

“예, 그럴게요.”

릴리는 마지못해 웃어 보였다.

루이스는 막사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왕의 결혼식에 서려면 틈날 때마다 판금 갑옷과 검을 손질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대장인 핀이 자리를 비웠으니 왕을 근거리에서 모셔야 하는 일은 루이스가 해야 했다.

젠장.

적당히 구색에 맞춰 들러리나 섰다가 연회 때는 막사에서 진탕 술이나 마실 생각이었건만, 핀의 부재로 성미에도 맞지 않는 연회장에 앉아 있어야 한다니. 재수가 없어도 심각하게 없었다.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누가 그를 불렀다.

“루이스 경.”

루이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종자 슬로우가 막사 밖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밖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루이스는 시선을 문밖으로 돌렸다. 파니릴리의 시녀였다. 또 무슨 해괴하고 위험한 명령을 내리려고. 이미 보석을 빼돌려 구제소에 몇 번이고 나누어 주지 않았는가. 결혼을 코앞에 두고도 또 나갔다 오란 말인가?

루이스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어금니를 씹으며 탁자 위에 검을 내려놓고 그는 느릿느릿하게 막사 밖으로 향했다. 세일린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루이스는 문간에 팔을 얹고 삐딱하게 섰다. 그러고는 세일린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물었다.

“여기엔 또 무슨 일로?”

“파니릴리 아가씨께서 뵙자 하십니다.”

“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속히 뵙자 하십니다.”

“지금 당장?”

“…….”

세일린은 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뜻이리라. 그는 닦다 만 검을 힐끗 돌아보고 곤란한 듯 턱을 매만졌다.

“무척 바쁜데 말이야.”

“모셔 오라 했습니다.”

“…….”

정말 완강하네. 루이스는 마지못해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를 따라나섰다. 파니릴리와 엮이면 손쉬운 일이 없건만…. 루이스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몰라? 왜 나를 보자고 한 건지?”

세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건데?”

“동쪽 의회소로 갑니다.”

예배당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공실로 남겨 둔 왕실 고문들의 회의소 말이지. 또 은밀하게 시킬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

“결혼을 앞두고 자꾸 나 같은 사내를 만나는 건 좋은 게 아니야. 그런 것 정도는 네가 말해 줄 수도 있잖아. 한두 번쯤은 말려도 보고 말이야.”

“죄송한 말씀이지만 루이스 경은 아가씨께 사내도 되지 못하십니다. 그저 일개 병사일 뿐이지요. 그러니 엄한 생각은 지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인이 막강하면 그 종도 기세등등하다더니 수줍음만 많은 계집인 줄만 알았는데 이 계집도 제법 콧대가 높아졌다. 루이스는 코웃음을 쳤다.

“이거 왜 이래. 나도 밖에 나가면 제법 먹히는 타입이라고.”

“캘던의 창부들에게 말이지요?”

“…….”

아니라곤 말 못 했다. 병사가 연애를 한답시고 즐기는 여인들이란 대부분 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질펀하게 즐기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정숙한 여인을 만나 혼인을 올리고는 한다. 물론 그 이후에도 으슥한 골목을 찾아 하룻밤을 즐길 요염한 계집을 찾아 방황하는 것은 매한가지이고 말이다.

대개 모든 사내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정숙하고 아름다운 부인을 두어도 가정에 충실한 무장은 별로 보지 못했다. 마치 그렇게 타고나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안뜰을 지나 기다란 복도의 끝에 세일린은 멈추어 서서 문을 열었다. 서쪽 탑의 바로 아래였다. 어스름한 오후의 햇살이 그늘져 어쩐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두운 회의소 안에서 릴리의 실루엣을 따라 역광이 드리웠다. 빛이 투영된 은백색 머리카락이 환했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통과한 듯 릴리의 말간 피부를 따라 오묘한 빛깔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 눈부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가타부타 투덜거리며 왔음에도 그녀에게서 엿보이는 고귀한 힘에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 부르셨다고요.”

“미안해요, 루이스. 예식을 앞두고 모두가 바쁘다고는 들었어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해도 루이스는 거짓말에는 젬병이었다. 대신 침묵할 줄은 알았다. 그래서 루이스는 아니라는 말 대신 침묵하는 것을 택했다.

“바쁠 테니 용건만 말할게요. 부탁할 게 있어요.”

물론 부탁할 것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부디 그것이 실행 불가능한 것만 아니길 바랄 뿐이다.

“예, 말씀하십시오.”

“군인들은 자주 캘던의 창녀촌을 드나든다 들었어요. 맞나요?”

“…….”

잠깐. 첫 질문부터가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내용인데…?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분을 소개해 주었으면 해요. 은밀히 성안으로 데려올 수 있나요?”

루이스는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세일린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길 바랐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세일린의 낯빛은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덤덤했다.

“묻기 전에 먼저 용서를 구합니다, 아가씨. 대체 창녀가 왜 필요하십니까?”

“전문가가 필요하니까요?”

전문가? 무엇에 대한?

“…남녀 간의… 잠자리 같은 것 말입니까?”

“포함해서요.”

“그것에 관해서라면 성안에 대답해 줄 이들이 많을 텐데요. 성안의 일손 중에는 결혼을 한 유부녀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들이라면 상세히 답해 줄 겁니다.”

“성안의 누구요?”

루이스는 언뜻 방직공인 캐튼 부인을 떠올렸다.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있지만 신앙심이 강하고 지나치게 정숙하여 아가씨에게 조언을 해 주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면 주방에서 일하는 르완은 어떨까. 마구간에서 일하는 포드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한창 뜨거울 때인데….

그러나 릴리에게 조언을 해 주기엔 상대적으로 너무 어렸다. 결혼을 한 여성들이야 많았지만 대부분 성격이 괄괄하고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욕을 달고 다니는 미천한 자들이라 릴리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엔 부적합했다.

릴리와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이라면 캘던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창부여야 할 것이다. 언뜻 떠오르는 여자가 있긴 했다. 그 계집이라면 박식하고 다소곳해 릴리의 질문에 대답하기엔 적절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창녀 아닌가. 돈을 받고 제 몸을 파는 싸구려를 성안에 들여도 되는 것일까. 관료들이 알면 난리가 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에이가가 알아차리는 날에는 거품을 물고 자빠질 것이다. 릴리의 명예에도 누가 될 테고 그것이 발각이라도 되면, 그럼 자신은 무슨 수로 빠져나갈 것인가. 카르낙이 알게 되면? 그럼 그때는?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정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저에게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래 봬도 창녀촌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으니 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루이스는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심으로 호소했다. 어느덧 창녀촌에 드나든 지 십여 년. 웬만한 고급 창부보다 더 경력이 오래된,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그냥 저를 창놈이라 생각하고 물어보시면 됩니다.”

그래. 내가 바로 캘던의 자타 공인 창놈. 그러니 부디 망설이지 말고 하문해 달란 거다. 릴리가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 이내 시험하듯 물었다.

“좋아요. 그럼 출혈과 복통에 대해서 좀 묻고 싶은데요.”

“…오늘 밤까지 이곳으로 데려오겠습니다.”

“내 방으로요.”

“네. 아가씨.”

루이스는 어금니를 사리물고 대답했다.

염병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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